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 히로인, 대위기! (2)
“-!!”
주연희는 화들짝 불에 덴 것처럼 몸을 움찔거렸다. 반사적으로 옆을 보자, 커다란 손이 바로 얼굴 옆에 있는 것이 보였다. 주연희는 덮치듯 커다랗게 펼쳐진 손에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
그런데 아프지 않았다. 아니, 닿아 오는 흔적조차 없었다. 주연희는 고통이 엄습하지 않음을 느끼고 의아함에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허공에 멈추어진 듯한 손이었다.
그녀의 뺨에 닿기까지 겨우 몇 센티미터 남짓한 거리였다. 그 손은 발견했을 때부터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듯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싶어 슬쩍 시선을 올리자 정태우와 시선을 마주쳤다. 흠칫, 하고 굳자 정태우는 그녀가 아닌 허공에 멈춘 제 손을 잠시 동안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눈동자만이 서이수를 향했다.
“아까부터 뭔 개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네, 시발.”
그에 서이수는 지지 않고 정태우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눈살을 한껏 구기며 시야가 흔들리는 게 겨우 정신을 되찾은 듯한 모양새였다. 하나 서이수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운이 나쁜 게 잘못이라니. 존나 병신 같은 말이라 웃음도 안 나온다.”
“…….”
정태우는 손을 주머니에 꽂으며 말없이 허리를 들어 올렸다. 별거 아닌 동작이었지만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져 주연희는 움찔 떨었다. 반면 서이수는 전혀 기죽지 않은 채로 그 눈동자를 강하게 쏘아보며 으르렁거렸다.
“쟤랑 내가 왜 잘못이야? 누가 봐도 잘못은 네가 하고 있잖아, 정태우. 한 대만 쳐도 뼈 부러질 애를 치니까 좋냐, 어? 좋아? 막 즐겁냐고. 이 변태 새끼야.”
그러곤 그는 한껏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이죽거렸다.
“존나 양심도 없네. 너 혹시 이렇게 비겁하게 살아왔냐? 너보다 훨씬 약한 놈들만 짓밟고 살아왔냐고. 거참, 대단한 새끼네.”
“…….”
스윽. 그 말에 김율이 살짝 움직였다. 그러자 정태우는 한 손을 빼 김율을 보지도 않고 막아 세웠다.
“도련님.”
“됐다, 마.”
“하지만,”
그의 제지에 김율이 항의하듯 입을 열었다. 하나 정태우는 고개를 돌려 그를 똑바로 보며 싸늘히 입을 열었다.
“됐다고.”
차가운 명령이 주위를 압도했다. 김율은 강압적인 경고에 잠시간 그를 보다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물러섰다. 정태우는 그에 깔끔히 시선을 돌려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서이수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그 앞에 서며 무감하게 중얼거렸다.
“니도 참 겁도 없이 나불거린다. 내 소문은 하나도 안 들어 봤나?”
서이수는 그가 다가오자 흠칫거렸으나 꾹 입을 다물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모르면 내가 널 어떻게 알아봐?”
겁을 먹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게 한껏 부라리며 대꾸하자 돌연 정태우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것도 맞제.”
그러더니 웃음을 싹 지우며 서이수의 어깨에 텁, 발을 올렸다.
“그래서, 니 할 말이 대체 뭔데?”
“…….”
“이렇게 겁도 없이 나대는 덴 다 이유가 있는 거 아니겠나.”
꽉-. 정태우의 발에 힘이 실리며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분명 밟힌 건 어깬데 어쩐지 폐가 짓눌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서이수는 떨려 오는 숨을 고르며 뒤로 감추어진 주먹을 꽉 쥐었다. 하나 그 얼굴만은 당당히 미소 지으며 그를 똑바로 마주한 채 호기롭게 입을 열었다.
“때릴 거면 차라리 날 때려. 그게 보기에도 훨씬 낫지 않겠어?”
그 당돌한 말에 정태우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러곤 돌연 고개를 숙이더니 낮은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큭큭, 존나 약한 새끼가 말은 많아 갖꼬.”
그렇지만, 그가 히죽 입꼬리를 올리며 허리를 숙이고 서이수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 눈깔 하난 맘에 드네.”
꿀꺽. 서이수는 한껏 가까워진 그의 얼굴에 긴장 어린 침을 삼켰다. 위험한 맹수가 코앞에 있는 긴장감에 본능적으로 몸이 굳었다. 하나 그는 그 얼굴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눈에 힘을 주었다. 그 눈빛에 정태우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게 소원이면 들어줄게.”
단,
“니가 버틸 때까지다.”
오싹, 서이수의 등골에 한기가 퍼졌다. 몸이 공포로 잘게 떨렸으나 그는 턱을 악물며 참아 냈다. 그러곤 허세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날 새도록 때려야겠네. 이래 봬도 맷집은 자신 있거든. 누구 씨에게 하도 맞고 살아서 말이야.”
“하하. 그거 좋네.”
서이수의 배짱에 정태우가 유쾌하게 웃음을 흘렸다. 하나 그것도 잠시, 그는 곧 싸늘히 눈을 내리깔더니 날카로운 미소를 덧그리며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그럼 버텨 봐라. 조커 동생.”
종언과도 같은 말이 꽂히고 서이수는 이를 악물었다. 동시에 그의 어깨를 짓누르던 발이 그곳을 강타했다.
퍽-!!
“흡…!!!!!”
어깨가 박살 날 것 같은 충격에 눈앞에 섬광이 번쩍이는 듯했다. 하나 연이어진 턱의 고통에 그는 신음도 흘리지 못하고 뒹굴었으며 복부를 걷어차는 발길에 강제로 몸이 붕 떠 버렸다.
