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제가 황비를 저주할 때 매개로 썼던 정령이네요. 세르니아 양과 계약을 했을 줄이야. 당신은 정말 제 예상을 쉽게 깨버리는군요. 뭐, 좋아요.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할까요? 아직 시간도 남았으니까요.”
“대체 언제 황태자님에게 금제를 걸어놨죠? 모든 게 연기였나요?”
솔직히 충격받았다. 원작을 너무 믿고 있었기 때문일까. 헬리오스는 절대적인 ‘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인공이니까 나쁜 일은 할 리 없다고. 그런 안일한 판단이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헬리오스에겐 금제를 걸지 않았어요. 금제는 아기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마법이거든요. 아쉽지만 감각만 연결해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신의 한 수로 돌아왔네요.”
헬리오스도 이용당했다. 나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랬기에 진실의 맹세도 걸리지 않았겠지. 대부분 세력에 숨어들었을 스파이만 견제했을 뿐, 조직의 중심부에서 정보가 새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을 테니. 그제야 아카데미 테러 사건도 오늘까지 있었던 일도 전부 알고 있었던 이유가 납득이 됐다.
“태어나자마자 마법을 걸었다니……. 당신, 황태자님을 자식으로 생각하긴 했나요?”
“당연하죠. 제 귀여운 자식인걸요. 그러니 제 손으로 고통 없이 한 번에 죽여줄 겁니다.”
미쳤다. 황후는 정말 미쳤다.
붉은 눈동자에 번진 광기는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욕망으로 가득 찬 그녀의 눈을 보고 있으니 알 수 없는 공포가 몰려왔다. 두려움 때문에 피부에 소름이 돋았으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수호자라는 하루살이도 거슬리긴 했죠. 뜬금없이 나타나서 내가 적이라며 헬리오스에게 바람 잡았으니. 잡으려고 했지만 하루살이답게 요리조리 피해 다니던지. 황궁에서 쫓아냈는데도 밖에서 제 계획을 들쑤셔서 성가시긴 했어요.”
수호자는 몰랐을 것이다. 그러니 헬리오스에게 직접 모습을 드러냈겠지. 헬리오스가 황후를 견제하는 세력을 만들어서 미래에 도움 되길 바랐던 행동이 오히려 독이 됐다. 헬리오스를 통해 황후는 견제 세력의 정보를 쉽게 손에 넣을 수 있게 됐으니.
크르릉!
내 움직임만 제한했는지 품에 안겨 있던 밤이가 스스로 벗어나서 내 앞에 섰다. 그러자 히프노스의 위협에도 코웃음 치던 황후의 발걸음이 멈췄다. 하얀 털 뭉치의 크기가 점차 커졌다. 작은 포메리안 같던 밤이는 늑대와 비슷한 덩치가 됐다.
“시리우스의 마력을 가진 짐승이군요. 그래 봤자 진짜보다 못하죠.”
여유로운 척 말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표정에는 미약한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황후를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은 시리우스뿐이라는 뜻인가. 나는 속뜻을 놓치지 않았다. 밤이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주길 바라며 시리우스가 올 때까지 어떻게 해서든 버터야 했다.
펑!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커다란 폭발 소리가 들렸다. 진원지는 찾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화사하게 웃고 있는 황후의 등 뒤로 연기가 피어올랐기에. 그러나 한차례의 폭발이 끝이 아니었다. 지축을 흔드는 진동과 함께 폭발 소리가 연차적으로 울려 퍼졌다. 황궁이 불타고 있었다. 이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당신이 여기 있는데 어째서…….”
“준비된 장기 말을 조금 빨리 꺼내는 건 그리 힘든 일이 아니죠. 걱정 말아요. 당신이 걱정하는 백성은 다치지 않을 테니. 황제를 제거하고 협력하지 않은 자들은 모두 죽일 겁니다.”
“아르덴타인과 루카리온 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황태자님과 감각을 연결했다지만 적이라는 것은 변치 않습니다. 그들이라면 제가 없더라도 충분히 힘을 모아 당신의 세력을 막을 거라 믿어요.”
높이 치솟은 연기는 태양을 가렸다. 흐린 하늘 아래에서 기이하게 웃던 황후가 쥐고 있던 부채를 펴며 태연하게 말했다.
“말했죠? 세르니아 양이 마지막 열쇠라고.”
“제가 구심점이기 때문인가요?”
“맞아요. 구심점을 제거하면 뭉쳐 있던 것들은 쉽게 무너집니다. 당신이 믿고 있는 아르덴타인도 검성도 헬리오스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자멸하겠죠.”
“아니에요! 그들은 제가 없어도 자신의 일을 해낼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목숨을 제가 인질로 잡고 있는 상태라면?”
“!”
나는 황후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갑자기 나를 황후궁에 불러서 자신의 계획을 전부 밝히며 시간을 끈 이유. 반란이 일어났을 때 나를 인질로 사용해 견제 세력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적어도 아르덴타인과 시리우스는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리라.
‘상황이 좋지 않아.’
전체적으로 상황이 불리했다. 내가 인질로 잡혀서 우리 쪽이 제대로 힘을 못쓰는 것도 곤란했으나 일단 이 반란자체가 제 살을 깎아 먹는 것이었다. 어느 한쪽이 승리할 경우 반드시 한쪽은 제거된다. 귀족의 반이나 사라지는 것은 피해가 너무 컸다. 반란을 진압하더라도 황궁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몇 년이 걸리겠지.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지? 나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구심점을 제거!’
