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화 (1/306)

공금

프롤로그

그 날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길을 걷던 중이었다.

“으어어어…. 그지 같은 팀장 새끼….”

퇴근 후, 넋을 빼놓은 것처럼 중얼중얼 직장 상사를 욕하던 나는 뭉친 어깨를 돌리며 횡단보도에 섰다. 해는 이미 한참 전에 저물어 사방은 가게들에서 새어 나오는 빛과 거리에 설치된 가로등만이 어둑한 길을 밝혀 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귀갓길에 해를 본 게 언제일까. 나는 멀거니 그런 생각을 하며 건너편의 흔들리지 않고 제 존재를 과시하는 빨간불을 바라보았다. 새빨갛게 빛나는 그 신호를 얼마나 멍하니 바라보았을까, 나는 문득 목과 어깨가 꽤나 뻐근하단 걸 느꼈다. 그동안 잦은 야근으로 뻣뻣해진 걸까, 나는 가볍게 목을 꺾고 몸을 옆으로 돌리며 가볍게 풀기 시작했다.

“끄응…. 몸도 예전 같지가 않네….”

확실히 운동을 제대로 못 해서 그런가. 몸이 옛날 같지가 않았다. …물론, 나이를 먹은 탓도 있기야 하겠지만.

“에휴, 이놈의 회사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원…. 무슨 허구한 날 야근이야.”

투덜투덜, 자연스레 불평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하지만, 여느 직장인이 그렇듯 진짜로 퇴사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요즘 같은 취업난에 어렵게 구한 직장이었다. 비록 쥐꼬리만 한 월급에 짜증 나는 상사들이 딸려 있지만, 당장은 그만둘 처지가 못 되는 게 사실이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였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천근만근 몸을 이끌어 기계적인 직장 생활을 영위하는 것. 그거 하나뿐이었다.

“하…. 체육관만 안 망했어도….”

아차, 나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볼을 찰싹찰싹 때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매달리는 건 쓸모없는 일이었고, 그만큼 정신 건강에도 해롭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시는 이 일에 질척거리지 말자고 그렇게 맹세했건만… 나는 또 과거에 미련을 두고 말았다.

“됐다, 됐어. 빨리 집에 가서 눕기나 하자.”

아, 오늘도 소설 보기는 글렀구나. 오늘 최신 화 뜨는 날이었던 거 같은데….

요즘 소소하게 생긴 취미를 떠올렸다. 차마 이 피곤한 몸뚱이로는 글을 읽다가 정신도 못 차리고 기절할 것만 같았다. 나는 제 취미도 마음껏 못 누리는 이 비참한 현실에 저절로 마음이 울적해졌다. 하지만, 내일은 여전히 평일이었고, 주말이 되기까진 아직 이틀이나 더 남았다. …과연 주말도 쉴 수 있을까 싶다만은. 나는 점점 이 삭막한 현실에 메말라 가는 가슴을 느끼며 잦은 야근을 퀭한 얼굴 문질렀다.

“아.”

초록불이다. 신호가 바뀌었다. 그걸 확인한 난 자연스레 발을 뻗었다. 한 걸음을 막 건넜을까, 다른 발을 뻗으려 한 그때,

터질 듯이 밝은 빛이 저를 덮쳐 왔다.

“어…?”

쾅-!! 하고 고막이 터질 것같이 커다란 굉음과 함께 무언가가 강하게 제 몸을 들이박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눈앞에 내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나를 향해 웃어 주는 부모님, 그리고 처음으로 자세를 잡던 순간, 대회에서 첫 승리를 따냈던 날. 그리고, 링 위에서 내려오던 그날.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순간이 촤르륵 머릿속에 되감겼다.

“……!!!!!!!!!!!!!”

그리고 그 모든 게 끝나자 강하게 치고 오는 격통에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됐다.

“…차…! 불…!!”

“여기, 사람…!!!”

