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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리자 시리우스가 물기를 머금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시리우스가 내가 깨어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고민했으나 감각을 연결했던 밤이가 떠올라 금방 납득했다.
사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데이지가 던진 폭탄 발언들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뒤엉켰기에. 내가 말없이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 시리우스는 울음을 억누르듯 미간을 찌푸리며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나를 끌어안았다. 세게 쥐면 부서지는 유리 조각을 다루듯.
“세르니아 님.”
내 이름. 특별할 것 없는 이름이었다. 많은 사람이 나를 세르니아라고 불렀고, 그렇게 불리는 것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시리우스가 부르면 특별하게 느껴지는 걸까.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를 때면 맥박이 가파르게 치솟았다. 어떠한 미사여구도 붙지 않은 한 단어일 뿐인데.
“깨어나서 다행입니다.”
귓가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렸다.
나를 감싼 그의 팔에서도 비슷한 떨림이 느껴졌다.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시리우스를 버릇처럼 안으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내가 이렇게 사랑받아도 괜찮은 걸까.’
저주받아서 감정을 못 느껴야 했던 시리우스가 첫 만남부터 나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 데이지를 사랑했던 감정의 파편 때문이었다. 데이지를 동경했던 아리엘이 나를 동경하는 것처럼. 별거 아닌 만남에도 호감을 느낀 벨라나 그렌드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호의는 데이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
순식간에 모든 관계들이 거짓처럼 느껴졌다. 걷고 있던 땅이 갑자기 무너지는 느낌. 나는 공중에 멈춘 손으로 시리우스를 살며시 밀어냈다. 그의 온기가 내게 전해질수록 내 마음이 무거워져서. 그는 내 힘없는 손길에도 얌전히 떨어졌다.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는 여전히 내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너무 기뻐서 저도 모르게 행동이 먼저 나갔습니다. 죄송합니다.”
왜 네가 사과하는 거야.
혀끝을 맴돌던 문장은 입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시리우스가 사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도 휘말렸다는 것을. 누구도 나쁜 사람은 없었다. 그저 미래를 바꾸기 위해 데이지는 행동했고, 나비효과처럼 내가 원치 않았던 데이지의 운명을 이어받은 것뿐. 그럼에도 나는 그를 똑바로 마주 볼 수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려는 머리와 달리 술렁거리는 마음 때문에.
‘하지만 시리우스는 모르는…… 아니 시리우스에겐 없던 일이지.’
오직 나만이 소멸한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젠 없어져 버린 과거. 시리우스가 데이지를 사랑한 순간마저 사라졌다. 그러니 나만 입 다물면 아무도 진실을 알지 못한다. 시리우스의 감정이 원래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데이지를 향한 것이었다는 것은 모를 것이다. 물론 데이지에 관한 일을 누군가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믿어주지도 않을뿐더러 모든 게 해결된 상황에서 괜한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이지는 소중한 사람들이 그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자신 때문에 슬퍼하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망설이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시리우스의 감정이 거짓일까 봐.
“세르니아 님, 얼굴빛이 좋지 않습니다. 침대에 누워서 더 쉬십시오.”
기만하게 내 감정을 읽어낸 시리우스는 걱정 어린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뭐라 대답을 해야 하나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말을 꺼내려다가 시리우스를 마주보기 힘겨워 결국 몸을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제가 기분 상하게 했나요?”
어두운 방 안, 달빛을 받은 그의 얼굴이 유리창에 비쳤다. 시리우스는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으나 나는 말 없이 고개만 저었다. 시리우스의 잘못이 아니었다. 내가 문제였다.
“어째서 저를 피하시는 겁니까. 더 이상 저를…… 피하지 않기로 약속하셨잖습니까.”
상처받았겠지. 나는 그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을 어렴풋이 읽어냈다.
피하지 않겠다고 했던 약속은 기억하고 있다. 기다려 달라고 했던 것도. 그러나 지금은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데이지에 관한 것을 덮어두고 평소처럼 대할 수 없어서. 가슴이 지끈거렸다.
‘내가 이렇게도 가슴이 아픈 것은. 시리우스를 사랑하기 때문이겠지.’
나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눈을 감았다.
너무 사랑해서 눈물이 나왔기에. 애써 외면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를 사랑한다. 흘러넘친 감정은 나도 감당 못 할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시리우스의 사랑이 내가 아니라 사라진 데이지를 향한 것이라 생각하자 놀랄 만큼 유치한 감정이 솟아났다.
