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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127화 (127/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28화.

앤시아를 탑에 데려다 놓은 지일주일이 다 되도록 그녀는 한번도 내보내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첫날 방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다고 했던 것과 달리 리샤르는 애초에 별채를 지키는 기사와 호위에게 일러두었다. 별채의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탑 안에서만지내도록. 별채 정원이나 구석구석을 확인하느라 탑 밖으로 나오는 것만을 주의 시켰다.

정작 앤시아는 며칠이 지나도록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후에야 시녀의 권유로 탑내부를 살핀 후 다시 방에 틀어 박혔다. 앤시아의 그런 행동은 어설픈 자유 따위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듯했다.

한시적인 자유는 앤시아의 마음을 풀지 못하리라. 그렇게 경고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앤시아의 의도와는 전혀 달랐으나, 리샤르는 위통이 생길 만큼 괴로워하면서도 양보할 수 없었기에 죽 인내했다.

그 후로도 며칠이 더 흐른 후에야 세작으로 의심되는 이들을 몇몇 찾을 수 있었다. 최소한 별채 안에서는 앤시아가 다치거나 사라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으리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비로소 리샤르는 앤시아의 예전 하녀를 통해 산책을 제안했다.

직접 얼굴을 보고 앤시아를 가두다시피 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 했다. 그리고 조금만 더 가장 안전한 이곳에 머물러 주기를 부탁하고 싶었다.

리샤르는 초조한 마음으로 탑앞에서 앤시아를 기다렸다.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잠시, 앤시아가 내려온다는 소식에 리샤르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매일 잠든 얼굴을 보기는 했으나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같은 집에 있으면서도 그녀를 멀리 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어두운색의 묵직한 문이 열리자 꽃잎이 펼쳐지듯 연한 분홍 드레스에 연보라 숄을 걸친 앤시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햇빛이 드리워진 것만으로도 화사한 아름다움이 여과 없이 드러나 시선을 뗄수 없었다. 화려한 보석이나 꽃장식을 한 것도 아닌데 앤시아그 자체로도 빛이 났다.

그런 아내를 향해 함께 산책하고, 점심을 권하자 마음먹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내에게 부드럽게 권유하기 위해 몇 번이고 입 안에서 말을 굴리며 매끄럽게 내뱉기 위해 반복했다.

그러나 그런 리샤르의 노력은 시도도 하지 못한 채 수포로 돌아갔다.

“문을 닫아 줘.”

단호한 한마디를 남긴 채 앤시아는 비앙카를 붙잡고 뒤돌아섰다.

눈이 마주쳤나 의심스러울 만큼 짧은 시선이 스쳐 간 후 벌어진 일이었다.

완벽한 거부에 리샤르는 위에 독약이 부어진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실상 앤시아는 너무 오랜만에 몸을 움직인 탓에 작은 소음이나 햇빛에도 과민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리샤르는 자신을 거부하고 돌아섰다 여길 수밖에 없었다.

리샤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정작 당사자는 비앙카의 등에 편하게 업혀 가고 있었다.

“아, 편해라.”

“그쵸? 제가 우리 마을 애들 다 업고 다녔거든요. 안정감 하나는 자신 있답니다.”

앤시아는 많이 편안해 보였으나 뒤따르던 안나에게는 조금 전 비틀거리던 공작 부인의 모습이 생생했다.

“의사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지금은 정말 편하니까.”

“안나 님, 너무 걱정 마세요. 여차하면 의사가 있는 2층 방까지 후딱 달려가면 돼요.”

4층이나 되는 계단을 앤시아까지 업고 오르면서도 비앙카는 숨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힘이 센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 튼튼했다. 지난 몇 달간 의지해왔던 터라 더욱 든든했다.

생각해 보면 눈눈 마을에서의 생활은 비앙카로 인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리샤르가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감과 몇 달을 고립돼 있어야 하는 걱정 탓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뿐.

마을 주민들은 눈이 오면 고립되는 상황에 익숙해 보였지만 불편해하는 점도 많았다. 의원이 없어 약초로 병을 이겨 내야 하는 점이라든가, 겨우내 만든 수공예품은 외지에서 오는 상인에게 헐값에 넘길 수밖에 없다든가.

여기까지 떠올린 앤시아는 침대에 자신을 눕히던 비앙카를 향해 눈을 빛냈다.

한껏 기대감에 찬 앤시아의 눈빛에 비앙카는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마, 마님. 어째서 그런 귀엽고 사랑스러우면서 악동 같은 눈빛을 저에게 보내시나요?”

“비앙카, 눈눈 마을에서 겨울 동안 만들던 자수랑 레이스 있잖아. 내가 매입하면 어떨까?”

“아, 쇼핑하시려고 눈을 빛내신 거였군요?”

마님은 죄가 크다는 둥, 괜히 설렜다는 둥 투덜대는 비앙카의 농담에도 앤시아는 제 생각을 알렸다.

“그걸 뜨내기 상인에게 헐값에 팔기보다 잡화점이나 드레스숍이랑 콜라보를 하면 어떨까 싶어서. 무작정 하려면 시간이 걸릴테니 일단 내가 전부 매입하고 다른 숍에 보내면 최소한 후려치기는 안 당할 거 아냐.”

