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39화 (39/306)

39. 난처한 부탁 (5)

“알다시피 휘혈이는 정말 말이 없잖아요. 그래서 저도 부모님 통해서 아는 게 대다수예요. 휘혈이가 말을 먼저 꺼내는 일은 거의 없거든요. 그래서 휘혈이가 누나한테 직접 얘기했다는 건 진짜… 누나에게 관심이 많다는 거죠.”

한도훈은 무언가를 많이 함축된 듯한 말을 내뱉었다.

“제가 괜히 오해하는 게 아닌 거, 알고 계시죠?”

…모를 리가. 오죽하면 이런 방면으로 둔한 저조차도 의심했다가 창피한 상황이 올 뻔했는데…. 나는 한도훈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 휘혈이랑 누나가 사귀는 관계가 아니더라도 줄곧 친했으면 좋겠어요.저 휘혈이가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는 거 정말 처음 보거든요.”

한도훈이 저를 빤히 바라보며 담담히 말을 꺼냈다. 나는 어떤 말도 없이 그런 녀석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쳤다.

“누나, 둘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휘혈이 봐주면 안 돼요?”

녀석의 눈썹이 애처롭게 숙여졌다. 나는 그 말에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딱히 봐주고 말 것도 없는데….”

실제로 그랬다. 이 문제는 그냥 반휘혈 혼자 멋대로 굴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리고 난 거기에 휘둘려지고 있을 뿐이었다. 아, 솔직히 녀석이 한 막말은 좀 상처였긴 했지만 말이다.

“그럼 걔도, 누나도 왜 그렇게 화를 낸 거예요?”

“음… 그건 말이지….”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서이수에게 이미 이야기한 내용이었지만, 여전히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꺼내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반휘혈의 가정사를 알고 있다면, 이야기는 좀 더 수월히 흐르지 않을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곧 마음을 잡고 입을 열었다.

“도훈아, 실은 말이지… 그게, 반휘혈이 내 동생이 되고 싶어서 그런 거야.”

“……네?”

“동생 되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한도훈이 내 말에 무언가를 잘못 들은 것 마냥 의아해하길래 나는 단호히 못을 박았다. 그리고 한도훈은 그런 내 말을 천천히 곱씹듯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다물더니 곧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동생, 이라고요?”

“그래. 근데 내가 아직 동생으로 안 받아 줬다고 하니깐 지금 삐진 거야.”

“……삐, 삐져요? 걔가…????”

녀석은 갈수록 오리무중에 빠진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어쩌니. 그게 현실인데…. 솔직히 나도 마냥 잘못한 게 없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아… 물론, 내가 오해의 여지를 남기긴 했어.”

“네?”

한도훈의 혼란은 좀 더 박차를 가할 모양이었다. 녀석이 얼굴을 찌푸리며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려는 게 보일 정도였다.

“휘혈이 최근에 우리 집에서 잤거든.”

“아, 그렇…, 네?!”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얘기였는지 한도훈이 기겁했다. 나는 그런 녀석이 반응을 우선 무시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데리고 온 건데…. 어, 우선 먼저 그 전에 우연히 내가 걔를 밖에서 만났다? 그래서, 얘기를 하다 보니깐 동생이 되게 해 달란 고백을 들었어. 그리고 난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 근데, 알다시피 걔네 집이… 좀, 막장이잖아?”

확인차 말을 띄우자 한도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걸 확인하고 재차 입을 열었다.

“걔가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것 같길래 난 우리 집에 와도 된다고 했거든. 그리고 반휘혈은 그걸 승낙했고. 그래서 얼결에 집에 데려갔지. 근데, 생각해 보니깐 집에 데려올 마땅한 핑계가 생각 안 나더라고…? 상상해 봐. 체육관에도 잘 오지 않는 서이수 친구를 내가 어떻게 알고 데려오겠어. 게다가 이수랑 별로 친해 보이지도 않아. 그럼 내가 무슨 변명을 하겠어. 너무 할 게 없어서 내 동생 삼은 애라고 설명을 해 버렸지. 근데 내가 어쩌다 보니 깜빡하고 아직 동생으로 안 받아 줬단 말을 안 해 버렸지 뭐야….”

“아하….”

한도훈은 점점 정황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는지 점점 납득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만족스러워 보이는 건 아니었다. 마치, 별로 알고 싶지 않은 현실을 겨우 받아들인다는 쪽이랄까? 그러나 이게 진실인 걸 어떡하니? 나도 별수 없었다고….

“그러다 보니, 오늘 낮에 그런 꼴이 일어나 버린 거지….”

“…그러니까, 누나는 아직 휘혈이를 동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반휘혈 혼자서 설레발쳤다는 거죠? 그리고 누나는 까먹고 그 오해를 방치했고요.”

오. 정답. 나는 검지손가락으로 한도훈을 가리키며 그의 간략한 정리에 감탄했다. 역시 공부 잘하는 놈은 다르구만? 요약정리 참 잘하네.

“하… 저 좀 혼란스러운데요….”

하지만 한도훈은 내가 감탄하든 말든 얼굴을 두 손으로 깊게 쓸어내리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 한숨 속에서 그의 복잡한 심리가 그대로 보일 지경이었다.

“걔가… 그렇게 유치한… 그런 짓도 하는구나….”

“걘 원래 유치했어.”

인사부터 메시지로 툭툭, 던지는 것 봐. 그게 어린애 같은 행동이 아니고서 뭐겠어? 나는 시큰둥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앞에 있던 음료수를 들이켰다.

