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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81화 (81/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82화.

앤시아가 대답 대신 눈으로 그걸 왜 묻냐는 듯 빤히 쳐다보았다.

앤시아의 침묵에 리샤르는 자신이 너무 갑작스럽게 따지듯 물었음을 눈치챘다. 리샤르는 호흡을 가다듬고 흥분한 목소리를 가라 앉히려 애썼다.

“보고를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시녀장이 직접 나갔다기에 평소보다 신경 쓴 정도라고 여겼소.

아니, 어차피 변명이지. 내가 신경 쓰지 못한 점은 미안하지만…….”

“공작님. 사과할 땐 토를 다는 게 아니라고 했어요.”

앤시아의 지적에 리샤르의 얼굴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공작님이 정말로 잘못하셨다고 생각하신다면 그 부분만 사과하세요. 그럼 제가 받아들일지 좀 더 이야기를 나눌지 판단할게요.”

지나간 일을 들추기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기에 앤시아는 적당히 리샤르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리샤르를 가라앉히려고 꺼낸 말들이 도리어 앤시아가 덮어 두었던 감정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지금 공작님은 제게 사과를 하시려고 한 게 아니죠? 시녀장이 제게 해 왔던 일들을 공작님이 신경 쓰지 않아 몰랐던걸 가지고 제게 화내시려는 거 죠? 그런 거라면 저야말로 좀 화내고 싶은데요.”

저도 모르게 갑자기 끊어오른 감정을 숨도 쉬지 않고 내뱉고 나자 앤시아는 맥이 탁 풀리는 듯했다.

리샤르의 푸른 눈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걸 보며 앤시아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았다.

“시녀장은 제게 항상 과한 적의를 드러냈어요. 그래도 상관하지 않았어요. 전 공작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딱히 열심히 할 생각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내버려 뒀어요. 제 게으름을 문제 삼으시겠다면 그 그 점은 사과할게요.”

“아니, 아니오. 그걸 탓하려고 온 게 아니야. 나는 그저 나의 무신경함이 부인을 괴롭혀 왔던건 아닌지 당황스럽고 화가 났소.”

부부 침실에 들어올 때만 해도 잔뜩 성이 나 있던 리샤르의 기세가 측은해 보일 정도로 풀이 죽었다.

“시녀장에 대해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부인에게 해서는 안 될 언행들이 드러나는데 너무 화가 나더군. 감히 누구에게.”

“괜찮아요. 제가 내버려 둔 거니까.”

리샤르의 기세가 꺾였으니 앤시아도 차분히 웃으며 다독였다.

그러자 리샤르는 더욱 기운 빠진 목소리로 힘없이 말을 이었다.

“지나간 일에 화를 낼 자격도 없다는 건가. 내가 신경 쓰지 않는 바람에 부인이 상처 받는 걸 방치해 버렸소. 사과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답답하군…….”

성난 물소처럼 달려 들어올 땐 언제고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처져서는 자기 비하에 가까운 죄책감을 드러냈다.

정말이지 리샤르는 사랑에 빠지면 대책 없이 그 대상에게 집중했다.

기쁘면서도 지금은 이런 일에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리샤르가 자기 스스로를 탓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까지 비약하세요?”

“비약이 아니라 무지이지. 아니, 이 경우는 무관심이오. 내가 너무 무심했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앤시아와 리샤르는 황제의 명으로 강제로 맺어진 부부였다.

서로에게 무신경한들 누가 뭐라할 사람도 없다.

리샤르는 북부의 냉혈 공작답게 마수를 쓱싹 베어 버리고 영지금이나 착착 쌓으면 그만이었다.

만약 잘못을 따진다면 이 나라의 황제씩이나 되면서 공작을 견제하는 이부터 혼나야 했다.

당장은 풀 죽은 남편을 다독이는 게 중요했기에 앤시아는 최대한 부드럽게 현실을 알려 주었다.

“공작님, 로사는 저를 싫어해요.

분명 공작님께 부풀려 말한 부분도 있을 거예요. 왜 절 싫어하는 사람 말을 듣고 이렇게 화를 내며 괴로워하세요?”

“낯선 북부에 와서 부인이 많이 힘들었을 텐데 나는 그것도 있었던 게 후회돼.”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거예요. 완벽한 공작 부인은 못 되더라도 내 그릇은 챙길 거예요.

공작님도 저를 이렇게 신경 써주시잖아요. 그쵸?”

“……미안하오.”

변명이나 다른 말 없이 솔직하게 이어진 사과 한마디에 앤시아역시 웃음으로 사과했다.

“네. 저도 그동안 민폐만 끼쳐서 미안해요.”

“그대가 무슨 민폐를……?”

리샤르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며 가볍게 입을 맞춰 오는 앤시아의 행동에 당황했다.

앤시아는 풀이 죽었음에도 완전히 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리샤르의 푸른 눈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앤시아를 위해 화를 내고 한달음에 달려와 지나간 일을 안타까 워하고 미안해하는 리샤르에게 고마웠다.

“고마워요.”

“아니, 나는 그대가 고마워할만한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해도 화내고 사과해 주셔서 기뻐요.”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말라고 할 땐 언제고 금세 웃으며 기쁘다고 말하는 앤시아의 행동에 리샤르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런데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앤시아는 리샤르에게 섭섭하지도, 화가 나 있지도 않다는 걸.

다시 가볍게 입 맞춰 오는 앤시아의 행동에 리샤르는 고개를 기울여 주었다.

