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108화 (108/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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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나마 황후를 혁명가 같다고 느낀 게 잘못이었어.’

나는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개인적인 이유로 황후를 막아선 것처럼 황후도 대의를 위하는 척하고 있는 것뿐, 결국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 때문에 황제가 되려는 것이었으니.

“황후 폐하도 브릴리언 왕과 똑같은 거 아닌가요? 운이 좋아서 귀족으로 태어난 사람보다 평민으로 태어났음에도 귀족보다 영지를 잘 다스리는 사람이 있을 텐데 어째서 그런 경우는 무시하는 거죠?”

“세르니아 양에게서 그런 말을 듣게 될 거라고는 정말 예상도 못 했네요.”

“무슨 뜻입니까?”

명백한 비웃음을 머금은 황후가 부채를 접어서 테이블 위에 놓으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웃기잖아요. 황족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신분인 공작가의 한 사람이 신분제를 비난하는 것이요.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나요? 새하얀 구름 위에서 책에 적힌 지식이 전부라 믿고 있는 거 아닌가요?”

맹렬한 비난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마치 전생에 읽었던 소설을 토대로 여러 상황을 대처해온 나를 꿰뚫어 보고 하는 말 같아서 괜히 더 찔렸다. 물론 황후가 그걸 알고 있을 리도 없고, 그저 현실감각 없이 이론만 공부했다고 비꼬아 말한 것이지만. 나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저는 머리에 꽃만 가득 찬 이상론자에 불과합니다.”

정치판에 나선 적도 없었고 평민의 안위나 제국의 발전도 크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사실 머릿속이 꽃밭인 이상론자보단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소시민에 가까우려나. 어쨌든 고위 귀족으로서 편의는 누리면서 공작가를 이어받지 않아도 되기에 어떠한 의무도 지고 있지 않은 상태!

“저도 운이 좋아서 귀족으로 태어났습니다. 신분제의 특권을 누려왔죠.”

신분제가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순 없었다.

전생에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랐으나 그곳에서도 보이지 않는 신분은 있었기에. 군주제건 공화정이건 인간사회가 있다면 차별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절대적인 평등이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겠지. 어느 쪽이 더 나쁜지 선택할 권리는 내게 없었다. 선택은 내가 아니라 이 세계의 사람들의 몫이었으니.

황제가 될 헬리오스가 통치를 잘한다면 평민이라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반대로 평민 중에서 신분제가 부당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나타나고, 세력을 모아 혁명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황후는 혁명가를 가장하고 있을 뿐.’

그녀는 마치 적폐 세력을 처단하고, 권력에서 밀려난 귀족들 사이에서 능력이 있는 자들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으나 결국에는 자신의 복수 때문에 움직이고 있었다. 황후는 제국의 적폐 세력이든 권력에 밀려난 세력이든 상관없었다. 자신이 황제만 될 수 있다면 어느 쪽이라도 손을 잡았겠지. 본래 목적은 적폐 세력의 처단이 아니라 오롯이 브릴리언 왕국의 복수였으니. 나는 내 일상을 지킨다는, 지독히도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이유로 황후를 막아섰지만 결국 황후도 똑같았다.

“신분제를 비난한 게 아닙니다. 황후 폐하의 의견에 잘못된 점을 짚은 겁니다.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자신과 같은 아픔을 느끼는 귀족들의 부당한 대우를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처럼 포장하셨잖아요.”

황후는 브릴리언 왕국에서 당했던 차별 때문에 황제가 되려는 것을 지적했다.

원래 그녀는 브릴리언 왕국의 사람. 제국의 귀족들이 그녀에게 쉽사리 마음을 열 리가 없었다. 거기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이미 배가 부르기 때문에 어떤 미래를 약속하더라도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황후는 권력자들을 포기하고 배고픈 자들이 좋아할 만한 대의명분을 만들었다. 자신의 계획에 협력하면 달콤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미끼를 던지며.

“황후 폐하는 제국의 귀족 따위 어찌 되든 신경 쓰지 않으실 분입니다.”

“제 면전에 대고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세르니아 양이 처음이에요.”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는 황후는 화려하게 피어난 모란과 매우 잘 어울렸다.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잠시 넋을 잃었다가 재빠르게 정신 차렸다.

“이미 내숭을 떨기에는 늦은 것 같으니 그냥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황궁에서 고립되어 가던 황후 폐하는 아라네아 같은 소모품이 아니라 곁에 둘 수 있는 애용품이 필요했을 겁니다. 이왕이면 황궁에서 힘쓸 수 있는 귀족들로요.”

그녀는 계속해 보라는 듯이 흥미로운 눈빛을 보낼 뿐 반박은 없었다. 어느 정도 맞춘 건가. 나는 머릿속에서 나온 추측을 이어서 말했다.

“사교계에도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소수의 만남을 가져온 것도 그런 맥락이겠죠. 사람이 많은 곳에서 정신 마법을 걸 순 없을 테니까요.”

“아카데미 때도 느꼈지만 세르니아 양은 추리 능력이 뛰어나네요. 맞아요. 이제 제가 설명할 차례인가요?”

차별받는 귀족들을 위해서였다고 끝까지 잡아뗄 거라 생각했는데 황후는 순순히 긍정했다.

“굳이 따지자면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를 한 거죠.”

윈윈 관계인가. 황후와 거래를 한 귀족들은 대부분 가문을 잇지 못하는 자들. 그들을 이용해서 황후는 반란을 일으키고, 그들은 반란이 성공하면 장남을 대신해 작위를 계승하거나 그에 준하는 새로운 작위를 받을 수 있을 테니 서로에게 이득이었다.