“아니, 전, 하아…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 진짜 휘혈이 동경하거든요?”

아, 그래? 나는 새로운 사실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그동안 한도훈이 반휘혈, 반휘혈 노래 부른 걸 떠올리곤 바로 납득했다. 어쩐지… 그래서 그렇게 개무시를 하는데도 계속 붙어 다닌 거구나?

“그래서 저 지금 환상이 좀… 깨진 기분이에요….”

한도훈은 그러고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번쩍 고개를 들더니 억울한 듯 외쳤다.

“아시잖아요, 누나? 반휘혈이 저희 또래랑 다르게 엄청 성숙해 보이고, 엄청 강하고! 또 잘생겼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

내가 보기엔 어리긴 매한가지였지만 또래에 비해 성숙한 거나, 인물 좋은 거나 강한 건 매우 인정하는 바였다.

“그래서, 저 진짜… 어렸을 때부터 쭉 휘혈이 동경했어요. 휘석이 형도 멋지긴 했지만… 휘혈이는 진짜 저한테 있어서 우상 같은 거였다고요. 그거 알아요? 휘혈이가 저보다 더 똑똑해요.”

…휘석? 낯선 이름에 한순간 호기심이 피어올랐지만 뒤이은 한도훈의 말에 나는 살짝 눈썹을 들어 올렸다. 반휘혈이 한도훈보다 똑똑하다고? 그러나 나는 바로 납득했다. 실은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사실이었다. 그래, 보통 인소 남주나 서브남주는 다 똑똑한 법이지. 별 대수롭지 않은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한도훈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원랜 걔가 전교 1등이에요. 걘… 아저씨, 그러니까 반휘혈은 아버지가 싫어서 일부러 오답 노리고 빵점 맞거든요. 진짜 미친놈이죠?”

오… 이건 새롭다. 진짜 미친놈인데…? 나는 그 저주받은 것만치 엄청난 재능에 짜게 식은 얼굴이 되었다.

“걘 진짜 완벽한 놈이에요. 그래서, 그래서, 전 늘 걔랑 비교됐고…. 오해하지 마세요. 전 휘혈이랑 비교돼서 열등감 가지는 게 아니니깐요. …아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긴 한데요…. 아무튼, 전 걔가 늘 완벽해서 그런 어린애가 부릴 고집 같은 건 하지 않을 줄 알았어요.”

나는 한도훈의 말을 말없이 들었다. 한도훈과 반휘혈은 오랜 기간 봐 오던 사이다 보니 한도훈도 자기 나름대로 무언가 많이 쌓여 있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한도훈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바라보자 한도훈은 뭔가 허탈한 듯 웃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렇구나, 걔도… 걔도 그런 부분이 있었구나….”

그리고 한도훈은 입을 꾹 다물었다.

“도훈아….”

“누나.”

결국 복잡해 보이는 녀석이 걱정이 돼 내가 녀석에게 말을 걸 때 한도훈이 잠시 내렸던 시선을 들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역시 다시 부탁할게요.”

한도훈은 마치 기쁜 듯, 괴로운 듯 웃음 지으며 간절히 입을 열었다.

“…휘혈이랑, 잘 지내 주시면 안 될까요?”

***

나는 멍하니 내 방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왠지 속이 심란해 눈을 감고 싶지가 않았다.

한도훈은 반휘혈과 내가 잘 지내길 간절히 바라는 것 같아 보였다. 한도훈에게 있어서 반휘혈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로 인해 그 이미지가 어긋난 것 같아 보였지만 헤어질 때 한도훈이 짓고 있던 건 어쩐지 후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대체 두 사람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마 지금의 나 자신으로선 알 수 없는 부분일 거다. …두 사람이 입을 열지 않는다면, 평생을 걸쳐 알 수 없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잘 부탁한다고 했지만… 반휘혈은 지금 우리 집에 없는데….”

집에 돌아왔을 땐 엄마의 말대로라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아, 이 집으로 오진 않겠구나. 하고 반사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제 앞으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만큼 우리들의 관계는 얄팍한 관계였다. 서이수를 통해 만났지만, 막상 그 서이수도 반휘혈과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리고 연락처 하나 있다고 해서 자주 연락하는 사이도 아니었다. 가끔, 정말 가끔 길에서 마주쳐서 인사하는 사이. 그게 바로 우리들의 관계였다. 요 몇 주 사이에 그 관계가 급변하긴 했어도 그렇다고 강한 유대감이 형성된 건 아니었다.

“그리고 난 걔가 어디 갔는지도 모르고….”

솔직히 난 반휘혈에 대해서 그리 잘 알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가정사 좀 알고, 대충 이런 성격이겠구나, 하는 수준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단 낫지만 그렇다고 잘 안다고 하기엔 애매한 사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걔를 찾으러 나선다고 해도 못 찾을 확률이 더 높았다. …그래도 연락을 해 보는 게 좋을까? 그런데 한다고 해서 받기라도 할까? 나는 옆에 놓인 핸드폰을 흘끔 바라보았다.

눈 딱 감고 던져 봐?

나는 입을 삐죽 내밀며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옆의 핸드폰을 낚아채고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어휴… 한도훈이랑 괜히 얘기했어.”

이놈의 인소 이야기에 그리 깊게 관여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름 아끼는 동생의 부탁을 거절할 만큼 매정하지도 못한 게 나였다. 쯧. 이렇게 손해 보는 성격은 아빠를 닮은 건가. 나는 한탄 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방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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