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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깨달았답니다. 제가 이제까지 기다려왔던 때가 왔다는 것을요.”
붉은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나는 그녀를 마주 본 순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녀는 정말 전부 알고 있다는 것을.
“기다리던 때라니요?”
“세르니아 양에겐 특별히 말해드리죠. 제 계획의 마지막 열쇠니까요.”
무릎에 앉아있는 밤이를 꼭 끌어안았다. 난데없이 시작된 대화는 내가 그토록 바라던 것이었다. 한편으로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게 금제도 걸지 않은 상황에서 황후가 가면을 벗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에.
“저번에 했던 이야기를 이어서 할까요? 어디까지 했더라?”
어제 점심 메뉴를 떠올리는 것처럼 태연한 목소리였다. 내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황후는 가볍게 손뼉을 치며 내게 말했다.
“맞아, 제가 오라버니보다 브릴리언 왕국을 더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는데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까지 했었죠.”
“…….”
황후는 부드럽게 웃으며 홍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나의 침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복수하기로 했답니다.”
“누구에게요?”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생각했으나 너무 의외의 말을 들어서 나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 나갔다. 황후는 귀여운 딸을 보듯이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저를 무시한 브릴리언 왕국에요.”
그녀의 대답을 듣자 3초간 사고가 정지했다.
당연히 브릴리언 왕국과 내통해서 아슬란데 제국을 삼키려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뒤통수를 때리는 이야기였다. 너무 당황에서 입만 벙긋거렸다.
“처음에는 황제에게 베갯머리 송사라도 해서 브릴리언 왕국과 전쟁이라도 할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황제는 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빨리 포기했답니다. 그 후 끊임없이 고민했어요. 황후의 신분으로 브릴리언 왕국에 압력을 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황자를 낳아서 그 아이를 황제로 만들면 내 멋대로 휘두를 수 있지 않을까. 같은 것들이요.”
밤이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황후의 말은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으나 본래 목적은 어느 정도 이루었다. 이 정도면 수호의 심판을 사용할 수 있을 테니.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런데 헬리오스가 황제가 될 때까지 기다리려니 너무 오래 걸리겠더군요. 하루 빨리 멍청한 오리버니가 제게 무릎을 꿇고 벌벌 떠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짧게 잡아도 20년 이상, 거기다 헬리오스가 내 뜻대로 움직여준다는 보장도 없었죠. 그럴 거면 차라리 내가 직접 황제가 되자고 결심했어요!”
충격의 연속이었다. 전개와 발단 없이 절정만 이어지던 이야기는 그녀의 웃음과 함께 마무리됐다.
“드디어 제가 황제가 될 수 있는 순간이 왔어요.”
“반란을 일으킬 건가요?”
“후후, 그렇게 되겠네요. 사실 블레닌의 밤에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어요. 대부분의 귀족들이 황궁에 모여서 연회에 빠져 방심하고 있을 테니 잡기 쉬울 거라 생각했거든요.”
맞는 말이었다. 블레닌의 밤에 기습이 이루어진다면 큰 저항 없이 황궁이 황후의 손에 떨어질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계획을 바꾼 거지?
“검성과 그리 마음이 잘 맞을지 몰랐어요. 기습하는 날짜까지 같을 줄이야.”
“어떻게…….”
그녀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나도 오늘 들은 이야기였고,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물론 검성의 세력 사이에 아라네아가 숨어 있을 수도 있으나 황후는 마치 오늘 소식을 들은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내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자 그녀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었다.
“제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나요?”
“정보가 샜군요. 황후 폐하의 눈과 귀는 무수히 많으니까요.”
“어머, 놀랐으면서 내색하지 않는 점은 칭찬할 만하네요.”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 황후를 막기 위해 나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황후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걸까. 서서히 굳어가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당겼다.
“이왕 말씀하신 거 속 시원하게 다 말해주세요. 저는 특별하다면서요. 황후 폐하의 계획이 뭔지, 제가 왜 마지막 열쇠인지도 상세히 설명해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일부러 뻔뻔하게 굴었다. 진실을 들은 이상 무사히 살아나기도 틀린 것 같으니 끝을 봐야 했다. 가슴 한쪽에서 계속 불안감이 솟아났지만 그걸 떨치기 위해 밤이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왠지 시리우스가 옆에 있는 것처럼 든든했기에.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을 시리우스도 함께 보고 있겠지.
“당신의 그런 점도 꽤나 좋아한답니다. 맹하게 생겼으면서 감이 좋은 점이나 의외로 머리 회전이 빠른 점이요.”
