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여자 주인공의 삶은 고달프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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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을 가득 채우던 음식을 1시간에 걸쳐 다 비워 냈다. 확실히 이혜인의 추천대로 맛있었다. 입도 즐겁고, 배도 즐거워진 난 만족스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우리가 먹는 양에 놀라워하던 주연희가 정신을 차리며 내게 불쑥 핸드폰을 내밀었다.
“저, 저기, 어, 언니 핸드폰 번호…! 받을 수 있을까요!”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그녀를 바라보다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곧 결심이 선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흔쾌히 떨어진 대답에 긴장이 어려 있던 주연희의 얼굴이 환해졌다.
사실 거절도 할 수 있기야 했었다. 굳이 친해질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그런데 왜 번호를 주었는가, 하면 그 이유는 꽤나 간단했다. 그녀가 나와 같은 피처 폰 동족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같은 기종은 아니었지만, 요즘 들어 주위에 스마트폰을 가진 놈들만 보다가 오랜만에 나와 같은 동족을 만났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이 들어 선뜻 받아 준 게 컸다. 굉장히 단순한 논리였지만, 내 사고방식이 단순한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 괜찮았다.
‘또 알아 둬서 나쁠 것도 없고 말이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비를 위해서라도 모르는 것보단 알아 두는 게 더 이득이기도 했다. 다만, 깊게 엮이고 싶진 않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부딪힐 일이라면 그냥 당당히 부딪히는 게 훨씬 나았다. 머리도 안 아프고 얼마나 좋은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일 열심히 해~.”
“네, 언니! 학교에서 봐요!!”
주연희는 식당 밖까지 나와 배웅을 해 주었다. 그녀의 눈이 기쁨으로 가득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그 나이대를 연상케 했다. …역시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열일곱 살이었다. 앞으로 닥칠 그녀의 미래가 어떻든 간에 부디 저 눈빛이 흐려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설핏 들었다.
하지만 쉽진 않겠지.
‘제 친구들을 도와주세요!’
2학년이 된 첫날의 등굣길, 내 귓가에 이명처럼 남았던 그 소리. 그동안 잊고 살았던 그 목소리가 어쩐지 내 귀를 맴도는 것 같았다. 나는 주연희를 빤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연희야.”
“네, 언니!”
그녀를 부르자, 기쁜 듯한 대답이 곧장 튀어나왔다. 나는 그런 주연희를 보며 잠시 입을 달싹였으나, 이내 작게 미소를 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추우니까 어서 들어가.”
“언니 가는 거 보고 들어갈게요. 히히.”
주연희가 배시시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태도만큼은 너무나도 강경해 보여 나는 어쩔 수 없이 먼저 몸을 돌리려다가 불쑥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아, 맞아. 너 다음부턴 함부로 누구 때리면 안 돼. 너 나중에 큰일 난다.”
지금까지 조용한 걸 보면 최강혁은 딱히 주연희에게 괴롭힘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간혹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돌발적인 행동이 괘씸해 괴롭히는 장면도 있었기에 이 부분은 참 다행이었다. 그래도 혹시 또 그런 일이 일어나도 되는 건 아니었다. 물론, 폭력 자체가 좋은 방법도 아니었거니와 다음번은 최강혁이 참는다는 보장도 없었고, 교내의 그의 팬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 그건…! 저, 저도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친구가 너무 무시당하는 게 분해서 그만….”
그런 내 조언에 주연희가 고개를 숙이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뭘 어떻게 무시를 당했는데?”
“어…. 그, 그게….”
도대체 얼마나 무시했길래 뺨을 때릴 정도였나 문득 궁금해졌다. 호기심에 질문을 던지자 그녀는 잠시 망설이며 주위의 눈치를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 쓰레기 당장 내 눈앞에서 치워…, 라고.”
“음.”
역시 최강혁. 그의 싸가지는 역시 보통 싸가지 없음이 아니었다. 나는 그 대사를 했을 최강혁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라졌다.
“그, 근데, 거기서 제 친구가 그냥 받아 주기만 해 달라고, 안 먹어도 좋으니깐 받아만 달라고 했는데요….”
어라, 안 끝났네? 나는 이어지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제대로 듣고 있다는 행동을 보여 주자 이혜인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와락, 얼굴을 구겼다.
“아, 그래? 하면서 비웃더니 눈앞에서 선물을 밟아 버려 가지고…! 그게, 그게 너무 화나서!!”
주연희는 그때를 떠올리면서 다시 화가 도졌는지 주먹을 꽉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 속엔 왠지 모를 분함이 섞인 듯도 해 보였다.
“쓰읍….”
난 그 얘기를 다 듣고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힐끔 옆에 있는 이혜인을 보았다.
만약, 내가 주연희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 새끼는 죽었다.’
십중팔구 손바닥이 아니라 발차기가 날아갔을 거다. 분명. 이 새끼가 거절할 거면 곱게 거절할 것이지. 밟아? 그것도 눈앞에서, 처참히?
“그거 참 개자식이네.”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고찬영이 불쑥 내뱉은 총평이었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었다. 나는 격한 공감의 뜻으로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와, 최강혁 성격 안 좋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진짜 안 좋구나…. 성격 대박.”
그리고 이혜인도 질색한 듯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라도 내 친구님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했는데 그렇게 차이면 가만 안 둘 듯. 그냥 죽여 버렸을지도?”
거기에 고찬영이 사뭇 진지하게 한마디를 살벌히 더 얹었다. 그 말을 잠자코 듣던 이혜인이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돌아봤다.
