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2화 (2/306)

02. 차에 치이고 빙의되는 클리셰가 진짜라고? (2)

***

다음 날, 나는 학교에 나갔다. 몸도 멀쩡해졌으니 학생의 본분을 다해야 하는 게 맞긴 하지…. 근데, 약 10년 만에 다시 학교를 다니다니, 이거 참. 살다 보니 별일을 다 겪네…. 나는 양심이 찔리도록 어색한 교복과 가방을 힐끔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학교로 향했다. 우선, 대충 정보부터 모을 필요가 있었다.

인소의 클리셰 제1 단계. 여자 주인공은 몰라도 남자 주인공은 어릴 때부터 엄청난 유명인이다.

비록, 지금 남주로 추정되는 놈이 학교를 다니지 않고 있을 수 있긴 하지만, 어찌 됐든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낫겠지. 나는 각오를 다지며 낯선 기억 속을 더듬으며 반을 찾아갔다.

도방중학교. 처음 보는 학교다. 나는 원래 다른 중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지금 입고 있는 교복도 굉장히 낯설었다. 이런 현실이 새삼 내가 다른 세계에 왔다는 걸 상기시켜 줬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반으로 들어섰다.

“야, 야. 들었어? 강해중학교에 미남이 네 명이나 들어왔대!”

“들었어! 들었어! 차기 사대천왕은 역시 걔네들이려나?!”

“무슨 소리야! 너희들 우리 학교에 누가 있는지 잊었어?!”

“아, 맞다. 맞다! 그랬지, 참!”

워우…. 들어오자마자 인소 분위기 확 나는데…? 나는 뼛속 깊이 파고드는 거부감에 잠시 주춤거리며 발을 뒤로 뺐다. 왠지 이 반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졌다.

“어? 이나야!”

그러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얼굴, 아, 아니, 기억 속에 있는 얼굴이었다.

“어…, 혜인아.”

입안에 낯선 이름이 굴려졌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이 몸의 주인이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 목소리는 그리 어색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는지 눈앞에 있는 여자아이가 내 안색을 살피며 걱정스레 물었다.

“너 어제 아팠다며? 몸은 괜찮아?”

“으응…, 어…. 괜찮아.”

나는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감각에 어색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머리에 나열된 정보를 되새겼다.

이혜인. 열다섯 살. 그녀는 나와 같은 반 친구이자, 중학생이 된 이후로 줄곧 친하게 지낸 친구였다. 내성적인 듯하나 당찬 성격이 매력적인 친구다, 라고 이 몸의 주인이 말하는 듯한 감상도 동시에 떠올랐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중학교 친구라….’

이전 삶의 중학교 시절에 나는 학교에서 친구가 딱히 없었다. 왕따를 당한 건 아니었다. 그냥 운동을 하다 보니 학교 출석률이 낮기도 했고, 하교 시간인 오후에도 따로 시간을 내서 놀 시간조차 없이 훈련에만 매진했다. 그러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마땅히 교우 관계를 맺을 타이밍을 번번이 놓치고 말았었다.

‘이건 좀… 묘하네.’

나는 친근히 붙어 오는 이혜인이란 친구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기억에 왠지 거부감이 드는 것 같으면서도 마냥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난 중학교 때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에도 친구를 제대로 못 사귀었다. 또래를 만난다고 해도 그나마 자주 보는 체육관 애들이랑 친해지는 정도가 다였다. 이렇게 학교에서 또래의 여자애랑 제대로 얘기해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물론, 실제 나이는 열다섯 살이나 더 많긴 하지만…. 어찌 됐든 제대로 동성 친구를 사귈 수 있단 걸 깨닫자 가슴속에서 묘한 벅참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 삶에서 나는 운동을 안 하는 건가?’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잠시 몸이 굳어졌다. 그에 이혜인이 내게 왜 그러냐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만큼 난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운동을 그만둔 지 오래였어도, 이걸 이제서 깨닫다니….

허탈한 웃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나는 시선을 내려 글러브를 꼈었던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건 굳은살 하나 없이 말끔한 손이었다. 마치 그게 이제껏 살아왔던 제 삶이 부정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게, 뭐야…. 나는, 나는… 대체….

말이 맺어지지 않는 의문이 자꾸만 입안에 맴돌았다. 그러자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속이 울렁였다. 돌연 치미는 토기에 나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이, 이나야? 어디 아파? 아직 덜 나았어? 토할 거 같아?! 화, 화장실…! 화장실로 가자!”

“아니….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괜찮아.”

제가 느끼기에도 얼굴색이 가히 좋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 말뿐이었다. 이 세계에선 원래의 서이나가 사귀고 있던 친구였을지 몰라도 난 처음 보는 아이였다. 낯선 이에게 나를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약한 모습을 말이다. 게다가 이 세계에선 하지도 않던 운동 얘기를 하면 얼마나 이상한 취급을 받을까. …이 모든 건 나 홀로 감당해야되는 일들이었다.