‘치졸해.’
너무 한심했다. 데이지를 질투하고 있는 내가. 데이지는 사랑하는 헬리오스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미래를 바꿨는데 나는 시리우스의 사랑 때문에 데이지를 질투하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차라리 진실을 몰랐을 때가 좋았다고 생각하는 내가 너무 한심했다.
“어째서 그렇게 괴로운 표정을 짓고 계시는 겁니까.”
상념에 잠겨있던 나는 시리우스의 말에 놀라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확인했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얼굴은 이상하게 일그러져있었다. 처음 보는 생소한 표정이 낯설었다. 내가 아닌 것처럼. 나는 표정을 풀기 위해 뺨을 문질렀다. 그러다 나를 보고 있는 시리우가 눈에 들어왔다. 그도 나를 보고 있었다. 유리창을 통해. 숨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방 안에서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보지 마.”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시선을 먼저 피한 사람은 나였다. 마주 본 그의 눈이 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기에. 꽉 닫힌 입에서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날이 서 있었다. 아니었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런 말이 아니었다.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바닥만 보고 있었는데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시리우스의 숨결이 머리 위에서 닿았다. 가까워진 거리만큼 몸도 밀착됐다. 얇은 잠옷만 입고 있었기에 온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쿵쾅대는 심장과 달리 복잡한 머릿속은 그를 거부했다.
“왜 혼자 아파하시는 겁니까. 아직 저를 의지하실 순 없는 건가요.”
아련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나는 다가온 시리우스가 나를 건드릴 거라고 생각했기에 조금 떨었지만 그의 손은 나를 지나서 창문을 열었다.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창문을 통해 불어온 바람은 약간 서늘했으나 향긋한 라일락 향을 품고 있었다. 의식을 잃기 전에는 겨울의 냉기가 가시지 않았었는데 이제 완연한 봄이었다.
“아주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이야기해주세요. 조금이라도 세르니아 님의 고민에 힘이 되고 싶습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엔 진심이 묻어났다.
정말 반칙이다. 그렇게 말하면 자꾸 의지하고 싶어지잖아. 이미 흔들리고 있는 마음의 호수에 돌멩이를 던져 더 큰 파도를 만드는 말이었다. 머뭇거리던 나는 어렵게 말문을 텄다.
“만약……. 만약 네가 가지고 있는 감정이 우연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거라면 어떨 거 같아?”
마음속에 덮어두려던 질문.
데이지가 의도적으로 조작한 건 아니었으나 어쨌든 그녀의 영향으로 인해 시리우스가 나에게 끌린 것은 맞았으니까. 확인하고 싶었다. 시리우스가 어떻게 생각할지. 다만 무서워서, 모든 진실을 알았을 때 혹시나 그가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할까 봐 무서워서 ‘만약’이라는 가정을 붙였다.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 자체가 무덤을 파는 일이었으나 지금은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 상념들과 마음을 좀먹는 불안 때문에. 나는 숨죽이고 시리우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
“이상한 질문 해서 미안. 별거 아니고 그냥…… 생각하다 보니 우리 첫 만남이 떠올라서. 그때 너는 감정을 봉인 당했는데 첫 만남 때부터 내게 흥미를 가졌잖아. 문득 이상하다고 느껴져서…….”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나는 얼버무리며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마땅한 주제가 떠오르지 않아 횡설수설하며 변명을 이어가자 시리우스가 내 말을 끊고 들어왔다.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잠시 고민했습니다. 세르니아 님을 불안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대답하기 전에 저도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시리우스는 내 표정을 보고 있지 않으면서도 내 감정을 쉽게 읽어냈다. 정곡을 찌르는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어떤 대답을 하던 세르니아 님은 제 대답을 믿을 겁니까?”
“……응. 믿을게.”
긴장해서 차가워진 손끝을 꼭 쥐었다. 그가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무난한 반응을 할 수 있도록 심호흡을 하며.
“그리고 한 가지 더, 하고 싶은 부탁이 있습니다.”
“뭔데?”
“세르니아 님의 얼굴을 보고 대답해도 괜찮을까요.”