“실패할 경우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음, 세르니아 양이 솔직하게 말했으니 저도 솔직히 말할게요. 사실 아카데미 테러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진 무조건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세르니아 양은 잘 모르겠지만 현재 요직에 있는 자 중 반 이상을 포섭했거든요. 중간에 하루살이가 끼긴 했지만 윙윙거리다가 알아서 사라지더군요. 큰 위협도 아니었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었다. 나는 많아도 반 정도거나 반 이하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놀란 표정 짓지 말아요. 18년이 넘는 긴 시간을 준비했는데 그 정도도 못 했으면 그냥 황후나 해야죠.”

농담이라고 한 건가?

그냥 황후나 계속하시면 안 되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뱉으면 왠지 목이 날아갈 것 같아서 꿀꺽 삼켰다. 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쓸모없는 농담 대신 다시 질문했다.

“그럼 아카데미 테러 사건 이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나요?”

“네. 당신이라는 예상외의 인물이 나타났으니까요. 계획을 새로 짜야 했어요. 정말 세르니아 양 때문에 제가 얼마나 고민한 줄 아세요?”

“제가 황후 폐하의 계획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닐 텐데요. 남들보다 관찰력이 좋은 것밖에 없으니까요.”

“겸손하네요. 제가 세르니아 양을 높이 사는 부분은 추리 능력이 아니에요. 뭐, 오랜 시간 동안 저를 견제한 헬리오스보다 훨씬 빠르게 제 계획을 알아차린 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정도로 계획을 수정할 필요는 없었죠. 그보다 더 저를 곤란하게 한 건 당신의 인간관계 때문이에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후의 계획을 수정할 정도로 내 인간관계가 대단했나? 의문은 금방 풀렸다.

“구심점.”

“네?”

“당신을 중심으로 저를 잡는 세력이 빠르게 형성됐죠. 제대로 움직인 건 분명 아카데미 테러 사건 이후, 1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사이 아라네아 수도 지점을 찾아내고, 제가 금제를 걸어 놓은 몇몇 귀족도 찾았죠. 그 뒤에 제가 있다는 것까지. 정말이지…….”

황후는 옅은 한숨을 쉬며 하소연했다.

아라네아를 털어도 자신에 관한 것은 일절 나오지 않도록 조치를 해놨고, 오히려 우리 쪽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연관 없는 귀족과 엮어놨었다고. 그런데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어서 아라네아를 기습하기도 전에 자신이 연관된 것을 확신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고 했다.

“검성과 아카데미 원장을 끌어들여 아라네아를 조사하게 하고, 성인이 되기 전에 죽어야 했던 시리우스의 저주가 풀었죠. 아직 세력을 모으느라 바빠야 할 헬리오스마저 설득했고 연관 없었을 아르덴타인 공작을 이용해 수호의 심판이라는 히든카드까지 꺼내서 순식간에 제 목을 죄어왔습니다.”

황후의 고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내 인간관계를 열거하던 황후는 문득 떠오른 것처럼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중에서 시리우스의 저주를 푼 게 제일 뜻밖이었어요. 시리우스의 저주는 원래 형태가 변형된 거라 저도 정확한 해주 방법을 모르고 있었거든요.”

“스스로 저주를 걸었다고 인정하는 겁니까?”

“어머, 그리 무서운 소리 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걸었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했어요.”

그녀는 과장되게 웃었다. 자신의 실수를 가리기 위한 연기가 아니라 약 올리기 위한 웃음. 밤이를 안고 있는 팔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갔다.

“그런 것치고는 꽤나 자세히 알고 계시네요.”

“후후, 이 정도는 황궁에 있는 하녀들도 아는 이야기 아닌가요?”

황후의 빈정거림에 순간 울컥했으나 품에 안겨서 ‘끼잉’ 하고 작게 우는 밤이 덕분에 이성적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감정적으로 나가는 것은 손에 들고 있는 패를 대놓고 보여주는 것이었으니 참아야 했다.

“저는 소문에 무지해서 모르고 있었네요.”

내가 물러서자 황후는 자신의 도발에 넘어오지 않아서 아쉽다는 눈빛을 보냈다.

“역시 이런 뻔한 도발에는 넘어오지 않네요. 세르니아 양이 화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뭐, 괜찮아요. 오늘은 기쁜 날이니까요.”

“서, 설마 기다리던 때라는 게 오늘인 건가요?”

그녀의 어감이 묘했다. 마치 오늘 ‘반란을 일으키는’ 기쁜 날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벌써 일어나진 않았을 거야.’

황후도 여기 있으니 반란을 이끌 사람도 없으니까. 진짜라면 빨리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다. 나는 긴장한 얼굴로 황후의 대답을 기다렸다.

“네. 드디어 기다리던 날이 됐어요. 제가 제국의 정점에 서는 날입니다.”

그녀의 입에서 인정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공작가에 알려야 했다. 헬리오스에게도. 그러나 나는 여기서 나갈 수 없었다. 적어도 외부와 연락만 할 수 있으면 한결 수월할 텐데. 밤이를 꼭 안으며 생각했다. 밤이를 통해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시리우스가 잘 전달하길 바랄 수밖에.

“세르니아 양은 대단하군요. 이 상황에서 다른 생각 할 여유가 있다니.”

“황후 폐하의 말씀이 하나같이 전부 놀라워서 혼란스러워진 머릿속을 정리했습니다.”

“저와 나누는 대화에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으니 세르니아 양이 집중할 만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오늘 들은 이야기는 인사 빼고 다 집중해서 들었는데. 약간 억울했으나 나는 그녀가 꺼낼 다음 말에 집중했다. 그녀가 여태껏 풀었던 이야기 중에 별거 아닌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기에.

“아리엘 양이 어제 저를 찾아왔답니다.”

“!”

설마 황후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은근슬쩍 아리엘에 대한 주제를 꺼내려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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