입가에 댔던 손을 치운 난 숨을 차분히 내쉬며 치미는 토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옆에서 괜찮냐며 양호실 가자며 이혜인이 재촉했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젓곤 피곤하다고 말하며 곧장 자리를 찾아 앉고는 책상에 엎드렸다.

“…잘 거야? 진짜 괜찮은 거 맞지?”

하지만, 이혜인은 미련이 남은 것처럼 자꾸만 내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손을 흔들며 괜찮다고 재차 말해 주곤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정리, 정리가 필요했다. 나는 덜덜 떨려 오는 손끝과 답답해져 오는 명치 부근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난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지?’

운동은 아빠한테서 배운 거였다. 하지만, 이곳의 아빠는 내게 운동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선 내가 어릴 때부터 운동하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어째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원래 내 세계는? 우리 엄마, 아빠는?’

덜컥, 해서는 안 될 생각을 떠올린 감각이었다. 나는 서서히 숨이 옥죄어졌다. 모든 게 다 무서웠다. 이게 뭐야. 여긴 뭐야. 무서워.

“이나야? 이나야!”

화들짝, 나는 불시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초점이 잘 잡히지 않던 시야가 서서히 돌아왔다. 완전히 자리 잡은 시선 너머엔 심각한 이혜인의 얼굴이 보였다.

“이나야, 너 괜찮아? 세상에, 이 식은땀 좀 봐! 너 아직 덜 나은 거지? 그렇지? 당장 양호실로 가자.”

이혜인이 내 이마를 대 보며 부산스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멍하니 그가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어느새 나는 양호실 침대 위에 눕혀 있었다.

“선생님껜 내가 말해 놓을게. 너무 힘들면 조퇴해!”

그녀는 차마 발걸음이 떠나질 않는지 동동거리며 옆을 지키다가 양호 선생님이 이곳은 내가 지킬 테니 어서 돌아가라는 권유에 못 이겨 돌아갔다. 나는 그를 향해 느릿하게 손을 흔들어 주곤 다시 멍한 시선으로 양호실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 양호실은 처음이네.’

좀 크고 나서부턴 선수 준비를 하다 보니 자잘하고도 큰 상처를 많이 달고 다녔던 터라 병원행은 필수 불가결이었다. 학교에 거의 붙어 있던 적이 초등학교 이후론 없었고 그곳에서 다쳐 본 일은 거의 없었다. 있었어도 운동을 하다 보니 상비약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다녀서 양호실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양호실은 처음이었다.

‘양호실이란 건 이렇게 생긴 곳이구나…. 침대가 병원보다 훨씬 좋네. 되게 푹신하다. …아니, 우리 집 침대보다 더 좋은 건가?’

머리와 마음은 아직도 심란했지만 햇볕 잘 드는 양호실 침대에 누워 있자니 잠이 솔솔 쏟아졌다. 나는 졸린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정신이 멀어지기 앞서 멍하니 생각했다.

‘이제 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거지?’

나는 멀거니 의문을 떠올리며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

한숨 푹 자고 나자 차츰 정신이 멀쩡해졌다. 그래서 난 교실로 돌아와 차분히 이 상황을 노트에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나는 어디에 있지?’

이름도, 줄거리도 모를 인소에 빙의했다.

‘그리고 나는 누구?’

도방중학교에 다니는 열다섯 살 서이나다. 다행히 완전 다른 인물이 아닌 거의 원래의 나 그대로였다. 이 부분은 정말, 정말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모르겠다. 내가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전혀 모르겠다. 운동을 계속하기엔 앞으로 망해 버릴 가능성이 있는 체육관이 신경 쓰였다. 그럴 바엔 차라리 공부를 해 볼까? 그럼 내 인생이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퍼뜩, 번뜩이는 생각에 나는 의식대로 끄적이던 펜을 멈추고 상반신을 바로 일으켰다.

그래! 대학교! 대학교를 가자! 지난 인생에선 대학교 못 가 겪었던 서러움이 있었다. 솔직히 캠퍼스 라이프란 것도 좀 궁금했다. 차마 돈도 없고 좀 늦은 나이에 대학을 다니기엔 눈치도 보여 대학 갈 생각을 못 했었는데… 차라리 이번 기회에 대학을 노려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좋아. 결정했어! 이번엔 대학 졸업증 따서 좀 더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는 거야!

그러기 위해선 우선 대학 등록금도 필요했다. 그럼 체육관이 어떻게든 안 망하게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이번에도 체육관이 망해 버린다면… 나는 과연 버틸 수 있을까?

한참을 체육관 부흥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데 이혜인이 나를 불렀다.

“이나야, 들었어?”

“어? 뭘?”

한참 상념에 빠져 있는 와중에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이혜인이 언짢은 기색으로 툴툴거렸다.

“아니~, 수학이 오늘 쪽지 시험 본대!”

“……어?”

***

두둔.

이혜인이 말한 대로 수학 시간에 쪽지 시험이 치러졌다. 그리고 나는 말없이 쪽지 시험의 결과를 바라보았다.

“…….”

아무래도, 성적부터 고칠 필요가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