그의 부탁에 나는 바로 몸을 돌리지 못했다. 그를 보고 싶으면서도 보기 싫은 상반된 감정 때문에. 그의 대답을 듣고 표정 관리 할 자신이 없어서 얼굴을 보는 것이 무서운 한편, 시리우스가 어떤 표정으로 내게 말하는지 궁금했다. 내가 주저하자 그는 재차 부탁했다.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시리우스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깊은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풀어야 할 문제다. 시리우스가 어떤 대답을 하던 마지막까지 내 눈으로 마주하자. 결심을 마친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바닥을 보고 있던 시선을 서서히 올리자 흔들림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분홍색 눈동자에 닿았다.
“드디어 저를 봐주시는군요.”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시리우스의 얼굴에 만개한 꽃송이 같은 웃음이 피어났다. 시선을 사로잡는 그의 미모에 넋을 놓고 멍하니 바라보자 그는 옅은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
“저는 세르니아 님이 어떤 의도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만약 그런 존재가 정말 있다면 저는 그 존재에게 감사해야겠지요. 당신과 만날 수 있도록 해줬으니까요.”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보던 나는 한 박자 늦게 말을 이해했다. 감사라니. 예상치도 못한 답이었다.
“하, 하지만 자신의 감정이 누군가에 의해…….”
“끝까지 들어주세요. 확실히 첫 만남에서 묘한 끌림 때문에 세르니아 님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당신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묘한 끌림이 아니라 긴 시간 동안 제가 직접 겪으며 알게 된 세르니아 님을 사랑하게 됐습니다.”
시리우스는 단호했다.
올곧은 눈동자에는 조금에 거짓도 섞여 있지 않았다. 오롯이 나를 담고 있는 분홍색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저주에 걸린 저를 편견 없이 대해 주신 점이나 제 저주를 풀기 위해 노력해준 모습을 좋아합니다. 제가 막무가내로 들이대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휩쓸리는 부분이나 제 얼굴에 약해지는 것도 좋아합니다. 저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이해하려는 세르니아 님을 사랑합니다. 우연이 아닌 첫 만남이었을지라도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건 어디까지나 제 의지가 맞습니다.”
시리우스의 대답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데이지의 감정의 파편이 남았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첫인상에서 조금 좋은 느낌을 준 정도가 아닐까. 데이지를 가장 사랑했던 헬리오스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데이지와 전혀 상관없던 공작과 공작부인도 나를 아껴줬고 데이지를 싫어했던 카나린과는 친구가 됐다. 천천히 생각해보면 깨달을 수 있었을 텐데. 데이지의 그림자가 너무 커서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시리우스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너무 컸어.’
아리엘이 데이지를 동경했기 때문에 나를 동경한다고 했을 때는 이렇게 불안해하지 않았었다. 그녀와 대화할 때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나 시리우스는 달랐다. 그랬기에 계속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그의 감정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유치하고 바보 같지만 사랑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시리우스…….”
쥐어 짜낸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솜사탕처럼 달콤해 보이는 분홍색 눈동자는 처음 만난 날처럼 나만 바라봤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니 할 말은 하나였다.
“나는…… 나는 널 사랑해.”
몇 번이고 전하려고 했으나 용기가 없어서 닿지 못했던 내 솔직한 감정. 그토록 전하고 싶었던 마음이 겨우 입 밖으로 나가 형태를 드러냈다.
“저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내 뺨을 감쌌다. 시리우스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고 나는 눈을 감고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의 입술은 꿀보다 달콤하고 꽃보다 매혹적이었다. 벌어진 입술을 비집고 들어온 혀는 술보다 아찔했다. 짧은 키스는 메마른 입술을 적시는 단비 같았다.
“기다려줘서 고마워.”
몇 번이고 나눴던 키스였으나 오랜만이라 그런지 부끄러워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숨을 곳이 없었기에 그의 가슴에 기대며 작게 속삭였다. 시리우스는 내 정수리에 가벼운 버드키스를 하며 말했다.
“저를 사랑해줘서 감사합니다.”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던 머릿속이 시리우스의 고백 하나로 전부 정리됐다.
애초에 나의 불안은 시리우스에게서 비롯된 것이었으니 그의 감정이 변함없다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의 한결같은 사랑은 내게 믿음을 줬기에. 어쩌면 내가 물속에 빠진 순간부터 시리우스를 사랑하게 될 예정이었던 것은 아닐까.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만약 물에 빠졌을 때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구했더라도 너는 나를 좋아했을까. 하는 생각?”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의미가 없는 생각입니다.”
“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세르니아 님을 구하는 사람은 저니까요.”
내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냐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희미한 집착이 담긴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예쁘게 접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언제나 당신을 지켜보고 있으니까.”