몇 번 더 가벼운 입맞춤을 나눈 후에야 앤시아는 리샤르의 눈 주변을 손끝으로 살살 문질렀다.

“오늘은 눈 좀 붙이세요.”

“잠이 올 것 같지 않은데.”

“그럼 잠이 올 때까지 보고서를 보면 되죠.”

침대 위에 내려놓은 두툼한 종이를 들어 보이자 리샤르는 못본 척 앤시아를 끌어안았다.

“졸려, 부인.”

“그럼 잘까요?”

“그러지.”

리샤르는 잠기운이 조금도 묻어나지 않는 태연한 목소리를 내며 장난스레 앤시아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못 이긴 척 침대에 누워 리샤르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자 목주변을 배회하던 숨결이 점차 나른해졌다.

수면 부족 상태로 종일 많은 일을 해치웠을 리샤르는 포근한 앤시아의 품에서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 그 모습이 못내 사랑스러워 앤시아는 리샤르의 머리를 한참 동안 쓰다듬었다.

***

외출 금지에 가까운 리샤르의 제안을 받아들인 앤시아는 고집부리지 않은 게 천만다행임을 깨달았다.

고작 하루 만에 앤시아의 방은 온갖 서류들과 물건들로 가득 찼다.

종일 서류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훌쩍 지나가 버렸다.

자고 일어나면 늘어난 서류에 전담 시녀들은 물론 몇몇 사용인 들까지 동원되어 분주했다.

“마님, 중앙광장 지도 받아 왔어요.”

“고마워, 비앙카. 이쪽 벽에 붙여 줘. 엘리, 중앙광장 주변에 어떤 가게가 있는지 적어 주겠니?”

“마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식당주인과 일반 참여자를 분류했어요.”

“그럼 그걸 음식 종류별로 분류해 줄래? 메인이랑 간식, 디저트류로 하면 좋겠어.”

“가게 주인 중 대부분이 노점상에 반대하는 태도라 절충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응, 안 그래도 협조문을 보낼 거야. 노점상 이익의 일부를 자릿세 개념으로 지급하고 근처에 있는 음식점과는 겹치지 않는 종류로 판매할 거라고 공문을 만들어 줘.”

다행히 줄리가 문서 작성에 익숙해 앤시아는 아이디어만 전달했다. 그런데도 직접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잔뜩 남아 있었다.

로사의 일은 이제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리샤르 역시 축제 기간이 끝난 후 로사의 처벌을 확정 지을 거라고 했다. 그때 앤시아도 의견을 내기로 했기에 급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축제 시작까지 이 주도 남지 않았다.

“혹시 벌써 외부에서 손님들이 오지는 않겠지?”

앤시아의 걱정스러운 질문이 끝나자마자 하녀가 열린 문을 두드렸다.

“마님, 길드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친애하는 공작 부인의 손을 들어 드리기 위해 바람 길드의 길드장, 잭 윌슨이 방문 요청 드립니다.”

갑작스러운 바람 길드장의 등장에 앤시아는 머리가 멍해지는 듯 했으나 이내 정신을 차렸다.

길드장이라면 도움이 되면 됐지 방해는 안 될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출입이 허락됐다는 건 최소한 리샤르가 적으로 분류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뭘 먼저 시켜야 할지 빠르게 서류들을 살피는 사이 길드장 잭이 다가와서는 대뜸 돌돌 말린 종이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공작 부인을 위한 저의 진심어린 마음과 일전의 사과가 담긴 소소한 선물입니다.”

끈을 풀어 말려 있는 종이를 펴 자 눈을 가늘게 뜨지 않으면 읽기 어려울 만큼 작은 글씨들이 가득했다.

“……이게 뭔가요?”

재차 같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잘하게 쓰인 글은 지명과 이름들로 가득했다.

“저희 길드의 자랑, 값비싼 마정석과 황가의 인장을 받은 후에야 가질 수 있는 통신구를 가진 이들의 명부입니다.”

통신구에 대한 건 앤시아 역시 이야기로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영상 통화와 같은 역할을 하는 통신구는 황가의 승인 없이는 소지할 수 없고, 은행이나 길드 같은 큰 사업장이나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인물 정도만 보유할 수 있었다.

통신구만 있으면 백작 부인과 얼굴을 보며 대화할 수 있을 텐데 황제는 정보를 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통신구는 사용할 때마다 황가로 정보가 공유되며 사사로이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왜 길드장이 앤시아에게 하는 걸까.

“전 서구는 아무래도 중간에 유실될 확률도 있고 시간이 걸리기에 길드장 권한으로 각 길드에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협조를 요청했다는 건…….”

“예, 각 길드에서 마수 토벌에 참여 의사를 보인 용병들이 벌써부터 속속 도착하고 있습니다.”

앤시아는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파티 계획을 세우다 말고 손님 초대부터 한 격이었다.

양손에 얼굴을 묻는 앤시아가 감격했다 생각한 길드장은 더욱 신이 난 듯 줄줄이 상황을 읊어주었다.

“오늘만 해도 좋은 자리를 선점하겠다며 대여섯 팀의 용병 단이 도착할 예정입니다. 내일은 더 많은 용병이 찾아올 테고 영지에서 돈이 돌기 시작하겠지요. 공작 부인의 현명함에 감탄했습니다.”

축제 소식이 영지 구석구석에다 닿지도 않은 지금 용병단까지 온다는 말에 앤시아는 속이 터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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