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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시리우스 성격상 내가 부른다면 어떤 일이라도 제쳐놓고 달려오리란 걸 알았으니까.
‘양심의 가책이…….’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시리우스뿐이었으니. 그를 위해 최대한 헬리오스와 대화를 빨리 끝낸다!
“헬리오스 궁에 갈 건데, 같이 가줄 수 있을까?”
“형님 궁엔 어떤 일로?”
시리우스의 눈빛이 조금 사나워졌다.
헬리오스를 만나 검성의 계획을 전하고 협력할지 물어보는 것. 중요한 대화인 만큼 이번에도 진실의 맹세를 하고 핵심만 빠르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최대한 정보가 새지 않도록 최소의 인원으로 헬리오스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시리우스가 있어야 했다.
“진실의 맹세를 할 건데. 믿을 수 있는 마법사가 시리우스밖에 없어.”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 게 아니었다면 어떻게 하려고 했을까.
잡생각은 밀어두고 시리우스와 함께 헬리오스 궁으로 향했다. 히프노스에게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히프노스는 내 히든카드니까 아무리 협력하는 사이라도 숨기는 편이 좋아.’
본궁에서 가까워서 히프노스와 밤이에게 주의를 주는 사이 도착했다. 궁을 지키고 있는 기사가 시리우스를 알아보고 무슨 일인지 물어왔다.
“형님을 뵈러 왔다.”
“헬리오스 님은 집무실에 계십니다만……. 미리 약속을 잡으셨습니까?”
“형제 사이에 잠깐 얼굴을 보는데도 약속을 잡나?”
“하, 하지만…….”
기사는 시리우스의 눈빛에 주춤했다.
저주받은 황자나 힘없는 황자라는 소문은 이미 옛날 옛적의 것. 현재 마탑주인 시리우스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황제마저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인 데다가 황족이었으니 일개 기사인 그는 시리우스를 막지 못했다. 그렇지만 허가 받지 않은 사람은 궁에 들이지 못한다는 의무 또한 수행해야 했기에 쉽게 길을 비키지도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무슨 일이십니까?”
다행히 안쪽에서 상황을 해결해줄 집사가 나왔다.
나는 집사에게 인사하고, 이름을 대려고 했는데 시리우스가 한발 빨랐다.
“형님에게 급히 할 말이 있다고 전해줘.”
집사는 시리우스를 보고 잠시 놀랐으나 능숙하게 표정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우리에게 기다려달라는 양해를 구하고 헬리오스의 집무실로 갔다. 로비에서 기다리자 돌아온 집사가 우리를 집무실로 안내했다.
똑똑.
“들어와.”
“제국의 영광, 태양의 후손 황태자님을 뵙습니다.”
“형님 오랜만입니다.”
헬리오스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흥미로운 눈으로 인사를 받았다. 블레닌의 밤 행사 준비로 바쁜 이 시기에 제일 바쁠 사람이 자신을 찾아왔으니. 우리는 그의 시선을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폭신한 소파에 앉자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차를 준비했다.
“그래. 무슨 일이지?”
“오늘 아침 편지를 보냈는데 혹시 읽으셨나요?”
“편지? 아아, 미안하군. 밀린 서류가 많아서 못 봤어.”
“바빠 보이네요. 그, 잠시 사람을 물려주실 수 있을까요?”
헬리오스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내 목적을 파악하려 했다. 시리우스와 나를 몇 번 번갈아 보더니 긴 숨을 내쉬며 가볍게 손짓했다. 대기하고 있던 시녀도, 그의 보좌관도 집무실에서 나갔다. 집무실엔 나와 시리우스, 헬리오스만 남았다. 뭐, 그를 지키기 위해 몸을 숨기고 있는 자들은 그대로 있겠지만 상관없었다.
“시리우스, 방음 마법 가능해?”
“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반투명한 막이 생겼다.
헬리오스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으나 제지하진 않았다. 아마도 우리의 방문 목적을 대충 눈치챘기 때문이리라.
“꽤나 중요한 이야기인가 보군. 어제 했던 대화의 연장선인가?”
“네. 오늘 루카리온 님이 공작가를 방문하셨습니다.”
“검성이?”
사뭇 진지해진 얼굴이었다. 검성의 존재는 무게를 더하기에 충분했으니. 나는 빠른 이야기 진행을 위해 본론부터 꺼냈다.
“네. 이렇게 급하게 방문한 이유도 루카리온 님이 말해주신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검성이 어머님과 척을 지고 있을 줄이야. 아니, 아카데미 테러 사건이 원인인가.”
생각에 잠긴 헬리오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검지로 팔걸이를 톡톡 쳤다.
어제 진실의 맹세에서 알려준 것은 어디까지나 아카데미 테러 사건의 진실. 아라네아에 대한 것을 알려줬으나 검성이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었다.
“황태자님과 진실의 맹세를 하길 원합니다.”
“……그렇군. 그래서 시리우스와 같이 왔구나. 좋아.”
금안이 예리하게 빛났다.