나는 그의 뻔뻔한 대답에 웃음을 터트렸다. 맑은 웃음소리가 방안에 퍼지자 시리우스도 따라 웃었다. 웃음이 잦아들고 다시 입술을 겹쳤다. 서로의 호흡을 탐하는 입맞춤은 조금 진득해졌고, 맞잡은 손에서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쿵쾅거리는 심장은 비슷한 박자로 뛰었다.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분명 다른 속도로 나아가던 감정은 사랑이란 단어 아래 같은 속도가 되어 서로를 물들였다.
사랑이란 참으로 신기한 감정이다.
자신을 희생할 정도로 헌신적으로 만들 수도 있고, 상대방을 파괴할 정도로 광기에 물들 수도 있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감정이다. 거기다 사랑이라 뭉뚱그려 말하지만 각자 모두 다른 형태의 사랑을 가지고 있다. 가족의 사랑, 친구의 사랑, 연인의 사랑. 그 외에도 수많은 형태의 사랑이 존재한다.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 갈 사랑도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형태이리라.
-에필로그-
내가 소설 속 세계에 환생했다고 믿고 있을 때 이야기의 완결 시점이 되면 세계가 어떻게 될지 궁금했었다. 소설이 끝나면 세계도 끝나는 걸까 하는 고민. 의미 없는 고민이었다. 이곳은 소설 속이 아니었고, 이야기가 끝났다고 해서 세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으니.
‘거기다 원작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됐지.’
나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시녀들 사이에서 멀뚱히 앉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지나간 추억들을 회상하고 있었다.
“언니, 카나가 왔어요.”
심플한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아리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함께 들어온 카나린과 아리엘을 반겼다. 사이가 안 좋았던 둘은 내가 의식을 잃은 사이 서로 애칭을 부를 정도로 친해졌다고 한다. 사실 아리엘이 일방적으로 카나린을 싫어했던 것이었는데 그녀가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고 먼저 사과했다고 들었다.
“일찍 왔네요. 아직 식이 시작하려면 좀 남았는데…….”
“오늘처럼 중요한 날 늦을 순 없잖아요!”
내가 보낸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카나린이 양손을 불끈 쥐며 말했다. 작은 햄스터 같은 카나린을 보며 엄마 미소를 지었다.
“요즘 일은 괜찮아요?”
“그럼요! 벌써 1년 차인걸요.”
제이페인가에서 나와 아카데미에서 지내던 카나린은 원장님의 권유로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라 방황하기도 했으나 일단 뭐든 경험해보는 것이 좋다는 나의 조언을 듣고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배워나가고 있었다.
“아리는 좀 어때요? 외교부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평범해요. 부서의 막내라서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고, 심부름이나 하고 있죠.”
카일렌 후작을 동경하던 아리엘은 결국 외교부에 들어갔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가문의 권력을 빌리지 않고 공평하게 시험을 치르고 합격했다.
“아가씨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제 움직여도 되는 거야?”
“네. 입장 전에 베일만 착용하시면 됩니다.”
치장을 끝낸 마리가 베일을 보여주며 말했다. 거의 3시간 동안 망부석마냥 앉아 있었더니 몸이 너무 뻐근해서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와! 니아 진짜 예뻐요.”
“언니는 언제나 예뻤어요.”
“그렇지만 오늘은 제가 봤던 니아 중에서 제일 예쁜걸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으니 천사 같아요.”
나는 카나린의 과한 칭찬에 쑥스러웠으나 기분은 좋았다.
하얀 드레스는 내가 여태껏 입었던 드레스 중에서 가장 화려한 드레스였다. 섬세하고 화려한 레이스가 몸을 감쌌고, 치마에는 작은 다이아몬드가 달려있었다. 마치 햇빛을 받아 빛나는 물방울처럼 반짝거렸다. 드레스부터 부케까지 함께 고른 아리엘은 할 말이 많았는지 쉬지 않고 내 결혼식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랬다. 오늘은 내 결혼식이었다.
똑똑똑.
한참을 이어가던 그녀들의 수다를 끊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그렌드윈과 벨라였다.
“언니! 결혼 축하드려요!”
“축하드립니다.”
그렌드윈은 반란이 일어났을 때 황제 폐하의 안전을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원작보다 빠르게 승진했다. 기사단장이 된 그는 한층 성숙해졌다.
“둘 다 바쁠 텐데 와줘서 고마워!”