떠오른 계획은 황후의 계획과 똑같았다. 최대한 피해 없이 반란을 끝내기 위해선 황후만 제거하면 됐기에. 대부분 황후의 금제로 움직이는 귀족들일 테니 그녀가 죽으면 쉽게 무너지리라. 그리고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카드는 내 손에 있었다.
‘히프노스. 나가서 반란을 막아줘. 양쪽 세력을 상처 없이 제압하기 위해서 너의 힘이 필요해!’
황후궁에 있는 사람을 단번에 재운 히프노스라면 황궁 전체에 있는 사람들도 금방 재울 수 있을 것이다.
[안 돼! 지금 내가 없으면 니아가 위험해!]
‘하지만 피해 없이 반란군을 제압할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몸은 딱딱하게 굳었지만 머리는 멈추지 않고 돌아갔다.
발목 잡혔다고 끝이 아니었다. 아니 포기하기엔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었다. 황후의 말대로 나는 구심점이었으니 여기서 무너질 순 없었다. 나를 위해 스스로 금제를 건 아리엘을 위해서라도.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생각해야 했다. 나는 손가락 하나도 꿈쩍할 수 없었지만 황후의 주의를 돌리며 시간을 끄는 것은 할 수 있었다. 황후가 내게 했던 계획을 그대로 돌려줄 생각이었다. 거기다 히프노스와 떨어진 거리가 엄청나게 멀더라도 계약되어 있는 한 지금처럼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밖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시간을 끌면서 반란군을 전부 재운 후 황후를 잡기 위해 황후 궁을 포위한다면 그녀를 잡을 수 있으리라.
[니아. 내 쌍둥이를 소환하자!]
히프노스는 나를 놔두고 가는 게 못내 불안했는지 의외의 제안을 했다. 히프노스의 쌍둥이 정령. 그에게 이야기를 들었으나 그가 정확히 어떤 정령인지는 몰랐다. 그래도 히프노스가 소환하자고 말할 정도면 분명 도움 되겠지. 문제는 내가 정령 친화력이 없다는 것.
‘너는 특별한 경우라서 나와 계약할 수 있었던 거잖아.’
[내 힘을 매개로 하면 소환할 수 있을 거야! 내 힘으로는 나쁜 인간을 쓰러트릴 수 없으니까…….]
히프노스는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 머리 위에 앉았다. 황후는 정령의 힘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방심했는지 히프노스의 행동에 반응하지 않고 밤이만 보고 있었다.
[니아 시간이 없어! 내가 힘을 불어넣을 때 나를 소환했던 것처럼 강한 사념으로 이름을 외쳐!]
‘지금 할 거야?’
[응. 나쁜 인간이 눈치채기 전에 해야 해! 하나, 둘, 셋 하면 타나토스라고 외치면 돼!]
상황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황후가 밤이에게 정신 팔려서 우리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기 전에 새로운 정령을 소환해야 했다. 몸은 여전히 안 움직였으나 말은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황후를 노려봤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무력하게 있는 느낌은 어떤가요? 절망스러운가요? 두려운가요?”
밤이와 대치하고 있던 황후는 내 눈빛을 느끼고 신경을 긁는 말을 뱉었다. 나를 자극해서 이성적인 생각을 못 하게 하려는 속셈이겠지. 나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 본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동시에 머릿속에선 히프노스의 외침이 들렸다.
[하나!]
‘둘’
[셋!]
침착하자. 히프노스를 믿자.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듬으며 숫자를 셌다. 그리고 신호에 맞춰 강하게 생각했다. 새로운 정령의 등장을.
[타나토스!]
“타나토스!”
땅에서 환한 빛이 나타났다. 히프노스를 소환했을 때보다 더 강렬한 빛이었다. 하얗게 터져 나왔던 빛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고, 이내 어둠 속에서 새로운 정령이 나타났다. 히프노스보다 훨씬 컸다. 나보다 큰 타나토스는 긴 흑발에 검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는 마치 사신 같았다.
“죽음의 정령…….”
방심하고 있던 황후는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황후가 소환하려던 정령이 타나토스라고 했었다. 그녀는 타나토스가 어떤 정령인지 잘 알고 있으리라.
[나를 소환한 인간이 너냐?]
시리우스보다 낮은 목소리였다. 어둡고 무거운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바로 울려 퍼져서 놀랐다. 몸이 움직였다면 흠칫거렸을 것이다.
[타나토스! 긴급 상황이야!]
[히프노스. 익숙한 힘이 느껴져서 왔더니 역시 너였군.]
[지금 잡담할 시간 없다니까! 얼른 니아랑 계약해!]
[내가 왜 인간과 계약을 해야 하지. 그것도 친화력도 없는 녀석과.]
새카만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황후와 다른 느낌 때문에 소름 돋았다.
잠시라도 긴장을 풀면 어둠에 잠식당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타나토스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내 머리맡에서 코를 대며 킁킁거렸다.
[네게서 죽음의 냄새가 나는군. 죽은 자는 아닐 테고…….]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타노토스가 말한 죽음의 냄새가 뭔지 추측하려는데 황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제가 세르니아 양을 만만하게 봤네요. 살짝 방심한 사이에 죽음의 정령까지 소환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