역시 헬리오스도 상황 파악이나 의중을 읽는 능력이 뛰어나다니까. 그는 순식간에 내 의도를 파악했다. 헤르세를 믿지 못해 시리우스를 데려왔다는 것까지.
“질문은 두 가지로. 괜찮습니까?”
“그래.”
헬리오스는 책상에서 빈 종이를 가져왔다.
그가 건넨 종이를 받아든 시리우스가 마력을 불어넣고, 나와 헬리오스가 종이 위에 손을 올렸다.
“수많은 거짓 속에서 존재하는 단 하나의 진실. 여기 ‘세르니아 아르덴타인’과 ‘헬리오스 아슬란데’는 두 가지의 질문에 오직 진실만을 말할 것을 심장을 걸고 맹세한다.”
조건은 어제와 같은 것으로. 나는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기에 준비했던 질문을 먼저 던졌다.
“저부터 묻겠습니다. 황태자님이 모은 세력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십시오. 어제 ‘프레세스’라는 조직을 언급하셨는데 그것을 포함해서 다른 세력이 있다면 전부요.”
긴 질문이었다.
그리고 맹점을 막기 위해 구체적으로 질문한 것이다. 내가 히프노스를 히든카드로 들고 있는 것처럼 헬리오스 또한 내게 알려주지 않은 비장의 수단이 있을지 몰랐기에 그 부분도 짚고 넘어가야 했다.
“나를 털어먹으려고 작정하고 왔군.”
헬리오스는 뭐가 그리 웃긴지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그치자 진지한 금색 눈동자에 불편한 기색이 감돌았다. 미약한 분노와 짜증, 기분 나쁨. 자신의 모든 패를 밝혀야 하는 상황이니 그가 화낼 만했다.
“심장이 걸렸으니 대답은 하겠다. 그러나 만약 배신을 하거나 약점으로 잡으려고 한다면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저는 기본에 충실할 뿐입니다. 적을 알기 전에 아군의 전력부터 확인하는 것이 전술의 기본이니까요.”
헬리오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아군이라는 단어를 힘줘서 말했다.
사실 이 질문은 변수를 파악하려는 목적이었다. 그가 일부러 프레세스라는 조직을 언급한 것은 아닌지. 그 외에도 내 뒤통수를 칠 다른 조직이 있는 건 아닌지 알아야 했다. 헬리오스를 80% 신뢰한다고 해서 배신할 20%가 제로가 되는 건 아니었기에 충분한 대비가 필요했다.
“후, 일단 넘어가 주지. 내 독자적인 세력은 프레세스밖에 없다. 나머지는 내 세력이라기보단 황실의 세력이다. 그리고 프레세스는 소수정예로 인원은 전부 13명이다.”
13명. 적은 숫자였다. 당장 황후의 세력만 하더라도 아라네아에 제국의 귀족 13명 이상을 포섭했을 것이다.
“다만 내가 뽑은 13명은 황궁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어머님과 전혀 접점이 없는 녀석들이지.”
“확실하게 믿을 만한 사람, 황궁에서 힘을 낼 수 있는 사람 위주로 뽑은 거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는 황태자였다.
대부분의 시간을 황궁에서 보내고, 이어 황제가 되어서 의견을 냈을 때 지지해주는 세력은 당연히 황궁 안에 있어야 했으니. 황궁에서 요직을 받은 귀족들은 대게 가문의 장남이 아니었다. 장남은 가문을 이어받아 이끌어나가기도 정신없는데 재무대신이나 외교대신까지 하긴 벅차기 때문이다. 물론 카일렌 후작 같은 예외도 있지만.
“그래. 그들 중에는 평민도 있지. 어제 봤던 헤르세가 대표적으로 내 지원을 받고 자란 녀석이다. 설마 ‘자세히’라곤 했으나 13명이 전부 누군지 밝혀야 하는 건 아니겠지?”
“당연하죠. 그건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를 나눌 때 묻도록 할게요.”
솔직히 13명이 누군지 알고 싶었다. 그래야 계획을 짤 때 편할 터. 하지만 지금은 헬리오스의 심기를 더 건드려선 안 됐다. 그의 경고를 무시하면 아무리 공통의 적을 상대하더라도 신뢰 관계가 무너지고 만다.
“이제 내 차례군.”
미간을 찌푸린 헬리오스는 바로 질문하지 않았다.
검지로 팔걸이를 톡톡 치며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대체 무슨 질문을 하려고 저렇게 생각하는 거지. 나는 무릎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밤의 온기를 느끼며 애써 긴장을 풀었다. 내가 그의 심기를 긁었으니 그냥 넘어갈 리는 없고. 나는 정적 속에서 헬리오스의 질문을 기다렸다.
“처음엔 온실에서 태평하게 지내는 단순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너와 대화를 나눌수록 재밌는 녀석이라고 인식이 바뀌었어. 솔직히 아카데미 임시 선생님으로 온 것도 어느 정도 예상했지.”
헬리오스 입에서 나온 건 질문이 아니었다.
욕은 아닌데 욕같은 느낌이었으나 그의 말을 끝까지 듣기 위해 끼어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