“아무리 바빠도 언니의 결혼식에 빠질 순 없죠.”
해맑게 웃고 있는 벨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벨라는 현재 기사단장을 맡은 그렌드윈을 대신해서 카일렌 후작가를 관리하고 있었다.
“헬리오스 님은 오시려고 했으나 갑자기 남부 국경선이 공격받아서 새벽에 내려가셨습니다.”
헬리오스는 아직 정식으로 황제가 된 것은 아니었으나 반란 이후 건강이 약해진 황제를 대신해서 모든 일을 떠맡고 있었다. 장난으로 가장 일에 치여 사는 사람을 투표하면 헬리오스가 압도적인 득표수를 차지하겠지. 그는 반란 수습을 전부 끝낸 후 나를 찾아왔었다. 수호자의 안부를 묻기 위해.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수호자는 제국을 지키기 위해 희생했다고 전했다. 그녀의 본명도 함께 밝혔다. 데이지에 관해서는 헬리오스도 기억하고 있기를 바랐기에.
“누님!”
상념에 잠긴 나는 복도 끝에서부터 다급하게 들려오는 발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이 열리더니 에리얼이 들어왔다. 멀리서부터 뛰어왔는지 원래 잘 정돈되어있었을 머리카락들이 바람에 날려 헝클어져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아리엘은 짧게 혀를 차며 그의 머리를 정리했다.
“누님…… 다시 생각해도 이 결혼은 반대입니다. 시리우스 같은 녀석에게 절대 누님을 줄 수 없습니다.”
친구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은 에리얼은 다짜고짜 결혼을 반대했고, 지켜보던 아리엘이 날 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너 아직도 그 소리야? 아버지도 허락하셨는데 네가 왜 자꾸 반대해?”
“시리우스에게 누님은 너무 과분하니까!”
“언니가 좋다고 하셨으니 그만 포기해. 결혼식 당일까지 그런 소리 할 거면 그냥 돌아가.”
아리엘은 울상을 지으며 항변하는 에리얼을 격하게 타박했다.
입술을 삐죽이는 에리얼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었다. 한동안 영지에 머물며 영지를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배우고 있었는데 오늘 내 결혼식에 맞춰 올라온 것이다. 오랜만에 아리엘과 에리얼이 티격태격했고 나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예전에 자주 보던 그리운 장면이었다.
‘이제 정말 다 컸구나.’
마음으로 키워온 자식 같은 사촌이었다.
그들이 어엿하게 자란 모습을 보고 있으니 흐뭇할 수밖에! 옆에 있는 사람들은 쌍둥이의 싸움이 익숙해서 신경 쓰지 않고 서로 안부 인사를 했다. 그러다 카나린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니아, 부케는 누가 받기로 했나요?”
“저죠.”
질문은 나에게 했으나 대답은 에리얼과 싸우던 아리엘에게서 들려왔다. 그녀는 당연한 소리를 왜 하냐는 눈으로 카나린을 보며 대답했다. 벨라는 자기가 받고 싶었으나 카드게임에서 졌다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했고, 카나린은 그 자리에 어째서 자신은 부르지 않았냐며 볼을 부풀리고 말했다. 그녀들은 내 손에 들린 부케를 보며 한참이나 더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어갔다.
“세르니아 누님.”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 그렌드윈이 내게 다가왔다. 오늘따라 한층 깊어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속을 알 수 없는 심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누님은 눈부시도록 아름답습니다.”
“고마워!”
뜬금없는 칭찬에 의문을 가졌으나 일단 감사 인사를 했다. 그렌드윈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점점 다가왔다. 나는 예전에 칭찬해 달라며 머리를 들이밀던 그를 떠올리느라 옅게 웃고 있어서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렌드윈이 어느새 코앞까지 가까워진 것을.
그렌드윈의 입술이 가볍게 내 이마에 내려앉았다가 떨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간 일이라 이마 위에 남아 있는 온기가 아니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도 못 했을 만큼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방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봤는지 화기애애하던 대화가 끊겼다.
“진심으로 누님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나는 당황해서 입만 벙긋거리는데 오히려 그렌드윈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진해진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멱살을 잡는 에리얼이 아니었다면 정말 내가 착각했구나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렌! 너 누님에게 무슨 짓이야!”
아리엘은 분노하는 에리얼을 말렸지만 그녀도 그렌드윈의 행동이 탐탁지 않은지 싸늘한 눈으로 그런 돌발적인 행동은 자중해달라는 경고를 날렸다. 그렌드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신부 대기실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이 분위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금방 해결됐다.