“사업을 하시려고요?”

“그렇다기보다는 겨우내 틈틈이 만든 걸 실 값만 받고 파는 수준인 게 아까워서. 보니까 마을 문양이 독특해서 가방이나 파우치로 만들면 특색 있고 좋겠더라고.”

“멋진 생각이에요, 마님.”

앤시아의 말에 비앙카는 무조건 찬성을 외쳤으나 신중히 듣고 있던 안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하십니다. 안 그래도 그윈티드 영지에는 특산물이랄 게 마석 외엔 딱히 없습니다. 야경을 보고자 외지인들이 방문했을 때도 영지에서 판매되는 물품은 죄다 뻔한 것뿐이라 구매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한숨만 내쉬던 안나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탑에 감금당한 상황에서도 애써 의연하신 척 마음을 다스린다고만 생각했는데 제가 오해 했습니다. 역시 공작 부인께선 존경받으셔야 마땅하십니다.”

“아니. 그건 정말로 뒹굴 댄 거요?”

“너희들이 외출하는 걸 막지는 않으실 거야. 혹 안 된다고 하면 내게 오렴.”

아무 걱정도 할 필요 없다는 듯 앤시아가 화사한 웃음을 짓자 괜스레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탑에 머무는 건 공작님의 심정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때문이지. 내가 지은 죄가 있어서 가아니야. 더욱이 아무 죄 없는 너희들의 발까지 묶는다면 그땐 나도 참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본인이 갇히는 건 별말 없이 버텨 내면서 사용인의 외출이 막히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했다.

그 모습에 누구보다 감격한 건 안나였다. 물론 안나의 출입은 자유로웠으나 그것과 별개로 선뜻 각오를 하는 앤시아에게서는 품위가 느껴졌다.

“역시 공작 부인 다운 대범함……. 부인, 제게도 명령해 주세요.”

안나는 자신이 앤시아의 임신과 출산을 위해 왔다는 사실을 망각한 듯 보였다. 자신에게도 임무를 달라는 안나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럼 안나에게는 특별한 임무를 줄게요.”

“네, 무엇이든 맡겨만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쩌면 안나는 앤시아가 생각한 것보다 어려운 상대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어 생긋 웃음을 보였다.

*

집사장은 오늘도 간단한 식사거리와 위장약을 준비해 집무실을 찾았다. 식사 때가 되면 따로 챙기는 사용인이 있었으나 집사장이 한 번씩 들러 권하지 않으면 차게 식은 음식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기 일쑤였다.

주인을 두려워하는 사용인들은 그런 리샤르에게 식사를 권할 수 없었다. 그걸 잘 알기에 집사장이 따로 더 챙겨야 했다.

“주인님, 들어가겠습니다.”

집무실로 들어서자 리샤르가 이마를 짚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리샤르의 안색은 더욱더 안 좋아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수면 부족인데 방에 돌아가지도 않으니 아무리 건강체질이라 해도 저러다 쓰러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집사장이 다가가자 리샤르의 감겨 있던 눈이 느릿하게 뜨였다.

집사장은 주인의 느린 반응이 낮설고 걱정스러웠다.

“이러다 쓰러지시겠습니다.”

“……아직은 안 되지. 이제 세작 몇 쳐 낸 게 다인데.”

차라리 모조리 물갈이해 버리면 걱정이 줄까. 그랬다가는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 다른 세작이 숨어 들기 쉬워질 뿐이었다.

황제 측에서 요구해 온 기사단의 인원 선별도 골머리가 아팠다. 최근 공작 부인을 찾는 데 동원되면서 불만이 쌓였던 이들이 제법 있었는지 상당수가 황제 측으로 가겠다고 자청했다. 아내에게 불만을 가진 이를 가까이 두고 싶지 않으면서도 고작 감정문제 때문에 해를 끼칠 것도 아닌 기사들을 정리하는 것도 우스웠다.

리샤르는 자신이 지나치게 감정적인 상태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윈티드 공작에게 감정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온 신경이 앤시아를 향해 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며칠 전 앤시아가 고립되어 있던 마을을 비앙카가 다녀오겠다는 소식에 리샤르는 온갖 경우의 수를 떠올려야 했다. 비앙카가 실은 흑막이었던 건가부터 시작해 진작 마을을 지웠어야 했는가의 최악의 가정까지 흘러가던 생각은 ‘주인마님께서 마을의 수공예품을 원한다.’는 말에 모조리 뒷전이 되었다.

리샤르의 고집에 반항 한 번 하지 않던 앤시아가 몇 주 만에 처음으로 원하는 일이었다. 마을을 없애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리샤르는 안도했다.

앤시아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어 안도했다.

대신 비앙카에게 여럿의 호위와 감시자를 붙여 두었다. 비앙카는 일손이 늘었다며 기뻐했다. 참으로 태평한 이였다.

‘차라리 비앙카가 세작이었다면.’

그 연기력을 높이 사 무엇을 내주고라도 이쪽 편으로 돌아서게 하고 싶었으리라. 그만큼 비앙카는 멍청한가 싶을 정도로 순수해 보였다. 앤시아가 그녀를 싸고도는 걸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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