“칭찬 감사드립니다. 제가 좀 그런 매력이 있죠. 그래서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할까요?”
“역시 쉽게 넘어가 주지 않네요. 좋아요. 어차피 세르니아 양에겐 다 말해줄 거였으니까요. 조금 긴 이야기에요.”
황후는 몰래 숨겨왔던 짝사랑을 고백하는 사춘기의 소녀처럼 생기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브릴리언 왕국에서 여자는 가문과 가문을 잇는 도구에 불과해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더라도 아무 쓸모가 없죠. 그저 아이를 잘 낳고, 남편의 취향에 맞게 아름다움을 유지하도록 교육받아요. 저 또한 마찬가지였답니다. 얌전해라. 정숙해라. 가만히 있어라. 유년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에요.”
어디에나 있을 법한 나라였고 그만큼 익숙한 이야기였다.
“어릴 때는 누구나 부모의 칭찬에 목말라 있잖아요? 저는 오라버니보다 똑똑하면 칭찬해줄 거라 믿었어요. 한번 보면 열을 아는 저와 달리 오라버니는 게으르고 멍청했거든요. 연회에서 제 대단함을 뽐내기 위해 오라버니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였어요. 그러나 돌아온 건 망신이었답니다. 기가 센 여자는 남자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며 왕국에 있을 때는 마법을 사용하는 것조차 금지당했어요. 오라버니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선 안 되기 때문에.”
시종일관 싱긋거리던 황후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옆에 있던 수잔이 그녀에게 부채를 건넸고, 나비의 날갯짓처럼 팔랑팔랑 부채를 부치던 그녀는 섬뜩하게 웃었다.
“똑똑한 머리와 뛰어난 마법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자랄수록 고립됐습니다. 여자 귀족들은 저와 친하다는 소문이 나면 결혼에 지장 간다고 피했고, 남자 귀족들은 신분도 머리도 능력도 뛰어난 여자를 아내로 들이기 부담스럽다며 피했죠. 부모는 결혼도 못 하는 저를 골칫덩어리라며 핀잔을 주다가 결국 제국으로 팔아넘겼어요.”
“마법에 재능이 있었으니 왕국을 나와서 마탑으로 가면 안 됐나요?”
“걱정해주는 건가요?”
걱정하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 가슴에서 천불이 났기에 무심코 나온 말이었다. 부채로 입을 가린 황후는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고작 열일곱이었어요. 제 세상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왕궁이 전부였죠. 혼자서 왕궁을 나간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시기였어요. 아슬란데 제국에 와서야 저를 가두고 있던 틀이 깨졌어요. 이곳에선 여자도 기사가 될 수 있고, 작위도 물려받을 수 있으니까요.”
아이러니했다. 처음으로 자유를 느낀 그녀가 한 선택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가 되는 것이라니.
“그런데 여기서도 저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봤어요. 능력이 있더라도 첫째가 아니라서, 직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가문을 이을 수 없는 귀족들. 그들을 보자 어린 시절의 제 모습과 겹쳐 보이더군요. 브릴리언 왕국을 역사에서 지우고 싶다는 저의 개인적인 소망과 별개로 그들에게도 희망을 주고 싶었어요.”
순식간에 웃음을 지우고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사연 없는 악역은 없다는 건가.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대로 계속 듣고만 있어선 안 됐다. 나중에 수호의 심판을 쓰기 위해 이 영상을 증거로 제출했을 때 황후의 의견에 동조하는 귀족이 생길지도 몰랐기에 나는 그녀의 의견에 반박했다.
“아슬란데 제국은 기본적으로 첫째가 가문을 잇지만 더 뛰어난 자질을 가진 아이가 있을 경우 둘째나 셋째가 가문을 세습하기도 합니다.”
“그건 굉장히 드문 일이죠. 첫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 않은 이상은 일어날 수 없죠. 권력이란 건 가질수록 놓기 싫어지거든요.”
황후와 거래를 한 귀족들이 대부분 차남이나 방계혈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번 티타임 때 내게 했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똑같이 말했겠지. 그들의 콤플렉스를 자극하고 동질감을 유발해서 공감을 이끌어 낸 황후는 자신이 황제가 된다면 그들에게도 권력을 나눠줄 거라며 달콤한 미래를 속삭였을 것이다.
“저는 직접 적폐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황후는 마치 혁명가처럼 말했다. 사회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스스로 총대를 짊어지고 일어섰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니 나조차 마음이 흔들릴 정도였다.
