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118화 (118/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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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상 내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거지 엄밀히 말하면 조금 달라. 사람이 태어나기 위해 신이 육체를 만들고 영혼을 집어넣지. 그때 육체와 영혼을 이어주는 신의 힘이 있는데 그게 영혼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거야. 육체가 없는 정령이 소환자와 계약을 맺고 그 신의 힘을 나눠 받는 것, 그게 정령과의 계약의 본질이지.”

정령 소환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는 데이지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녀의 말은 너무 추상적이고 철학적이라서 내 나름대로 간단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의 힘을 실이라고 비유했을 때, 원래 한 명에 한 줄인데 나랑 너는 한 줄을 쪼개서 나눠 쓰고 있다는 뜻이야?”

“그래. 애초에 나의 존재가 사라졌는데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도 엘리사의 안배야. 한 명의 운명을 둘로 쪼개서 나는 육체 없이 정령과 같이 존재할 수 있도록 말이야. 표면상 너와 계약한 정령 정도로 보이겠지. 그래서 나는 음식을 섭취할 필요도 수면을 취할 필요도 없어. 인간이 아니니까. 네 체력이 유독 약했던 것도 나와 운명을 나눴기 때문이야.”

어쩐지 아무리 운동해도 체력이 안 늘어나더라. 나는 어이없었다. 강제로 신력마저 갈취당하고 있었다니.

“그리고 너는 내 운명을 쓰고 있기 때문에 흔적이 남아있는 거야.”

“흔적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양파도 아니고 까도 까도 계속 나와.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한 것이 이렇게 복잡한 상황이 얽혀 있을 줄이야. 머리에 과부하가 올 지경이었다.

“시간은 소멸했지만 나와 관련된 사람들은 너에게 기묘한 기시감을 느낄 거야. 네가 등장인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네게 쉽게 호감을 준 이유. 그건 처음에 나와 있었던 감정의 흔적이 남았기 때문이겠지. 솔직히 저주 때문에 감정이 없을 시리우스가 너에게 그렇게 빨리 반응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어.”

“잠깐, 그럼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날 좋아해 주는 이유가 너 때문이라는 거야?”

“따지자면 그런 느낌이지.”

“시간은 소멸했다며 그런데 어떻게 흔적이 남아있어?”

“네가 했던 비유를 빌려서, 한 사람에게 배당된 신력을 실이라고 했을 때 시간이 소멸하면 연결됐던 실은 가위로 잘리겠지. 원래 있던 실은 잘려 나가겠지만 완전히 소멸한 것이 아니라 잘린 단면이 남는다는 거야.”

나는 데이지의 설명을 단번에 이해했다. 그 점이 가끔 걸리기도 했으니까. 나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다. 대체로 데이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내게도 잘해줬고, 데이지를 싫어했던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나를 꺼림칙하게 여겼다. 다만 거기서 벗어난 사람이 둘 있었다. 아리엘과 카나린.

“그렇지만 아리엘은…….”

“아리엘이 내게 가지고 있던 감정은 질투에 가까운 동경이었겠지.”

시리우스가 내게 끌린 것도 데이지의 감정 때문일까. 나는 혼란스러웠다. 불안감도 그것에 대한 경고였을까. 시리우스의 감정은 내게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경고. 머리도 마음도 뒤죽박죽이었다. 그러나 데이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일부러 너에게는 안 보여 줬지만 사실 나는 황궁에서 나와 가장 먼저 루테론 자작가로 갔었어. 내가 여기 있으면 원래 내가 있어야 했던 곳은 어떻게 됐을까 궁금했거든. 그리고 더 이상 내가 있을 곳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됐지. 나 대신 다른 사람이 있었으니까.”

“아…….”

데이지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예전에 조사한 셀라나를 떠올렸다. 원래 세르니아였던,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그녀는 지금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했다.