웅성이는 소리가 이명처럼 들린다. 나는 흐릿한 너머로 사람이 몰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내 자신은 어째선지 그 소란스러운 현실과 동떨어지게만 느껴졌다. 그저 전신을 덮쳐 오는 격통에 이 고통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만 가득했다.

“…므… 바…”

엄마 아빠 살려 줘. 나 아파. 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꺼져 오는 의식 너머로 나를 향해 웃고 있는 부모님의 잔상을 끝으로 무거운 눈꺼풀이 시야를 내리눌렸다.

01. 차에 치이고 빙의되는 클리셰가 진짜라고? (1)

***

“서이나! 일어나!!!”

“허억….!”

벌떡! 제 귀를 강타하는 큰 목소리에 내 몸은 저절로 침대에서 일으켜졌다.

“허억, 허억…”

여, 여긴? 집…? 나, 나 방금 차에 치였지… 않았나…?

나는 황급히 내 몸을 더듬었다. 식은땀에 절여져 있는 것을 제외하곤 굉장히 멀쩡했다.

방금까지의 그 모든 고통이 꿈이었다고? 그렇게 끔찍하게 아팠는데? 나는 너무나도 멀쩡해 보이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상처 없이 말끔한 손이었다. 하지만, 그 끝은 고통의 잔상이 남아 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손을 한껏 움켜쥐곤 방 안을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초등학교 때 산 뒤로 오래도록 바꾸지 않은 책상과 장롱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어째선지 바뀌어져 있는 커튼과 내가 덮고 있는 침구들.

‘어…, 엄마가 바꿔 놨나?’

하지만, 어째선지 낯설지가 않았다. 새것 특유의 냄새도 나지 않은 게 좀 이상했지만, 이곳은 어떻게 보나 자신의 집이었다. 아무래도 야근으로 지쳐서 바뀐 줄도 몰랐던 모양이다.

“방금 그건… 꿈이었나…?”

그도 그럴 것이 이 상처 하나 없는 몸뚱어리가 증거였다. 환각통마냥 저릿한 감각이 여전히 느껴졌지만 내 피부 어느 곳에서도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하아….”

풀썩, 한껏 힘이 들어갔던 몸이 한순간에 풀렸다. 나는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몸을 푹신한 침대에 뉘며 얼굴을 쓸었다.

“뭐, 그런 개꿈이….”

오늘 일진 한번 더럽게 사납겠구나 싶어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 일도 없어서 이걸 기뻐해야 되는지, 기분 더러워해야 되는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방문이 벌컥 열리었다.

“야!! 빨리 일어나라고!!”

허락도 없이 들어온 불청객은 짧은 머리를 가진 앳되어 보이는 남자애였다. 사춘기를 막 지날 법하게 앳된 그 얼굴은 쭉 째진 눈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갖추어져 꽤나 나쁘지 않은 얼굴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근데….

“누구세요…?”

누구신데 남의 집 방문을 벌컥, 벌컥… 아니, 근데 저거 주거침입 아냐…? 엄마랑 아빠는 대체 뭐 하는 거지? 얼른 내쫓아야… 어라, 근데 방금 내 이름 부르지 않았나…? 뭐지? 지금 이 상황은…?

“뭐…?”

그런데, 남자애는 내 말을 듣곤 아주 이상한 소릴 들은 것처럼 이맛살을 살풋 찌푸렸다.

“아니, 저기….”

지끈. 갑자기 머리가 울렸다.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찾아온 두통으로 인해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짚는데, 제 방을 기습한 남자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 엄마!!!!! 누나가 이상해!!!!!!”

누나? 누나라고? 나한텐 동생이 없…,

지끈, 지끈. 나는 자꾸만 울리는 머리를 결국 두 손으로 붙잡았다.

무언가, 무언가 잘못됐다.

‘나는 왜 방 안에 있는 거지? 저 남자애는 대체 뭐고? 지금 이 상황은 뭐지? 교통사고는? 이게… 현실이 맞아…?’