“너 최강혁한테 지지 않았어…? 그게 가능해?”
언뜻 시비로 보이는 말이었으나, 악의는 없었다. 순전한 호기심이 어린 그 내용을 고찬영도 느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는 그 말에 개의치 않고 태연한 모습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맞지. 하지만,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지.”
“어?”
나는 고찬영의 말에 그를 돌아봤다. 그리고 안경희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의아한 눈이었다. 그야 당연했다.
보통이라면, 억울하게 진 사실을 조금이라도 꺼내는 게 정상이었으니까.
고찬영은 최강혁에게 진 사실을 그다지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지난번에 내가 리벤지를 하지 않을 거냐고 물었을 때도 그렇고, 그 결과에 너무나도 산뜻하게 수긍하는 그 모습이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진짜 이상한데.’
입학식부터 최강혁에게 결투를 신청하러 왔던 그 호승심 넘치는 패기는 어디로 던져 버린 걸까. 수상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눈을 가늘게 뜨며 고찬영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를 잠시 바라보고 있길 몇 초, 돌연 고찬영이 뜻 모를 미소가 내게 향했다. 그러곤 그는 기지개를 쭉 켜며 몸을 반쯤 돌린 채 내게 윙크하며 장난스레 말했다.
“뭐, 아무튼 그런 거지. 이제 정말 슬슬 가는 게 어때?”
“…그래.”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한 번 든 의심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나는 다음을 기약하며 이따가 단둘이 있을 시간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또 봐요, 언니!”
자리를 옮기려 하자, 주연희가 밝게 다시 내게 인사를 해 왔다. 정말 몇 번을 봐도 주위를 환히 밝히는 미소였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이번에는 손을 흔들어 마주 인사해 주며 그녀를 뒤로했다.
그리고, 그 당시의 나는 알지 못했다.
멀지 않은 아주 가까운 시일, 그녀의 환한 미소가 한순간 꺼지게 되는 일이 생기게 될 것이란 걸. 그때는 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
“이제 노래방 가자, 노래방!”
어느 정도 떡볶이집에서 거리가 멀어질 즘, 고찬영이 불쑥 외쳤다. 그 말에 이혜인이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좋아!”
“나도 좋아.”
마침 배도 적당히 꺼지게 할 것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그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던 이혜인은 신이 났는지 발걸음이 한층 경쾌해졌다. 그런 와중, 내 눈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안경희가 눈에 포착됐다.
“어, 어…. 나, 노래 못 부르지만! 그, 그래도 탬버린은 열심히 칠게!”
“에이,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원래 노래방은 노래 잘 불러서 가는 게 아니야.”
이혜인이 안경희의 팔짱을 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눈을 빛내며 주먹을 쥐며 호기롭게 말했다.
“그냥 즐기는 거지!”
“말 잘했네. 맞아, 즐거우면 된 거야.”
고찬영도 이혜인의 말에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지만, 너 노래 엄청 잘 부르지?”
인소 세계의 일진들이 누군가. 특히 싸움 잘하는 미남 중에 노래 못 하는 놈은 없었다. 단언하다시피 한 내 말에 고찬영은 씩, 짓궂은 미소를 짓더니 코웃음을 즐겁게 흘리며 말했다.
“흐흠~ 과연 어떨까? 그러는 친구님은 어떤데?”
“못해.”
그의 질문에 즉답해 줬다. 사실이었다. 나는 노래를 정말 못한다. 그렇지만 노래방은 좋아한다. 이혜인의 말대로 즐거우면 그만이었으니 말이다.
“에이, 이나 너 랩 잘하잖아!”
그때, 이혜인이 내 말에 바로 반박해 왔다.
“오오?? 친구님, 랩 잘해?”
“와…! 드, 듣고 싶어!”
그러자 그녀의 말을 놓치지 않은 두 사람이 눈을 빛냈다. 나는 그 관심이 부담스러워 눈을 피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건 그냥 하는 거고. 평범해, 평범.”
“그, 그래도 할 수 있는 거잖아.”
“나 랩 잘하는 여자애는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진짜 궁금한데?”
“아, 설레발 좀 치지 마! 그냥 평범하다니까 그러네….”
왠지 볼이 화끈거렸다. 별거 아닌데도 띄워지는 분위기가 민망해 볼을 문질렀다.
“아, 근데 이거 걔네들도 아나?”
“걔네?”
그게 누구냐. 뜬금없는 고찬영의 물음에 오히려 내가 되묻고 싶어졌다. 그러자 고찬영이 싱긋, 웃으며 대답해 줬다.
“왜, 반휘혈이나 한도훈, 이런 애들.”
“아~ 걔네들?”
갑자기 그 녀석들이 왜 나오는 거지? 의아했으나, 난 곧 고개를 저었다.
“휘혈이는 알아도 도훈이나 다른 애들이랑은 노래방을 안 와서 모를걸.”
서이수는 동생이었으니 패스였다. 친가나 외가가 뭉칠 때 한 번씩 노래방에 가기도 했었기 때문이었다.
“흐음~. 그거참…. 뭐, 됐나.”
고찬영은 내 말에 의뭉스런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짓궂은 웃음을 깊게 그리더니, 핸드폰을 꺼내 툭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라, 잠깐.’
나 저 표정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느껴지는 위화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중,
“오~ 이게 누구야. 그 미친 들개 아니야?”
이죽거리는 듯한 거슬린 음성이 내 발을 저절로 세우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