“조금 절망했어. 이 세계에는 아무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때 너를 만난 거야. 아카데미 앞에 있는 단골 가게에서 너를 처음 봤을 때는 그저 기억에 없던 새로운 사람의 등장 때문에 뚫어져라 봤었어. 아리엘과 에리얼이 그렇게 순수하게 웃는 것도 처음 봐서 신기했지만.”

데이지가 작게 웃었다.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음식점에서 데이지를 처음 본 그날을. 눈이 마주친 순간 데이지 같다고 생각했는데 정답이었네.

“나는 너를 모르는데 너는 나를 알고 있었지. 그래서 기억을 잃은 척하고 너의 곁에서 지낸 거야.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그래도 2년은 너무 길지 않아? 조금만 빨리 눈치를 줬다면 좀 더 완벽하게 황후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데이지의 탓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기억에선 완결 후에 반란을 일으켰었다. 원래 일어나야 할 시기보다 일찍 일어날 거라곤 그녀도 예상 못 했을 테니.

“네게 민폐를 끼쳤다고 생각해. 미리 알려주지 못한 점이나 의사도 묻지 않고 휘말리게 만든 것은. 그래도 지금은 엘리사의 안배가 다행이라고 생각해. 엘리사가 무리해서 나를 이곳에 남겨둔 건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내 눈으로 확인하라는 뜻이었겠지. 그 덕분에 너는 다시 살 수 있어.”

“뭐? 나는 죽었는데.”

“맞아. 그런데 시리우스가 너의 육체를 살렸어. 신력은 사라져서 네 영혼은 떨어졌지만 내가 나눠 받은 신력은 아직 남아있으니까 이걸로 너의 영혼을 육체에 묶을 수 있어.”

“그럼 너는?”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뿐.”

“원래…… 원래 너의 자리잖아.”

“내가 선택한 일이야.”

“결국 데이지 네가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겠다는 거야?”

데이지는 모두의 행복을 바랐으나 그곳에 그녀가 있을 자리는 없었다. 왠지 억울했다. 자신을 희생해서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란다는 것은 가볍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와 모든 것을 공유했기 때문일까.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에.

“자, 길고 긴 이야기는 여기서 끝. 이제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

내가 그녀를 잡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확실히 나는 의도치 않게 데이지의 일에 휘말렸다. 전생에 죽은 건 우연이었으나 환생한 것은 엘리사가 내 영혼을 옮겼기 때문이니. 이유도 모른 채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왔다. 나는 데이지를 바라봤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평온했다.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다.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처럼.

“데이지…….”

그녀의 몸이 점점 투명해졌다. 내가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데이지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작게 속삭였다.

“네가 내 이름을 불러줬을 때 진심으로 기뻤어.”

***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오른쪽 손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으나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사람을 봤다.

“아리.”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리엘은 내 손을 잡은 채 침대에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나를 간호하다가 잠시 잠든 것이겠지.

“음……. 언니?”

“일어났어?”

얕게 잠들어 있었는지 내가 몸을 일으키자 아리엘이 몽롱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를 껴안았다.

“언니! 괜찮아요? 진짜……. 진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잠시만요. 의원을 불러올게요.”

너무 놀라서 횡설수설하며 말을 이어가는 아리엘의 등을 토닥여줬다. 걱정 많이 했겠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리엘이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안심하고 있었다. 눈물을 가라앉히고 진정된 아리엘이 당장 의원을 부르러 간다는 그녀를 말렸다.

“언니, 정말 괜찮아요?”

“응. 기운이 없는 거 말고는 멀쩡해.”

“한 달이나 누워 있었으니 기운이 없을 만도 하죠. 일단 묽은 수프라도 준비해서 올게요.”

한 달? 한 달이라고? 데이지와 나눈 대화가 길긴 했으나 그 정도나 걸렸을 줄이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아리엘을 황급히 잡으며 반란은 어떻게 됐는지 물었다.