우직-.
“커…!”
섬뜩한 소리와 함께 그의 눈이 한순간 뒤집혔다. 180이 한참 넘는 거구가 종잇장마냥 힘없이 굴러다니는 모습에 그것을 지켜보는 주연희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만, 그만…둬. 그, 그만하란 말이야….”
그녀의 눈에서 공포로 인한 눈물이 슬금슬금 새어 나왔다. 주연희는 불합리하게 폭력을 당하는 서이수의 모습에 고개를 저으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정태우를 말렸다. 하나 정태우는 그녀의 목소리 따위 들리지 않는다는 것처럼 무자비한 폭력을 이어 갔다.
“제, 제발 그만…, 제발 그만해…!!”
속절없이 울면서 말려도 소용없었다. 옆에 있는 남자도, 무분별한 폭력을 날리고 있는 이도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유일한 그녀의 편은 그녀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 서이수뿐이었다.
“커, 크…억…!”
엄습하는 고통에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서이수는 입을 벌렸다. 하나 폭력은 끝나지 않았다. 이대론 정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머리를 지배했으나 그만하라고 외칠 수가 없었다. 그래선 안 된다고 그의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흠.”
고통에 몸부림을 치면서도 항복을 외치지 않는 그의 모습 때문일까, 정태우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미 갈비뼈 두 대는 나갔을 텐데도 살려 달라 구걸하지 않았다. 보통 이쯤에 대부분 눈물 콧물 흘리며 빌붙었으니 말이다.
“말뿐인 허세는 아닌가 보네.”
피식, 그는 웃음을 흘리며 여전히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발을 들어 올렸다.
그때였다.
끼이익-.
육중한 철문이 열리는 소리에 정태우는 올리던 발을 반사적으로 멈추었다. 그와 함께 김율도 고개를 돌려 찾아온 손님을 보곤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오셨군요.”
“-쳇.”
정태우가 혀를 찼다. 마치 성가신 손님을 맞은 것처럼 신경질적인 태도였다. 그는 올리던 발을 성의 없이 내리곤 몸을 돌렸다.
“이수야, 이수야! 괜찮아?!”
“크, 으…!”
그에 주연희가 몸이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앞으로 내밀며 그의 상태를 물었다. 발만 안 묶여 있었다면 이미 나갔을 그녀였으나 결박된 몸이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초조한 듯 입술을 물어뜯으며 조금이라도 그에게 다가가려는데 그녀의 귓가로 낭랑하고 고운 미성이 들려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또각, 또각. 가벼운 굽 소리와 함께 귀를 현혹하는 무게 있는 목소리였다. 주연희는 저도 모르게 이 창고에 들어선 이를 보았다.
“어….”
그러곤 그녀는 반사적으로 탄성을 내뱉었다. 거기엔 어둡고 칙칙한 이곳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붉은 머리의 아름다운 여성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들을 구제해 주러 온 아름다운 천사와도 같았다.
“다, 당신은….”
그리고 주연희는 그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최강혁의 약혼자…?”
지난 체육 대회에서 보았던 그 얼굴이었다. 주연희는 왜 저 사람이 여기 있는 걸까, 의문이 들었으나 지금은 그런 질문을 던질 때가 아니었다.
“여기 위험해요! 어서 도망가세요-!!!”
주연희는 급박하게 소리쳤다. 저 여성분마저 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절박히 외치는데, 백장미가 눈을 천천히 깜빡이더니 턱을 살포시 괴며 고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머나, 착해라.”
그러더니 그녀는 웃는 미소를 단 채 차분히 주연희에게로 다가왔다.
“여기 오시면 안…! 안… 어?”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왜 그녀의 등 뒤로 방금 전, 밖으로 쫓겨났던 깡패들이 보이는 걸까.
“…….”
“…….”
그리고 왜 이 두 사람은 가만히 그녀를 보고 있는 걸까. 주연희는 그제야 이상함을 깨달았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천사같이 아름다운 여성은 제 앞에 당도해 있었다. 얼이 빠진 얼굴로 백장미를 올려다보자 그녀는 싱그럽게 웃으며 주연희의 얼굴에 손을 대었다.
“근데 너무 주제 파악을 못한다.”
톡톡, 가벼운 손가락의 두드림이 주연희의 볼을 건드렸다.
“그리고… 넌 왜 이렇게 멀쩡할까?”
주연희는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오싹하니 굳었다. 어떤 말도 못 하고 떨리는 숨만 내뱉으며 얼어 있는 사이, 백장미는 시선을 올려 정태우를 보았다.
“겨우 이것밖에 안 해 놓은 거야? 너무 실망인데.”
“하. 겨우 이것밖에 안 해 놔서 미안하군.”
백장미의 친근한 어조에 정태우는 당장이라도 토악질을 할 것처럼 얼굴을 구기며 대충 대꾸했다. 그러자 백장미는 숙였던 허리를 펴며 자신의 한쪽 볼을 감쌌다.
“아니, 괜찮아. 어차피 네가 고분거릴 건 그리 기대도 안 했으니까.”
백장미는 정태우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맹수를 우리에 가둬 두고 쇠사슬로 묶어 놨다고 해서 그 맹수가 바로 조련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백장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주위를 훑었다.
“그런데 때리는 것밖에 하지 않았다니, 너무 단순하지 않아?”
그녀는 짐짓 실망했다는 것처럼 안타까이 중얼거렸다.
“내가 주문한 건 겨우 이런 게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