띵--, 머리의 두통이 한계를 넘어섰다.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다. 울렁이는 속에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팔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누군가 나를 붙드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를 부르는 소리, 나를 만지는 감촉, 모든 게 먼발치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내 시야는 새까맣게 점멸됐다.

***

소독약 냄새가 났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냄새였다. 나는 닫힌 눈을 떴다. 그리고 보이는 건 새하얀 천장이었다. 그 옆으론 내가 누워 있는 주변을 두르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커튼이 있었다.

이로써 나는 이 익숙한 곳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여기는 분명 응급실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상황 판단을 위해 눈을 멍하니 끔뻑이고 있는데, 옆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나야! 정신이 좀 들어?!”

“…엄마?”

“아이고오…, 아이고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나, 너 갑자기 쓰러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엄마가 눈을 한껏 글썽이며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나는 왠지 그런 엄마에게 미안해져 머리를 긁적이는데, 옆에서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 시선이 자연스레 옆으로 향해졌다.

“…….”

쭈뼛거리며 옆에 서 있는 놈은 기절하기 전에 봤던 그 남자애였다. 나는 남자애를 빤히 보며 입을 열었다.

“서이수. 너 학교 안 가?”

서이수. 열네 살. 한 살 아래의 내 남동생이었다. 정신을 잃은 사이에 어째선지 원래 내 기억 속에 있지도 않은 남동생의 정보가 흘러들어 왔다. 하지만, 그것에 괴리감을 가질 새도 없이 내 입은 자연스레 편히 말하고 있었다. 서이수는 내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말을 걸자 눈에 띄게 안도하더니 금세 입을 뚱하니 내밀었다.

“네가 그렇게 갑자기 쓰러졌는데 어떻게 가냐?”

“허이고. 언제 네가 날 신경 썼다고 그래?”

“신경을 써 줘도 뭐라 하네.”

녀석은 투덜거리면서도 옆에 있던 가방을 챙겼다.

“아, 그리고.”

서이수는 말을 하다 말고 저를 빤히 쳐다보았다. 잠깐 망설이는가 싶더니, 그 얼굴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아까 같은 장난 또 치면 죽는다.”

장난? 아, 그거… 정신을 잃기 전에 했던 내 행동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가 놀랄 만도 했다. 나는 납득하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서이수는 그런 내 행동을 못마땅한 듯 바라보았다. 여전히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그는 더 이상 별말 하지 않고 홱, 하니 자리를 떠났다.

“…둘이 무슨 일 있었어?”

서이수가 떠나고 옆에 있던 엄마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물어 왔다. 난 그 질문 덕에 내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 서이수가 말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녀석이 말하지 않았는데 굳이 내가 말을 할 필욘 없겠지. 괜히 엄마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별일 없었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쟤랑 내가 하루 이틀 싸워?”

“그야 그렇긴 하지만….”

엄마는 미심쩍은 기색이었지만 더 파고들진 않았다. 두 자식이 서로 입을 다물고 있으니 알 도리가 있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레 시선을 피할 따름이었다.

***

링거를 다 맞고 나자 퇴원은 금방이었다. 기절한 원인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스트레스로 인한 쇼크라는 게 의사 소견이었다. 평소 그런 기색이 일절 없었던 딸의 모습 때문이었을까, 엄마는 그 대답에 미심쩍어했지만 결국 의사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싶었던 엄마의 모습에 나는 남몰래 안도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방 안에 있었다. 엄마는 회사에 출근한 지 오래였다. 스트레스로 쓰러진 딸이 걱정되었는지 엄마는 자꾸만 내게 혼자 있어도 괜찮냐고 걱정하는 통에 나는 괜찮다고 밝게 웃으며 억지로 그 등을 떠밀었다. 월차를 내겠다는 걸 겨우 말리고 등 떠밀어 겨우 내보내자 고요한 적막이 방 안을 울렸다. 하지만, 내 머리는 그와 반대로 여전히 복잡한 채였다.

“하아…. 이게 대체 뭔지….”