“황후는 죽었어요. 수도에 있는 아라네아는 루카리온 님이 소탕하셨고, 제국에 퍼져있는 아라네아들도 수색 중이에요. 황태자님이 아라네아의 거점을 이동하는 주기나 정해진 거점지 등을 꽤나 예전부터 조사했다고 하더군요.”

그건 아마 데이지가 남긴 자료겠지. 나는 아리엘의 말을 경청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을 멈춘 아리엘은 호흡을 고르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더라도 반란자가 있는 가문은 전부 사형당해야 하나 이번의 경우 그 숫자가 너무 많고, 대부분 귀족 가문들의 차남이나 막내가 끼어있었기 때문에 금제에 걸린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면죄를 받았어요.”

원래대로 구족을 멸문시켰다면 변방에 있는 귀족들 빼고 전부 죽을 테니 나름 선처를 한 것이리라. 그녀도 금제에 걸렸었다. 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리엘을 바라보자 그녀는 한층 깊어진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아버님께서 강제로 금제에 걸리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몰랐던 귀족들은 사면해야 한다고 주장해주셨거든요. 진실의 맹세를 통해 확인해서 저 말고도 몇 더 있어요.”

“그랬구나. 다행이다.”

“언니…… 는 묻지 않는 건가요?”

잠시 머뭇거리던 아리엘은 내 눈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정말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약간 창백해진 아리엘이 말했다.

“제가 어째서 황후의 금제에 걸렸는지…… 무슨 거래를 했는지 같은 것들이요.”

그녀의 하얀 손이 가녀리게 떨리고 있었다.

대충 황후에게 들었기 때문에 묻지 않은 거였는데. 나는 오랜만에 아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릴 때는 자주 쓰다듬었던 것 같은데.

“나를 위해서였겠지.”

“언니…….”

그녀의 눈동자에 다시 물기가 차올랐다. 아리엘은 내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고해성사하듯이.

“사실 예전에 언니가 카나린에게 했던 말이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나와 카나린의 대화라니 또 뭐가 있었나. 머릿속으로 카나린과 했던 대화들을 차근차근 되짚고 있자 아리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피가 이어져 있어도 가족의 관계를 끊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언니도 제게 질려서 가족 관계를 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솟아났어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카나린에게 용기를 주려고 한 말에 아리엘이 상처받았을 줄이야.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저는 계속 어리광만 부려왔는걸요. 언니가 질려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

“아니야. 아리엘은 내 소중한 사촌인걸. 너랑 있는 게 즐거운데 질릴 리가 없지. 그리고 아리가 어리광 부리는 거 좋아하니까 더 해줘!”

“역시 언니는 대단해요. 그런 언니를 언제나 동경해왔어요. 하지만 더 이상 의지하고 싶지 않아요. 저도 언니가 기댈 수 있도록 강해질 거예요.”

불안감을 떨쳐낸 아리엘은 내 손을 꼭 잡고 다짐했다. 아마 아리엘은 더 강해질 것이다. 했던 말은 반드시 지키는 아이였으니. 나는 그녀의 결심을 듣고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론 심란했다. 동경이라. 데이지가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아서.

“언니?”

내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자 아리엘이 의문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지금도 충분히 의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안 믿을 거지? 나는 정말로 아리를 믿고 있으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고.”

“네!”

아리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복잡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과장되게 웃으며 아리엘의 볼을 꼬집었다. 아리엘의 고민이 사라진다면 이걸로 된 걸까.

“아리, 나머지는 내일 이야기해도 될까? 입맛도 없고 지금은 쉬고 싶어서.”

“알겠어요. 푹 쉬세요.”

아리엘은 순순히 돌아갔다.

그녀도 피곤한 것이겠지. 한 달간 심란한 마음으로 내 곁에서 간호했을 테니. 마음이 뒤숭숭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직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으나 침대에 누워있고 싶진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이 계속 나를 괴롭혔기에.

“세르니아 님.”

그때 지금 제일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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