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난처한 부탁 (4)
그건 그렇고 내가 그동안 숨었다고 해서 숨은 게 효과가 전혀 없진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했다.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소문이 쫙 퍼진 게 아닐까 걱정했던 게 무색해졌다. 하긴, 만약 소문이 퍼졌다면 이런 소문에 정통한 반 친구들이 나를 가만히 둘 리가…. 나는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암튼 그럼 됐어.”
“그래요? 누나 참 이상하네요…. 뭐, 전 그런 부분이 좋지만요.”
“…너도 참, 직설적인 놈이구나.”
가만 보면 나에게 가장 제 감정을 솔직하게 전해 오는 놈은 이놈이었다. 매일같이 누나 진짜 좋아요. 완전 멋져요. 그런 부분이 최고예요. 하면서 비글미를 뽐내며 제게 다가오는 놈이었다. 그런데, 얘는 왜 제게 이성적인 감정이 있을 것처럼 안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오해를 했다면, 이 녀석을 먼저 오해하는 게 맞을 텐데 말이다.
‘흐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은 해 볼까?’
물론, 이 녀석이 날 그런 의미로 좋아하진 않을 것 같지만, 전과가 있다 보니 확신을 두기엔 걱정이 들었다. 만약, 진짜 좋아한다고 하면? …음. 커서 다시 고백하라고 하지 뭐. 나는 대충 해결 방안을 마련하고 녀석에게 질문을 던졌다.
“도훈아, 혹시나 싶어 묻는 건데… 너 나 좋아하냐?”
“……네?”
“아니, 그냥 묻는 거야.”
내가 생각해도 너무 무신경한 질문이었다. 좀 더 돌려서 말해 볼 걸 그랬나….
“풉…! 하하하…!! 뭐예요! 갑자기!! 크흡……! 아, 저 지금 혹시 놀림당하고 있다거나 그런 거 아니죠?”
아, 역시나. 이런 반응이 나올 것 같더라니. 나는 예상 했던 반응을 하는 녀석의 모습에 속으로 안도했다. 대책을 마련하는 것도 쓸모없을 것 같긴 했지만, 진짜 이런 반응이 나오니 오히려 기분이 다 나쁠 지경이었다. …나, 그렇게 매력 없나? 딱히 이성으로 보길 원한 건 아니었지만 반휘혈도 그렇고 이 자식도 그렇고 이성적으로는 좋아한다는 반응이 아니니 자신감이 나날이 하락세를 달릴 기세였다.
‘이제 앞으로 이런 쪽으로 나서지 말아야지….’
나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며 앞에 있는 음료수를 벌컥 들이켰다.
“아… 진짜. 저 누나 진짜 좋아하지만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그리고, 저 휘혈이한테 미움받고 싶지도 않고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근데, 너 가만 보면 휘혈이도 엄청 좋아하더라…? 늘 휘혈이, 휘혈이… 너 혹시…?”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가능성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한도훈의 얼굴이 떫은 감을 먹은 것처럼 구겨졌다.
“…음. 아니구나. 미안.”
그리고 그 표정에서 바로 답을 찾아낸 나는 바로 사과를 입에 올렸다. 이 녀석은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한텐 굉장히 솔직한 놈일 뿐이란 걸 깨닫자 멋쩍어졌다. 그래서 나는 슬쩍 말라 오는 입에 다시 음료수를 축이며 시선을 피하며 말을 돌렸다.
“어…, 그러니까….”
어휴,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볼이 따끔할 정도로 노려보는 시선에 나는 삐질삐질 땀을 흘렸다. 그러다가 곧 자신이 씻지 않았다는 사실에 생각이 뻗친 나는 이곳에 온 목적 중 하나를 상기시키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맞아. 화장실이 어디랬지? 갑자기 씻고 싶어지네?! 하하.”
“…저쪽이요.”
한도훈은 그런 내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다 손가락으로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나는 그 문을 확인하곤 가방을 챙겨 들고 후다닥 자리에서 이탈했다.
달칵, 한도훈이 말한 곳으로 들어간 후 난 문을 닫고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휴, 그래도 저 녀석이 날 좋아하지 않을 거란 예감은 틀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역시 내 감이 완전히 죽은 건 아니라고 위로하며 나는 씻기 위해 앞을 보곤 입을 쩍 벌렸다.
“우와…….”
아니, 화장실이… 이렇게 커도 되나…? 한도훈 방의 거실에서부터 그 위용을 느끼긴 했지만, 설마 화장실마저 우리 집보다 크다니…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에 나는 잠시 정신 줄을 놓았다.
“허억…. 근데 여기서 어떻게 씻어…?”
눈을 데록데록 굴리며 샤워 시설을 찾았다. 다행히 금방 발견은 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식의 설비 시설에 나는 낭패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들어왔던 욕실의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저기… 도훈아?”
“? 누나 안 씻고 뭐 해요?”
한도훈은 다른 곳을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나는 목적을 꺼내기 앞서 조금 부끄러워졌다. 마치 시골에서 막 상경한 촌놈이 현대의 신식 문물을 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스스로의 꼴이 민망했지만, 그렇다고 씻는다고 해 놓고 안 씻기도 뭐하지 않은가. 나는 차오르는 수치를 무릅쓰고 당당하게 나서기로 했다.
