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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109화 (10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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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황후의 표정을 살폈다. 이 주제는 황후가 나를 휘두를 수 있는 카드. 쉽게 보여주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지금 이 타이밍에 굳이 꺼낸 것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원래는 아리엘 양에게 금제를 걸어서 아르덴타인을 제 쪽으로 흡수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녀가 만남을 거절해서 다른 방법을 강구하려 했는데 때마침 세르니아 양이 황궁에 왔다는 것을 알게 됐죠. 일단 세르니아 양도 아르덴타인이고, 아카데미 테러 사건을 해결한 장본인이니 한번 만나서 대화나 해보자 싶어서 초대한 거였어요.”

나에게 접근할 수 없어서 아리엘에게 방향을 돌린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반대였다니. 황후는 애초에 아리엘과 접촉하려고 했던 것이다.

“저를……. 미끼로 사용한 건가요?”

아리엘의 거부에 초조해하던 황후는 우연히 내가 황궁에 방문한 소식을 듣고 강제로 나를 불렀다. 내게 금제를 걸어서 아리엘과 만나려고 했던 것이겠지. 내게 금제를 걸려는 계획은 틀어졌으나 본래의 목적은 이뤘을 것이다. 내가 황후와 만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리엘이 직접 황후를 찾아갔을 테니.

“어머, 미끼라니 어감이 좋지 않네요. 그저 아리엘 양이 만나주지 않아서 세르니아 양에게도 말을 걸었을 뿐인걸요.”

그녀의 웃음이 구역질 났다.

사람을 단순히 장기 말로 보고 있는 눈. 나도 모르는 사이 황후에게 이용당한 것이다.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아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죠?”

“세르니아 양은 의외로 성격이 급하군요. 걱정 말아요. 천천히 말해줄게요.”

능청스럽게 원하는 이야기로 유도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조급함이 드러났는지 황후는 여유롭게 웃으며 부채를 팔랑거렸다.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황후. 여기서 재촉할수록 상황이 불리해진다. 나는 열이 오르는 머리를 식혔다. 이럴 때야말로 냉정해져야 한다.

“아리를 만나 아르덴타인을 흡수하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됐나 봐요? 어제 아리를 만나고도 별로 바뀐 게 없으니. 아니면 다른 조건으로 거래를 했나요?”

그녀의 신경을 긁으려고 일부러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빈정거리는 말투로 얄밉게 말했다. 그러나 황후의 표정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내 의도를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예리하네요. 세르니아 양은 아리엘 양이 왜 찾아왔다고 생각해요?”

“저 때문이겠죠. 무슨 이유로 저를 만났는지, 저와 어떤 대화를 했는지 묻기 위해서.”

“반은 맞아요.”

“반은 틀렸다는 건가요?”

“아니요. 세르니아 양이 말한 내용은 반만 맞췄다는 거예요. 아리엘 양이 저를 찾아와서 당신이 말했던 것을 물었죠. 그리고 한 가지를 제게 요구했어요. 세르니아 양을 건드리지 말라고 말이에요. 정말 당돌하지 않나요? 아무리 공작가의 영애라지만 저는 제국의 황후입니다. 공작위를 달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제게 그렇게 말하다니. 가정교육을 다시 받아야겠더군요.”

내 예상과 조금 달랐으나 아리엘이 황후를 만난 것도 금제에 걸린 것도 나 때문인 건 변하지 않았다.

“설마 아리가 황후 폐하와 거래를 한 게 저의 안전 때문인가요?”

“맞아요. 제가 당신을 건드리지 않기로 약속하고 저는 그녀에게 금제를 요구했습니다. 제가 아리엘 양에게 억지로 금제를 걸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서로 합의하에 이루어진 겁니다.”

“그게 황후 폐하에게 무슨 이득이 있죠? 금제를 대가로 하는 거래는 대개 양쪽의 이득이 있어야 하죠. 아리엘이 제 안전을 요구했다면 황후 폐하도 무언가 요구를 했을 테지요.”

아리엘이 나로 인해 금제를 받았다는 죄책감이 마음을 짓눌렀으나 지금은 거기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쨌든 아리엘이 무엇 때문에 황후와 만났는지 알게 됐고, 수호의 심판을 쓸 수 있는 증거도 만들었다. 오늘 반란을 일으킨다고 했으니 여기서 계속 황후와 대화를 하고 있을 순 없었다. 나는 대화를 이어나가는 척하며 황후의 뒤에 서 있는 시녀들을 훑었다. 저번에 왔을 때도 느꼈지만 황후궁에는 기이할 정도로 기사가 없었다. 입구를 지키는 자도 없었고, 시종이나 집사도 보이지 않았다.

“금제를 거는 것 자체가 제 요구였어요. 그녀에게 건 금제는 조금 특별하죠.”

“금제에 저주를 섞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다른 금제와 달리 황후 폐하의 피가 있어야 해주가 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시리우스가 아리엘 양의 상태를 살폈나 보군요. 그것도 예상했답니다. 제 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당신은 제 발로 저를 찾아올 것까지도.”