‘오히려 나야말로 지독히 이기적인 이유로 평화를 지키려 한 건 아닐까.’
나는 복잡하게 얽힌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생각이 틀렸다고 부정하고 싶진 않았다. 다만 방법이 너무 극단적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죄 없는 평민들을 소모품처럼 사용한 건가요. 그들 중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갖춘 자들이 있다면 신분에 상관없이 등용해야 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그들을 버리는 말로 이용했죠.”
“아라네아 말인가요? 맞아요. 그들은 황궁에 묶여있는 저를 대신해 움직여 줄 말이에요. 제가 어째서 평민까지 신경 써야 하죠?”
그녀의 역질문에 내 말문이 막혔다.
나는 착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꿈꾸는 계몽은 평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권력에서 밀려난 자가 권력을 가지기 위한 행동이었다.
“황후 폐하가 기다리고 계시니 지금 가셔야 합니다.”
수잔에게 한소리 하려고 했으나 그녀가 내 말을 끊었다. 이대로 도망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녀의 힘은 생각보다 셌기에. 밤이를 안고 있는 상태에서 그녀의 손을 쳐내는 것도 힘들었다. 내가 가겠다고 하기 전까지 어깨를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알겠어. 갈 테니까 일단 손부터 놔.”
“가시지요.”
손을 놓은 수잔은 내 뒤로 왔다. 혹시라도 도망간다면 다시 잡겠다는 의지가 넘쳤다. 꽤나 대단한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나 보다. 쉽게 보내 줄 생각이 없는 걸 보니. 나는 아랫입술을 질끈 씹었다.
‘예상했잖아. 괜찮아. 마음의 준비는 했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가슴속에서 울렁거리는 불안감을 애써 털어냈다.
발걸음을 돌리기도 이미 늦었다.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들었으니 결과를 남기는 일만 남았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감미로운 미성이 들렸다.
계절에 맞지 않는 모란이 활짝 핀 정원이었다. 아름답지만 이질적인 장소 한 중앙에 황후가 앉아있었다. 그녀는 건국제에 봤던 것보다 훨씬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금색의 드레스에 은사로 장미 문양을 수놓았다. 그리고 제국 문양이 커다랗게 들어간 망토마저 걸치고 있었다. 가벼운 티타임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이었다.
“제국의 보배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내가 밤이를 안은 채 무릎을 굽혀 인사하자 맑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네. 두 번째 만남은 제대로 준비를 해서 초대하려고 했습니다만 이번에도 무례한 초대를 해버렸네요. 마음이 넓은 세르니아 양이라면 이해해주리라 믿어요.”
그녀의 말이 내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두 번째 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말도 중요했지만 뒤에 붙인 말도 거슬렸다. 나를 전부 파악했다는 어조로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대화를 한 건 고작 한 번. 성격을 알기엔 짧은 시간이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자 자연스럽게 얼굴이 굳어졌다.
“아닙니다. 황후 폐하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그러나 복잡한 심경을 드러낼 수 없었기에 예의 바른 미소를 띠며 고개를 숙였다. 황후는 싱그러운 웃음을 머금고 내게 자리를 권했다.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하는 세르니아 양을 위해 특별한 걸 준비했어요. 급하게 준비한다고 조금 부족할 수도 있지만 마음이 넓은 세르니아 양이라면 이것도 이해해 주겠죠?”
역시 뒤에 붙인 말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똑같은 말을 두 번이나 해서 강조했으니. 나는 ‘마음이 넓다’는 말에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해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겉으로는 웃으며 황후의 눈을 마주 보자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기이하게 일렁거렸다.
“세르니아 양은 정말 신기해요. 많은 귀족을 봤지만 세르니아 양은 그중 제 호기심을 가장 자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거지?
급작스러운 초대도, 나를 위해 특별히 준비했다는 디저트도 의심스러웠으나 지금 황후가 한 말이 제일 이상했다. 내가 그녀를 자극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녀와 접점은 극히 적었다. 얼굴을 본 것도 이번이 겨우 세 번째.
“능력은 보잘것없는데 어째서 자꾸 나를 방해하는 걸까, 당신에게 주어진 정보는 아무것도 없을 텐데 어째서 내 정보를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할까. 계속……. 계속 고민했답니다.”
나긋한 목소리로 안부를 묻듯 조곤조곤 이야기했으나 황후가 뱉은 말은 나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마치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