“나… 욕실 사용법 좀….”
“……네?”
“아니이… 다 처음 보는 거라…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어….”
실은 컴퓨터나 스마트폰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게 바로 나였다. 요즘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스마트폰 하나 적응하는 데도 오래 걸렸던지라 이런 문명화된 욕실을 눈대중으로 바로 사용할 만큼 똑똑한 편도 아니었다. …그리고, 결국 스마트폰도 기본적으로 남들이 사용하는 수준에만 머무르는 게 다였다. 사실, 이 세계에 와 놓고 2G폰을 사용하는 것에 불편한 것도 있었지만 이런 아날로그적인 게 오히려 제 마음을 더 편하게 만들었다면… 믿겠는가.
“푸핰…! 큽…!!!!! …!!!!!”
그러나, 안타깝게도 난 한도훈을 무릎 꿇게 만드는 데 결국 성공했다. 나는 공허한 눈으로 어느 장인이 세심히 기울여 만든 것 같은 천장을 보며, 소리 없이 배를 부여잡고 쓰러져 가는 녀석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
한도훈이 진정되고 채 가시지 않는 웃음기를 참아 가며 해 준 설명을 받은 나는 인상을 구긴 채로 샤워를 했다.
‘…두고 봐라. 한도훈.’
왠지 굴욕을 받은 기분이었다. 무슨 용도인진 모르겠지만 한도훈이 친히 추천해 준 이름 모를 제품들까지 야무지게 다 사용하고 머리까지 다 말리고 나오자 나보다 빨리 샤워를 마친 한도훈이 무언가를 마시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다 씻었어요? 틀리지 않고 잘 사용하셨죠?”
“어… 음. 아마도?”
솔직히 말하자면 한도훈이 이 제품은 뭐고, 이 제품은 이런 용도라고 하면서 뭐라 뭐라 했지만 너무나도 생소한 이름들에 거의 흘려듣고 사용했다. 그래도 순서라도 기억하고 있는 나를 칭찬해 줬으면 좋겠다고 조용히 스스로를 위한 변명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거 선물해 드릴게요. 전부터 생각했지만 누나는 너무 관리를 안 해요. 아, 스킨이랑 로션도 가져가세요.”
“어…? 안 그래도 되는데….”
“됐어요. 손님을 빈손으로 보내는 거 아니라잖아요?”
아니, 거참… 이 배운 놈 같으니…. 방금까지 불쾌했던 감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오히려 부담마저 느껴지는 그 고가의 선물들을 떠안게 생겼다. 나,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 불안했지만 어쨌든 비싼 게 분명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사용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냥 포기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 차라리 엄마 쓰라고 줄까…. 엄마 로션 다 떨어졌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 그럼 고맙게 받을게.”
“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한도훈에게 감사를 전했다.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지만, 신경 써 줘서 챙겨 준다는 데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나는 만족스레 웃는 녀석을 향해 같이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그래도 이곳에 온 목적을 잊은 건 아니었다. 내가 바로 본론을 꺼내자 한도훈은 잠시 눈을 크게 뜨다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누나도 성질 참 급한 것 같아요. 저 누구 집 초대한 거 처음이라구요? 좀 느긋하게 있다가 가면 덧나요?”
“오, 그래. 그것 참 영광이구나. 하지만 오해할 것 같으니깐 그만 수작 부리고 본론으로 가는 게 어떨까?”
나는 녀석의 말에 장난스레 대꾸하며 짓궂게 웃었다. 그러자 한도훈은 이런 반격은 예상 못 했던 모양인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누나한텐 못 당하겠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리고 한도훈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누나는, 휘혈이에 대해서 얼마나 알아요?”
“나? 음….”
그것 참… 난감한 질문이었다. 나는 그 말에 대해 잠깐 고민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해야 되지? 한도훈은 오랜 시간을 반휘혈과 알고 지냈다. 아마 내가 알고 있는 사실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자리에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는 거다 보니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아, 말하기 곤란했을까요? 음… 그럼 휘혈이 집안 사정 알아요?”
한참을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니 한도훈이 그런 내 난처한 기색을 눈치챘나 보다. 그래서 녀석이 질문의 범위를 좀 더 좁혀졌다. 나는 이번 질문도 어렵긴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돌려 말할 수준은 되었기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 아버지 쪽?”
두루뭉술한 대답이었지만 한도훈은 그 답에서 무언가를 유추하는 데 성공했나 보다. 한순간 녀석의 눈이 놀랍다는 듯 커졌지만 곧 납득한 것처럼 수긍했다.
“그거면 거의 다 얘기한 거네요. 휘혈이가 진짜로 누나 많이 좋아하나 봐요.”
“…그런가?”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타인에게서 직접 듣는 사실은 새삼스레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도 상대방을 오래 알고 지냈던 사람에게서 듣는다면 더더욱 말이다. 나는 민망하게 뒷목을 주무르며 잠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한도훈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