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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128화 (128/148)

악녀의 이혼은 쉬울 줄 알았다 129화.

몸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이대로라면 오늘 밤은 원치 않아도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인님, 레슬리 백작가에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리샤르는 지척에서 들려온 하녀장 줄리의 목소리에 내심 당황했다. 아무리 피곤했다고는 하나 언제 하녀가 집무실 안에 들어왔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오늘은 필히 숙면을 해야겠다 생각하며 줄리가 내민 편지를 집어 들었다.

뒤따라온 집사장이 소리도 내지 않고 과일과 수프를 한쪽에 내려놓고 물러서려는 순간 리샤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지를 가져온 이는 돌아간 건가?”

“아닙니다. 답신을 곧바로 전달해야 한다며 기다린다 하였습니다.”

“이미 근처까지 왔나 보군. 이 럴 거면 편지는 뭐 하러 보내는 건지.”

편지를 내던지듯 내려놓는 리샤르의 행동이 거칠었다. 본인이 백작가에 같은 방식으로 쳐들어간 일은 까맣게 잊은 듯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피로한 얼굴로 느릿하기만 하던 리샤르의 격한 변화에 집사장은 당황한 마음을 감추고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 저희가 알아 두어야 할 게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편지를 다시 확인한 리샤르는 미간을 깊이 패며 혀를 찼다.

“레슬리 소백작과 백작 부인이 방문 편지를 보냈다. 날짜는……

지금 오는 중인 듯하니 며칠 내로 도착하겠군. 당장 준비하도록.”

“어떤 준비를 하면 될까요?”

집사장의 질문은 당연했다.

레슬리 백작가의 방문은 일반적인 귀족을 대할 때와 상황이 달랐다.

몇 달 전이었다면 극진히 대접했을 테지만, 최근 공작이 기사단까지 이끌고 백작가를 방문했던 만큼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레슬리 소백작이 원수인지 은인인지 확실치 않은 상황. 맞이할 건지 내쫓을 건지 알아야 그에 맞춰 준비할 수 있었다.

집사장의 질문에 리샤르 역시 잠시 흔들렸으나 답은 정해져 있었다.

“성심껏 맞이할 준비를 하되, 별채 주변의 경계를 강화하도록.”

“전달하겠습니다, 주인님.”

예우는 해 주겠으나 방심하지는 않겠다. 그것이 리샤르가 내린 결론이었다.

*

백작가의 편지가 도착하고 며칠이 지났다.

새벽부터 흩날리던 눈송이들이 함박눈으로 변해 갈 때쯤 레슬리 백작가 문장이 걸린 마차가 그윈티드 영지로 줄줄이 들어섰다.

마차 대부분에는 물건이 가득 실려 있었다. 일부는 앤시아를 위한 선물이었고 일부는 공작에게 다소 무례했던 지난날의 사과 겸 선물이었다.

동부 출신 마부는 거대한 눈사람처럼 온몸을 꽁꽁 감싼 채 마차를 몰았다. 마차에 겨울용으로 두껍게 솜과 가죽을 덧대었으나 북부의 추위에 익숙지 않은 동부 인에게는 가혹할 만큼 낮은 기온이었다.

다행히 일전에 앤시아에게 받아 둔 보온 마석 덕에 힐다와 나단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세상에. 무슨 한겨울도 아닌데 눈이 내리니?”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본 힐다는 몸서리를 쳤다.

나단은 마차 한쪽에 쌓아 둔 장부 중 하나를 집어 들다 북부에 대한 정보를 가볍게 읊었다.

“북부의 봄은 동부의 초여름쯤에나 오니까요. 여름 없이 가을과 겨울로 넘어가지요.”

나단의 설명에 힐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겨울엔 얼마나 추웠을까. 우리 앤이 많이 추워할 텐데.”

“공작가에서는 마석이 넘쳐나니 그 부분은 걱정 않으셔도 될 겁니다.”

무덤덤하게 답하는 나단을 힐다가 흘겨보았으나 장부를 살피는데 정신없어 알아채지 못했다.

이번 동행을 위해 급히 휴가를낸 탓에 상부에서 떠맡듯 받아 온 일이었다.

“이렇게 시간을 뺏기느니 황녀의 배려를 받는 게 나았을 텐데.”

힐다의 한탄에 나단은 보고 있던 장부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지난번 저를 이곳에 보낸 일로 황녀께서 근신하셨습니다. 사사로이 저희의 편의를 위해 황족의 힘을 이용할 수는 없지요.”

“그건 나도 안단다. 앤시아의 안전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심에 네가 고생하는 것 같아 투정을 좀 부린 거지.”

입으로는 투덜거려도 나단을 바라보는 힐다의 시선은 부드러웠다. 공작가의 기사단이 나단을 철저하게 감시하는 동안 얼마나 속이 탔는지 모른다.

다행히 앤시아가 무사히 공작가로 돌아간 직후 나단의 구금이 풀렸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됐다 싶어 제2 황녀 샬롯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 방문 요청을 했던 나단은 그녀가 근신 중이라는 답을 듣고 당황했다. 편지는 괜찮다고 하여 필담으로 주고받은 내용을 통해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나단이 백작가로 돌아온 이후 갑자기 황태자가 이 일에 관심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했다. 북부의 그윈티드 공작이 기사단을 이끌고 동부까지 내려온 정황과 함께, 이 일의 원인이 나 단 레슬리이니 그를 북부에 보낸 황녀가 책임을 져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행히 그윈티드 공작의 짧은 보고서를 통해 납치로 인한 실종상태였음을 확인한 후에는 적당히 마무리 지어졌다. 그러나 황족의 힘을 제멋대로 사용했다며 황녀에게는 근신 명령이 떨어졌다.

