-103-
“응? 으음, 그렇지. 나는 시리우스가 좋아.”
열심히 시리우스의 장점을 쥐어짜고 있자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히프노스가 물었다. 의외의 질문이었으나 나는 금방 긍정했다. 무릎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하얀 털 뭉치를 쓰다듬으며.
“니아가 좋아하니까 나도 노력할게! 아직 나쁜 인간을 완전히 좋아할 순 없지만!”
“고마워.”
“멍!”
무릎에 있던 하얀 털 뭉치가 우리 대화에 호응하는 것처럼 가볍게 짖었다. 이젠 이름과 너무 안 어울리는 털 색으로 변한 밤이었다.
“그 짐승에게서 나쁜 인간의 마력이 느껴진다.”
오, 역시 히프노스는 바로 알아보는군.
시리우스와 마력이 연결되어 검은 털을 가졌던 밤이는 그의 저주가 풀리자 똑같이 은색으로 털 색이 바뀌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밤이가 귀여워서 작게 웃으며 히프노스에게 말했다.
“밤이도 고맙대.”
나와 시선을 맞추고 있던 히프노스는 느리게 날갯짓을 하며 밤이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약간 경계하는 눈빛으로 유심히 자신을 보는 히프노스를 밤이가 할짝 핥았다.
“으악!”
“헥헥.”
강아지 침을 뒤집어쓴 히프노스는 거리를 벌리며 소리를 쳤고, 밤이는 히프노스를 작은 장난감이라 생각했는지 앞발을 휘저어 그를 잡으려고 했다.
“이 녀석! 나쁜 인간의 앞잡이구나!”
“멍멍! 멍!”
“히프노스 진정하고 이리 와. 닦아 줄게. 밤이도 얌전히 앉아 있자.”
나는 인간이 아닌 존재들로 소란스러워진 마차 안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황궁에 도착했습니다.”
“그래.”
밖에 있던 마부가 마차를 세우며 내게 알려줘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나는 손수건으로 히프노스를 닦아 주고, 그를 작은 손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알아서 마차에서 내린 밤이를 품에 안았다. 황궁에 개를 데려와도 되는지 고민했으나 공작과 검성이 괜찮다고 해서 같이 왔다.
‘어쩔 수 없지. 밤이는 이번 계획에 꼭 필요하니까.’
안전장치이며 이번 계획의 핵심!
밤이와 시리우스의 감각을 연결해서 내게 위험한 일이 생기면 그가 바로 달려올 수 있도록 하고, 밤이의 눈을 통해 본 것을 영상으로 녹화하는 것이다. 시리우스에게 가능한지 물어봐야 했지만 시리우스라면 당연히 가능하다고 할 것 같아서 밤이를 데려온 거였다.
“히프노스는 시리우스를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할 거지?”
“그래! 니아랑 약속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시리우스를 불러와 줄 수 있을까?”
끅! 이라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싫은 내색을 내비쳤으나 히프노스는 끝끝내 거절하진 못했다. 나는 법무부 앞에 있는 벤치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며 응원했다. 한숨을 포옥 내신 히프노스는 무거운 날갯짓을 하며 시리우스 궁으로 날아갔다.
“밤아 여기서는 조용히 있어야 한다?”
“멍!”
밤이를 품에 안고 도착한 벤치는 한적했다. 법무부는 성 끝쪽에 있어서 그런지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바람에 살랑대는 나뭇잎 소리만 들렸다. 이렇게 평화로운데. 광합성을 하는 식물처럼 햇빛을 받으며 생각에 잠겼다.
‘도박에 실패할 경우 어떻게 되는 걸까.’
최악의 스토리.
내통했다는 자백은 듣지 못하고, 금제만 걸리겠지. 아니,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다. 내통하는 것을 들켰는데 살려 줄 필요가 없으니. 거기서 나는 살아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세르니아 님!”
“깜짝이야!”
멍하니 앉아 있는데 시리우스가 뒤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 텔레포트를 쓴 건 알겠지만 인기척 정도는 내고 오지. 나는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며 옆자리를 톡톡 쳤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은 그는 성큼 다가와서 앉으며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봤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응. 일이야 계속 있지.”
농담할 기운도 없었으나 최대한 밝게 대답했다. 시리우스가 도착하자 밤이가 꼬리를 흔들며 격하게 그를 반겨줬다. 시리우스는 적당히 밤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피 때문입니까?”
“뭐, 그것도 있지만. 오늘 너를 부른 건 부탁할 게 있어서.”
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아침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에게 부탁할 내용까지 설명을 마치자 시리우스는 벌떡 일어서며 언성을 높였다.
“안 됩니다.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알고 있어.”
“아리엘 때문입니까? 하루아침에 죽을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곧 정신을 차릴 터. 그때 아리엘과 대화를 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천천히 조사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시리우스의 말대로 아리엘이 걱정되는 것도 맞았고, 이왕이면 아라네아 기습을 타이밍을 맞추고 싶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나를 조급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
‘데이지의 꿈을 꾸지 않는 것.’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으나 내겐 중요했다. 정확히 황후와 티타임을 가지고, 그녀와의 대화에서 꿈의 잔상을 본 후부터였다. 황후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되고, 아리엘이 금제까지 걸리자 내 본능이 빨간불을 울렸다.
