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인소에 갇혀버렸다 !-120화 (120/306)

120. 여자 주인공의 삶은 고달프다. (6)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여기 앉으세요, 여기!”

여자 주인공은 불현듯 손님인 우리들이 너무 서 있었단 걸 이제야 자각했나 보다. 그녀는 서둘러 자리를 안내해 주며 방글거리는 웃음을 가득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원하는 거 잔뜩 시키세요! 제가 쏠게요!!”

일행과 함께 얼떨떨히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가 눈을 잔뜩 빛내며 말했다. 난데없는 말에 나는 깜짝 놀라 여자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럴 필욘 없는데…?”

보아하니, 알바를 하는 모양인데 학생의 돈을 뺏을 정도로 궁핍하진 않았다. 특히 체육관이 아이들 덕분에 흥하기 시작한 뒤론 매출이 올라 덩달아 용돈이 오르기도 했고, 걔네들이 부자라 돈 쓸 일이 많이 없어 내 주머니는 언제나 여유가 가득할 정도였다.

“에이, 그래도 받아 주세요. 제가 진짜 고마워서 쏘는 거예요. 언니 아니었으면 저 진짜 큰일 날 뻔한 거잖아요.”

“아, 뭐… 그렇긴 한데. 그래도 열심히 번 알바비잖아. 마음만 받을게, 마음만.”

열일곱 살에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라면, 집안에 나름 사정이 있을 터였다. 아니면, 서이수처럼 아빠의 일을 도와주는 걸 수도 있지만….

‘역시 여자 주인공이라 그런지 안 좋은 쪽으로 생각이 드네.’

집안이 가난했던 출신도 여럿 있다 보니 별별 걱정이 다 들었다. 별일이 없으면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우리들의 식비가 큰일이었다.

“에이, 저 그 정도는 살 수 있어요! 마음껏 드셔도 돼요!”

“너 계산서 보고 후회한다? 어? 진짜 후회해.”

진심이었다. 고등학생 여학생들의 식욕은 왕성하다. 아마 이 아이도 같은 여학생이니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일 거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그 왕성한 식욕을 한참 뛰어넘는다는 게 문제였다. 그리고 내 옆에 앉아 있는 고찬영도 포함이었다.

“그래. 예쁜 아가씨. 여긴 이미 내가 사기로 약속했거든.”

예, 예쁜…?? 나는 닭살 돋는 호칭에 홱, 하고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고찬영은 상에 팔꿈치를 옆으로 기댄 채, 손등으로 턱을 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엇, 그래도…!”

“미안하지만 양보는 할 수 없어. 몰래 결제하면 화낼 거니깐, 알겠지?”

싱긋, 고찬영이 예쁘게 웃었다. 절대로 양보하지 않겠단 고찬영의 태도는 확고했다. 그 의지는 여자 주인공에게도 제대로 전달됐는지 그녀는 몸을 움찔 떨더니 실망한 듯 고개를 떨어트렸다. …딱히 누가 약속한 적은 없었지만, 눈치 없이 끼어서 사실대로 말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혜인과 안경희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야말로 감사 인사를 정말 제대로 하고 싶었는데.”

화사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우울해졌다. 손을 꼼지락거리며 눈썹을 모으는 게 참으로 동정심이 일게 했다. 나는 난처한 마음에 머리를 긁적이며 하는 수 없이 웃으며 하나의 제안을 꺼냈다.

“정 그러면 매점에서 과자나 하나 사 줘. 딱 그 정도면 돼. 후배님.”

이름을 몰라서 적당한 호칭이 떠오르질 않았다. 대충 그녀를 부르며 달래자, 그녀가 고개를 확, 올렸다. 그리고 한순간에 빛을 되찾은 그녀가 환히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매점에서 가장 비싼 거 사 드릴게요!!”

“아니, 난 적당히 싼 게…,”

“여기, 주문요~.”

“네! 이따 다시 얘기해요, 언니!”