‘다른 이들은 더 사사로이 황족의 힘을 이용하는데 어째서 황녀에게만…….’

나단은 황녀 샬롯이 안타까웠다. 고작 소백작 한 명에게 게이 트를 열어 줬을 뿐인데 애꿎은 황녀만 벌을 받게 되었다. 황족을 위해 열심히 일해 온 나단은 황녀 하나 책임질 수 없는 무력함에 입 안이 썼다.

‘책임지다니. 무슨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나단은 불현듯 든 생각에 고개를 흔들었다. 앤시아가 무사한 모습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 왔다. 나단이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였다. 확인하고 안심하는 것.

돌아갈 때쯤이면 황녀의 근신이 풀렸을 테니 그분을 위한 선물정도는 사가자 싶어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여기가 우리 앤이 사는 곳이구나.”

힐다는 담담히 눈에 들어오는 사람과 건물, 분위기 하나하나 살폈다.

그런 힐다를 바라보는 나단의 시선도 이내 창밖으로 향했다.

억지로 일에 집중할 때는 잠시나마 잊을 수 있던 걱정이 다시 떠올랐다. 당연히 앤시아가 괜찮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공작가가 가까워질수록 커지는 걱정을 좀처럼 내려놓을 수 없었다.

목소리라도 들었다면 이 먼 길을 달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통신구를 통해 소식을 알려 달라 요청했음에도 공작 측에서는 아예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황족과 얽힐 일은 여간해서 하지 않는 공작가답기는 했으나 답답함에 속이 타들어 갔다.

“세상에……. 저게 성벽이었다니. 웬만한 침입자는 엄두도 못내겠구나.”

공작가에 도착한 힐다는 새까만 높은 성벽이 주는 위압감에 놀라 기보다 감탄했다. 기세만으로도 웬만한 방문객은 헛생각 따위 하지 못할 만큼 주눅이 들 만한 규모였다.

검문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선 후에도 꽤 긴 시간을 달려 저택에 도착했다. 힐다는 정원의 삭막함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연신 손끝으로 툭툭 무릎을 두드렸다.

나단은 반대로 점점 긴장감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발 앞서 보낸 방문 요청에 돌아온 답이 ‘방문을 막지는 않으나 환영하지는 못하겠다.는 짧은 한 줄이었다.

앤시아가 무사히 돌아갔음에도 백작가를 향한 불편함과 경계심은 여전하다는 것이 단 한 줄의 글에서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긴장한 채 도착한 저택 앞에는 여러 사용인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집사장이 앞서 나와 응접실로 안내했다. 넓은 응접실에는 훈훈한 온기가 감돌았으며 하녀들은 능숙하게 먼 길을 온 손님을 위해 차와 가벼운 디저트를 준비했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적절한 대응이었다.

사용인들은 모르는 걸까?

그럴 리 없었다. 이 모든 게 공작의 의도이리라.

어쩌면 충분히 적절한 대응을 한 후 정작 공작은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받아 든 차가 식어 가도록 리샤르가 나타나지 않자 힐다는 초조해졌다.

“이대로 돌아가라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러진 않을 거예요, 어머니.”

“공작은 못 만나도 앤시아는 꼭 만나야겠구나.”

애초의 목적이 앤시아의 무사함을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것이었다.

힐다와 나단은 답을 구하듯 집 사장을 바라보았다. 집사장은 정중히 허리를 숙여 보인 후 차분히 입을 열었다.

“주인님께서 곧 내려오실 겁니다. 방문 날짜는 언급해 주셨으나 시간 약속이 되어 있던 게 아닌지라 양해 부탁드립니다.”

집사장은 정중했으나 그 말 속에 갑작스러운 약속에 시간조차 정하지 않은 건 너희라는 지적이 대놓고 들어 있었다.

다행히 기다림은 거기서 더 길어지지 않았다.

응접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초조해하던 힐다가 몸을 일으켰다.

리샤르가 먼저 모습을 보이자 힐다는 조금 실망했지만, 그 뒤로 모습을 보일 앤시아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시선을 움직였다.

“백작 부인을 다시 만나리라곤 생각지 못했는데.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환대는커녕 일말의 반가움조차 없는 삭막함에도 힐다는 예법에 맞게 인사를 건넸다.

약간의 빈정거림이 섞였으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리샤르의 형식적인 태도에 감정적으로 대응할 만큼 힐다는 어리석지 않았다.

무표정한 리샤르를 향해 힐다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공작 부인이 보이지 않네요. 처음 방문하는 그윈티드공작가이니 부부께서 맞아 주실 줄 알았습니다만.”

리샤르가 대답 대신 건너편 소파에 앉자 힐다 역시 자리에 앉으며 다시 물었다.

“혹시 몸이 안 좋다거나 나오지 못할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바로 전까지 예의상 띄우고 있던 웃음이 싹 사라진 질문이었다.

물러설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는 듯 단호한 힐다와 걱정이 얼굴에 묻어나는 나단을 지그시 쳐다보던 리샤르는 헛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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