역시 황후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우리를 파악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우리의 상황과 성격까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공작가에 아라네아가 있는 걸까. 여러 의문이 떠올랐으나 잠시 덮어 두었다. 지금은 황후궁에서 탈출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기사가 없으니 도망가더라도 쫓아올 사람이 없다. 시리우스의 마법이 있다면 쉽게 탈출할 수 있겠지만 연락이 안 되니 무리고……. 히프노스에게 여기 있는 사람 전부 재울 수 있는지 물어볼까?’

황후에 대한 분노를 삼키고 차분하게 탈출 루트를 고민했다.

금제가 걸리지 않았고 황후는 여전히 방심하고 있으니 틈을 노려야 했다. 저질 체력이라 시녀들을 상대로 얼마나 빠르게 달릴 수 있을지 걱정되긴 했으나 그나마 가능성 있는 탈출 방법이 히프노스의 능력을 이용해 주위의 시녀들을 잠재우고 도망가는 것이다.

‘문제는 히프노스가 재울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모르는 것과 히프노스의 능력이 안 통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예를 들자면 눈앞에서 싱긋거리며 기분 나쁘게 웃고 있는 황후. 그녀는 정신 마법이 뛰어나다고 했으니 정령의 힘일지라도 방어할 가능성이 있었다. 거기다 그녀와 마력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안 통할 수도 있었고, 범위가 좁을 경우 궁에서 대기하고 있던 다른 시녀들이 나를 잡으러 올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하나요. 이것 참. 세르니아 양이 제게 집중할 수 있도록 아리엘 양의 이야기를 꺼낸 거였는데 이마저도 질려 하는 건가요. 세르니아 양은 변덕쟁이군요.”

“제가 황후 폐하에게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뭔지 고민하고 있었답니다. 일부러 제가 관심을 가질 만한 이야기를 꺼내며 제가 다른 생각을 못 하게 하는 이유.”

황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녀의 정곡을 찌른 것이리라.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황후를 쳐다봤다. 내가 다른 생각을 못 하게 하는 이유가 뭔지 가늠하며.

“세르니아 양 어째서 제가 모든 걸 알고 있는지는 안 궁금한가요?”

“또 제 주의를 돌리려는 건가요. 알겠다. 황후 폐하는 제 발을 묶고 있는 거군요. 계속 대화를 하며 제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시간을 끌고 있는 거죠.”

조금만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오는 문제였다.

나는 히프노스에게 머릿속으로 말을 걸었다. 히프노스와 계약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강한 사념을 담아 생각하면 그가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다고 했었다.

‘히프노스! 혹시 네 능력으로 황후궁에 있는 사람들 전부 재울 수 있어?’

작은 손가방에 있던 히프노스가 꿈틀거렸다. 곧이어 머릿속에서 자신감 넘치는 그의 목소리가 퍼졌다.

[당연하지! 나는 최상급 정령인걸!]

오, 생각보다 대단하구나.

히프노스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약간 안심했다. 황후가 잠들지 않더라도 나를 쫓기 위해 같이 달릴 것 같진 않았다. 나머지 변수는 히프노스의 힘에도 잠들지 않을 사람 정도. 그 부분도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방금 대화를 시리우스가 들었을 테니.

‘시리우스라면 지금쯤 황후궁으로 오고 있을 거야.’

짧은 시간 동안 생각을 마쳤다. 황후가 괜히 더 붙잡기 전에 밤이를 꼬옥 끌어안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뻔히 보이는 수에 속아 넘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히프노스는 내 신호를 받고 가방에서 나와 황후궁에 있는 사람들을 재웠다. 예상대로 황후와 수잔은 잠들지 않았으나 필사적으로 도망가면 무사히 탈출할 수도 있었다.

“저는 헬리오스와 감각을 공유하고 있답니다. 당신의 강아지가 시리우스와 감각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요.”

황후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뭐라고요?”

그녀의 폭탄 발언에 몸이 굳었다.

그렇게 조심했는데 헬리오스였다고? 헤르세가 아니라? 갑작스럽게 드러난 진실은 내 발을 묶기 충분했다. 찰나의 순간, 황후의 마법이 내 몸을 속박했다.

“흐음, 잠의 정령과 계약을 맺었을 줄이야. 이건 예상치 못했네요. 하지만 세르니아 양도 제가 헬리오스와 감각이 연결되어 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겠죠. 이걸로 서로 주고받았네요.”

젠장. 거기서 왜 반응한 거야!

너무 충격적이라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황후가 어떤 말을 하든 신경 쓰지 않고 달려야 했는데.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따끔거릴 정도로 세게 물었으나 굳은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예쁜 입술이 상하잖아요.”

황후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내게 다가왔다. 가까이 온 그녀는 내 입술을 쓸었다. 찢어진 입술에서 흐른 피가 그녀의 검지에 묻었다.

“더 이상 니아에게 다가오지 마!”

히프노스가 나와 황후 사이를 가로막았다. 내게 다가오던 그녀는 흥미로운 눈으로 히프노스를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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