타이밍 좋게 말이 끊겼다. 여자 주인공은 희희낙락한 기세로 주문한 손님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런데 빠르게 멀어지려던 그녀가 문득, 몸을 세우더니 다시 내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 그리고 전 주연희라고 합니다. 서이나 선배님!”

…아니, 내 이름을 어떻게? 불시에 불려진 이름에 놀라 그녀를 보았으나, 그녀는 금세 내가 있는 테이블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부엌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좇으며 어리벙벙하게 눈을 깜빡였다.

‘……설마.’

방금 여자 주인공의 이름을 들었다는 건 지금 이 순간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도 그녀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단 사실이 문제였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은 하나였다.

이 세계에서 가장 정보에 둔감할 것 같은 인물이 내 이름을 안다? 그 뜻은 그 둔한 정보력조차 앞지를 정도로 내 이름이 교내에 유명해졌단 사실뿐. 그것을 깨닫자 나는 밀려드는 자괴감에 얼굴을 두 손으로 덮으며 괴롭게 중얼거렸다.

“……애들아, 나 그렇게 유명해?”

“…너무 새삼스럽지 않아?”

내 질문에 고찬영이 확실하게 대답을 내리꽂았다. 나는 책상에 그대로 엎어지며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머리끝까지 뒤덮으며 얼굴을 감쌌다.

“수치스러워. 창피해. 죽고 싶어….”

반은 공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작은 중얼거림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제대로 깨닫고 싶지는 않았어! 정말 쥐구멍에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 프로 선수라는 이름에 먹칠한 것도 정도가 있지, 방금 내 선수로서의 프라이드가 완전히 박살 났다. 나는 몰려오는 수치에 갑자기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졌다.

“친구님…?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 응?”

“이나야, 배 아파? 무슨 일이야?”

“어, 아, 아파? 나, 나 배탈약, 위장약, 두통약 있는데…!”

…아니, 잠깐. 나는 친구들의 다정한 걱정을 듣다 말고 안경희를 보았다.

“그걸 다 들고 다닌다고?”

“어? 어, 응…. 호, 혹시나 싶어서.”

그, 그렇구나. 나는 예상치 못한 안경희의 철저한 준비성에 당황했다. 나도 지난 생의 버릇이기도 하고, 서이수의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니 연고나 반창고를 자주 들고 다녔기에 이해는 한다만… 저 정도로 챙기진 않아서 잠깐 놀랐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책상에 엎어졌다.

“멀쩡하네?”

내가 다시 엎드리자 목도리로 감싼 내 머리를 콕콕 건드렸다. 나는 그 손을 가볍게 쳐 내며 중얼거렸다.

“잠깐만 이러고 있게 해 줘….”

잠시 이 수치스러운 기분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목도리 안으로 좀 더 파고들며 혼자만의 시간을 요청했다.

“흐음.”

고찬영이 콧소리를 흘리며 내 말에 반응했다. 무슨 의미인진 알 수 없어 조금 불안해지려는데, 고찬영이 불쑥 물었다.

“우선 주문부터 할까. 떡볶이는 몇 인분?”

“당연히 4인분.”

“다른 건?”

“순대, 어묵 각 2인분. 김밥 한 줄. 참치김밥도 한 줄. 그리고….”

고찬영의 질문에 내 입에선 자동반사적으로 줄줄 대답이 흘러나왔다. 멈추지 않고 메뉴를 줄줄 말해 주자, 고찬영이 알겠다며 내가 말한 모든 메뉴를 주문했다.

“부족하면 더 시킬 거야?”

“아니, 디저트 먹어야 해.”

“그거 좋지.”

고찬영이 내 말에 유쾌한 듯한 어조로 수긍했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눈을 빼꼼 내밀어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질문 끝났어?”

“큽, 흠흠. 어, 끝났어.”

“그럼 메뉴 나오면 말해 줘.”