이제 보니 방 안의 커튼과 침구류 모두 내가 어렸을 때 사용했던 것들이었다. 그 사실까지 깨닫자 복잡한 심경을 그대로 담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난데없이 교통사고를 당하질 않나, 일어나 보니 처음 보는 남동생이 있질 않나, 게다가 지금 내 나이가 열다섯 살이라니. 이게 말이 돼? 나는 원래 서른이었다고!

서른 살의 나를 꿈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한 기억들이었다. 게다가 정신이 깨어났을 때 홍수같이 쏟아지는 기억의 파편들이 나를 덮쳤던 걸 느꼈다. 그걸 어떻게 꿈으로 치부할 수 있겠는가. 나는 복잡한 머리를 휘저었다.

“열다섯 살…. 열다섯 살이란 말이지….”

무려 열다섯 살이나 어려지다니, 이걸 좋아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아니, 그건 그렇고 이 세계는 대체 뭐지? 이게 말로만 듣던 회귀…는 아닌 것 같고. 차원이동이나 환생, 뭐 그런 건가?

“그런 건 그냥 책에서나 있으라고…. 왜 복잡하게 나한테 일어나냐고….”

복잡한 건 딱 질색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막막해졌다. 이 세계가 어떤 세계관인지 알기는 해야 될 텐데, 너무 귀찮다. 이걸 어떡하냐…. 한참을 침대 위에서 뒤척이며 골머리를 썩였다. 그러다 나는 머리칼을 세차게 헝클이곤 이불을 머리끝까지 힘껏 뒤집어썼다.

‘아, 몰라! 우선 자고 나서 생각하자!’

끝내 택한 것은 잠으로의 도피였다.

***

번뜩, 눈이 떠졌다.

떠진 눈 사이로 보이는 건 제 어두운 방이었다. 어느새 해가 저물었나 보다.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뭉그적뭉그적 몸을 일으키곤 얼굴을 쓸었다.

“환생도 차원이동도 아니고 빙의였냐….”

자고 일어나니 기억은 더 명확해졌다. 이 세계관이 어떤 세계관인지 알게 된 탓에 나는 좌절감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두 손으로 덮어 버렸다.

“하필, 빙의돼도 인소냐고….”

떠오른 기억들 속에서 익숙한 단어들이 있었다.

상고의 사대천왕, 공고의 어쩌고저쩌고…. 하는 낯간지러운 별명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면서 일짱이니 이짱이니 뭐니 하면서 서열을 가리는 세계관이란 걸 알자마자 떠오르는 건 인소였다.

인터넷 소설을 줄인 약자인 인소는 한때 내 학창 시절에 유행했던 장르였다. 운동에 빠져 있던 나였지만 그 유행에 탑승해 아빠 몰래 한창 신나게 인소를 읽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대충 이 세계의 맥락은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 ‘인소’라는 점인데… 아니, 이건 우선 넘어가자.

그나마 다행인 건 이 낯선 세계에서 내가 빙의된 몸이 생판 남의 몸뚱이에 빙의된 게 아닌 ‘서이나’라는 나 자신에게 빙의된 점이었다.

‘이건… 평행 세계 같은 건가?’

뭐. 아무렴 어때. 만약, 생판 남의 몸에 빙의됐다면, 그건 그것대로 정신이 온전하질 못할 것 같았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너무 오래돼서 뭔 소설을 읽었는지 기억도 안 나….”

많이 읽던 편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소설들을 읽었는지 기억이 전혀 안 난다…. 차라리 빙의될 거면 요즘 읽던 판타지 소설에 빙의시켜 주지. 왜 하필 유행한 지 10년도 더 된 장르에 빙의시키냐고오…. 이것도 운이라 이거야, 어? 내 운은 지지리도 없다는 걸 이렇게 알려 주는 거야, 설마?

나는 침울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크게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었다.

“여긴 대체 뭐 하는 곳이야아아아….”

나는 아무도 듣지 않는 방 안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아무도 듣지 못할 말을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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