“느낌이…… 안 좋아서…….”
마땅한 변명을 찾지 못해서 말끝을 흐렸다. 단지 느낌이 안 좋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시리우스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자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겠습니다.”
“알겠다니……. 뭘?”
지금 대화의 흐름이 내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게 맞나? 방금까지 위험하다고 반대하던 시리우스가? 고작 내 느낌이 안 좋다는 이유를 듣고? 내가 말했지만 어이없을 만한 이유인데.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리우스에게 재차 질문했다.
“세르니아 님의 계획에 동참하겠습니다.”
“정말? 그런 납득 안 가는 이유 때문에?”
“세르니아 님은 고집이 세니까요. 말도 안 되는 이유고, 자신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해야 한다고 결정하셨으니 절대 의견을 바꾸지 않겠죠. 피를 구하기 위해 어차피 가실 생각이었으니 제가 말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할 일은 최선을 다해 세르니아 님을 서포트 하는 것.”
누군가 자신을 믿어 주는 것만으로 힘이 된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오전엔 공작이 오후엔 시리우스가.
“고마워.”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작게 속삭였다. 시리우스는 해사하게 웃으며 눈물이 고인 눈두덩이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가까워지고 숨결마저 닿을 거리, 나는 천천히 눈을 감으려고 했다.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니아! 나쁜 인간은 역시 나빴다!”
히프노스였다. 나는 못 할 짓이라도 하다가 걸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뒤로 빼려 했으나 시리우스는 재빠르게 내가 물러서지 못하도록 허리를 잡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눈꼬리를 휘며 웃고 있던 시리우스는 어느새 무표정으로 짧게 혀를 찼다.
“타이밍을 못 맞추는 정령이 더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뭐?! 나쁜 인간! 아니 너는 완전 나쁜 인간이다! 내가 니아의 부탁을 받고 좋게 보려고 노력했는데 내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다니!”
“무슨 일이야?”
나는 격하게 파닥이는 히프노스의 날갯짓을 보며 둘 사이에 뭔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니아의 말을 전달하고 있는데 저 나쁜 인간이 내게 마비 마법을 걸었다!”
“아……. 시리우스가 나빴네.”
마비 마법이라니. 히프노스의 어휘 실력이 어린아이 정도라 ‘나쁜’이라고 말하는 거지, 욕을 알았더라면 필히 욕을 날렸으리라.
“저 녀석이 먼저 시비를 걸었습니다. 세르니아 님의 말을 듣고 싶으면 무릎 꿇고 빌라고 했는걸요.”
“히프노스 정말이야?”
“아, 아니다! 무릎 꿇고 정중한 자세로 들으라고 했을 뿐이다.”
이건 뭐…….
나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랄까. 둘이 똑같은 수준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무릎 꿇었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고작 정령에게 고개 숙일 리가요.”
“그럼 어떻게 했어?”
“나쁜 인간이 나를 속였다!”
“유도 신문에 걸려든 네가 멍청한 거지.”
양쪽에서 소리치는 바람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히프노스는 원래 어린아이 같았으나 그와 떠들고 있는 시리우스도 이렇게 유치할 줄이야. 내가 이들에게 28살의 정신연령을 바란 것도 아니건만 이건 유치원생 대화 수준이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일단 둘을 말리려 했다. 그때 법무부 문이 살짝 열렸다.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가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검지로 쉿 하는 제스처를 하더니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자, 둘 다 진정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잖니?”
“죄송합니다.”
“미안해.”
“얌전히 무릎 위에 앉아 있는 밤이가 제일 어른스럽네.”
“멍!”
둘은 말없이 밤이를 노려봤다.
이내 강아지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들은 것이 억울한지 시리우스는 의연한 척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흠, 우선 밤이와 저의 감각을 연결하겠습니다.”
“멍멍!”
시리우스는 밤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 텔레포트를 사용할 때처럼 은은한 빛이 감돌더니 빛이 밤이의 몸속으로 흡수됐다.
“자, 이제 밤이가 보고 듣는 것이 바로 제게 전달됩니다. 그리고 좀 있다 궁으로 돌아가서 영상 저장 장치를 연결하겠습니다.”
꽤나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마법이 순식간에 끝났다. 시리우스의 대단함을 새삼 느끼며 밤이를 건네받았다.
“어? 밤이 눈 색이 변했네.”
“네. 저와 감각이 연결되어서 제 색과 섞였습니다.”
시리우스의 저주가 풀렸음에도 여전히 검은색이던 눈동자에 붉은빛이 감돌았다. 오, 이거 완전 팥죽색인데. 분홍색과 검은색이 섞이면 검은색이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리우스 혹시……. 오늘 바쁘니?”
나는 조심스럽게 시리우스의 일정을 물었다. 블레닌의 밤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그는 바쁠 것이다. 시리우스 궁에 있던 다른 마법사들도 정신없이 일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마탑주인 시리우스가 바쁘면 더 바빴지 절대 한가하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그가 필요했기에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