“시간 됐다. 가자.”
미묘한 신부 대기실의 분위기를 깬 사람은 여전히 변함없는 미모를 자랑하는 공작이었다. 그의 등장에 쌍둥이와 친구들은 식장으로 먼저 이동했고,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준비한 베일을 씌워줬다. 준비를 마치자 붉은 머리칼을 정갈하게 넘긴 공작은 손을 내밀었다.
‘이제야 실감이 나네.’
어제까지는 하나도 긴장 안 됐는데 막상 웨딩드레스를 입으니 긴장이 몰려왔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두 번째 인생이지만 처음 하는 결혼이었기에.
“긴장되나?”
“네.”
베일에 가려 공작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부드러워서, 긴장이 조금 풀렸다.
“괜찮다. 네 옆에는 내가 있으니.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처음 에스코트를 해줬을 때처럼. 그는 언제나 든든하게 받쳐주는 나무 같았다.
“삼촌이 제 삼촌이라 정말 다행이라 생각해요.”
꼭 전하고 싶은 말이었다. 부모님의 몫까지 나를 사랑해주는 그에게 늘 감사했다. 공작과 나는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건물을 나와 향한 곳은 등나무가 만개한 시리우스 궁 후원이었다. 일반적으로 신부 측 집안에서 결혼식을 하는 제국의 전통과 달리 우리는 시리우스 궁 후원에서 결혼식을 하기로 했다. 영구보존 마법 덕분에 사시사철 활짝 피어있는 등나무가 좋아서.
‘사실 시리우스에게는 말 안 한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후원을 결혼식에 맞게 하얀 천으로 장식했고, 임시로 세팅해놓은 테이블에는 많은 하객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시선 끝에 시리우스가 들어왔다. 베일 때문에 흐릿하게 보였으나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세르니아 님.”
시리우스가 손을 내밀었다.
드디어 결혼식 시작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시리우스의 손을 잡으려고 했는데 내 손을 꽉 잡은 공작은 놓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사, 삼촌?”
손을 놓지 않는 공작 때문에 당황한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지금이라도 베일을 벗고 공작의 표정을 살펴야 하나 고민하는데 잇새로 으르렁거리듯이 낮게 말했다.
“……울리면 죽는다.”
“그럴 일 없습니다.”
방금 진짜 살기가 느껴졌는데요.
나는 공작의 기운에 흠칫 놀랐으나 정작은 경고를 받은 시리우스는 싱긋거리며 웃어넘겼다. 육식 동물 사이에 끼여서 고통받는 느낌!
“니아, 언제든지 공작가로 돌아와도 된다.”
“그럴 일도 없을 겁니다.”
둘 사이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굳이 결혼식 도중에 이랬어야 했나 싶었으나 속으로만 생각했다. 어쨌든 무사히 시리우스의 손을 잡고 입장을 하자 결혼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우리의 결혼식을 위해 온 대사제가 단상 위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새로운 부부의 결합을 축하는 인사를 엿가락 늘이듯 길게 늘여서 실속 없고 지루했다. 사제의 연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멍하니 있었는데 어느새 베일을 걷은 시리우스가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으실 겁니까?”
“어?”
“결혼식에서 마저 딴생각을 하시다니. 정말 세르니아 님다워서 할 말이 없군요.”
연설을 배경음악 삼아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을 딱 걸려버렸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데구르르 굴리자 사제가 헛기침하며 반지를 향해 눈짓했다. 시리우스의 말과 사제의 눈짓을 통해 지금은 사랑의 맹세를 해야 할 타이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역경이 있더라도 시리우스를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기다려 달라고 했던 그 날의 대답.
이미 시리우스에게 말했지만 여기서 한 번 더 말하고 싶었다. 햇빛마저 나의 색으로 물드는 이 장소에서.
“저도 평생 세르니아 님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맹세의 입맞춤을 나누자 하객들이 손뼉을 쳤다.
만약 소설이었다면 행복한 해피 엔딩으로 끝이었겠지. 하지만 우린 이제 시작이었다. 살아왔던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살아가야 하니까. 인생의 끝이 어떻게 끝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적어도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었다. 이 순간의 행복을 가슴에 새기며 나는 미래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갔다. 부디 나의 이야기가 행복한 결말로 끝나기를 바라며.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 完 / 외전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