“흨, 크흡, 어, 알았어.”

왠지 나와 눈이 마주친 고찬영이 웃음이 터진 것 같았지만 그는 웃음을 참으며 손수 목도리를 내 머리끝까지 고이 덮어 준 후 내 머리를 부드럽게 토닥여 줬다. …왠지 어린아이 취급당한 건 기분 탓일까? 묘한 기분에 내 얼굴이 구겨지는데,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아, 신경 쓰지 마.”

“아니, 진짜 뭔데?”

누가 봐도 사진 찍는 소리였다. 그리고 무엇을 찍었는지는 뻔했다. 나는 쓰고 있던 목도리를 내리며 고찬영을 불만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그가 다시 목도리를 올려 줬다.

“야, 그만 올려!”

“왜, 그렇게 있고 싶다며.”

뭘까, 이 기분. 분명 배려해 주는 게 맞는데 왜 이렇게 짜증 나지…? 나는 결국 그 쓸데없는 배려에 벌떡 허리를 세우며 소리쳤다.

“아, 일어날게! 일어난다고!”

“크흡, 으하핫! 흐하하하핰!!”

끝내 고찬영의 웃음보가 제대로 터지고 말았다. 그는 배를 부여잡으며 이번엔 나 대신 테이블 위로 쓰러졌다. 게다가 이혜인마저 입을 틀어막고 웃고 있었다. 유일하게 웃지 않고 있던 이는 이 상황을 쫓아가진 못한 듯 어리둥절해 있는 안경희뿐이었다.

“아, 진짜 친구님 너무 재밌어. 흐핫.”

내가 그런 두 사람을 불만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자, 차츰 웃음기를 거둔 고찬영이 눈가를 닦으며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나는 그 핸드폰을 샐쭉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뚱하니 입을 열었다.

“방금 너 나 찍었지.”

“응.”

아주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모습이었다. 그래, 거짓말 안 하고 좋네….

“뭐 볼 거 있다고 찍어?”

“재밌잖아. 귀엽기도 했고.”

“귀, 귀엽…????”

내 귀가 이상해진 모양이었다. 뜬금없는 낯간지러운 칭찬에 내가 팔을 쓸며 소름 돋아 하자, 고찬영은 이혜인과 안경희에게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했나?”

“어, 응? 어… 음. 나도 귀엽다고 생각하긴, 했지….”

“…실은 나도.”

고찬영의 물음에 이혜인은 말을 버벅이는 것도 잠시, 곧 고개를 끄덕였고, 안경희도 그의 말에 동조했다.

“그렇다니까? 하여간 친구님은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아. 구경하는 재미가 있어.”

나는 그 감상에 퍼뜩,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 그러니까 나 지금 재롱떠는 동물인 건가.’

기분이 나빠졌다. 그 불만을 억누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뾰로통하니 볼을 부풀리고 있자, 찰칵, 하는 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우이씨, 그만 찍어, 이 자식아!! 그리고 그거 지워!!”

“싫은데~.”

“아, 찬영아. 나 방금 사진들 보내 주라.”

“좋아.”

“어? 나, 나도…!”

“내 의견은? 내 의견은!!!”

불시에 찍힌 사진을 지우라 항의했으나 전부 묵살당했다. 게다가 이혜인과 안경희마저 합세해 사진을 얻어 가려 했다. 갑자기 느껴지는 소외감에 내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항의해 봤으나, 슬프게도 내게 관심을 주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흐흠~.”

한참 나를 공기 취급하며 놀리던 고찬영이 돌연 짓궂은 웃음을 깊게 덧그렸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낯이었으나, 현재의 내 눈엔 그 미소가 그저 이 장난스러운 상황의 연장선인 줄 알았다. 분위기상으로도 그랬고 말이다.

…그러나, 그 미소가 의미한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캐물어 봐야 했다고 머리를 감싸 안게 되는 건, 지금으로부터 약 1시간 30분 후의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