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2일 차의 편돌이 (1)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개꿀잠을 잤다. 얼마나 개꿀잠을 잤는지, 어젯밤 근무하며 겪은 경험들 모두가 백일몽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럴싸한 추론이기도 했고 말이다. 아니, 세상에 뱀파이어나 드래곤이 어디 있냐고. 없으니까 만화로도 만들고,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고 그러는 거 아니겠어?
근데, 꿈은 아니었다. 결코.
왜냐면 증거가 버젓이 있어서 그렇다. 어제 자기 전에 마신 포션병이 덩그러니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으니까.
병을 집어서 입구에 대고 냄새를 맡아봤다. 솔솔 단내가 나고 있다.
“…약빨 죽이네.”
조금 남아있던 잠기운마저 다 날아가 버린지라, 한번 생각을 해봤다. 지금 시간이 9시 10분이고 남은 시간 동안 뭘 하냐.
컴퓨터는 그래픽카드 터져서 방치해 둔 지 오래고, 있는 노트북은 지뢰찾기도 렉이 걸리는 똥컴이다. 피시방 가서 게임 한두 판 하면 딱 적당할 시간이지만, 게임은 죄다 접은 지 오래고….
못하는 것들을 하나씩 지우다 보니 할 게 출근밖에 남질 않았다. 그래서 양치하고, 머리 감고, 적당히 말린 다음에 밖으로 나왔다.
4월 말의 밤거리는 살짝 서늘하게 느껴졌다.
옷을 좀 얇게 입고 나오긴 했다. 편의점 일하다 땀 차면 찝찝해서 그렇다. 몸 쓰는 일이 아니라 땀 찰 일도 없는 게 정상이긴 한데, 이 편의점엔 하도 괴랄한 양반들이 많이 오다 보니 식은땀 흘리는 경우가 좀 잦더라.
더해서, 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내가 사는 곳이 수도권이긴 한데,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동네라 유독 사람이 적다.
편의점은 그 동네 안에서도 특히 사람이 적은 사거리에 위치해 있었는데, 근처에 새로 도로가 뚫려서 상가며 사람이며 다 그쪽으로 몰려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의점 주변 거리엔 특히나 행인이 없다. 행인은커녕, 사람 쓰라고 만들어진 도보 위를 길고양이 두 마리가 유유히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편의점 앞에 잠깐 멈춰서서 생각해봤다. 여기 나만 보이는 건가?
점장에게 물어볼 수 있는 건 점장에게 물어보고 말 텐데, 이 문제는 점장이라 해도 답을 알 것 같진 않았다. 여기서 일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여기가 이 세상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정도는 내가 알아둬야 하지 않겠는가.
근데 거리에 붙잡고 물어볼 사람이 없다. 길고양이 놈들은 관심도 없는 것 같고. 당장 풀 수 있는 의문 같지도 않아서 일단 들어갔다.
들어섰는데, 매장 상태가 좀 이상했다.
“이 모든 게 다― 잠깐 생각해 보면 막상~”
“?”
“어, 찬이 일찍 왔네?”
점장이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는데, 이게 대체 뭔 소리냐? 이 모든 게 다 뭐?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 같아~”
“왜 이렇게 일찍 왔어?”
“할 게 없어서요. 근데 이 소리 뭡니까?”
“너는 뭐랄까, 한 마리 나비와 같아~”
“응, 손님이 물건 고르면서 노래 부르고 있어.”
왜?
대답하는 점장의 목소리는 느긋했다. 별 신경 안 쓰는 눈치라 나도 일단은 가만히 있어 봤다.
얼마 안 있어 노래를 부르던 손님이 카운터로 캔커피 하나를 가져왔는데, 손님은 여자 하피였으며, 털이 수북한 귀 안쪽에 선이 이어져 있었다. 이어폰 꽂고 있나 보다.
더해서 이 하피 여편네는 멀쩡히 팔이 달려 있다. 어제 날아다니던 하피들은 팔이 있어야 할 위치에 날개가 달려 있었던지라 의아했다. 탈부착 식인지 뭔지….
“날아가버린 넌 요즘 뭘 할까―”
“1,100원이세요. 담아드릴까요?”
코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하피를 마주하면서도 점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작은 봉투에 캔커피를 담아 카드와 함께 들려주자, 하피는 귀에 꽂은 이어폰을 한번 매만지고는 나가버렸다.
문이 닫힌 걸 확인한 뒤 점장에게 물었다.
“얼굴 보면 취한 거 같진 않았는데, 여기가 노래방도 아니고 왜 저런답니까?”
“하피분들이 좀 자유분방하시거든. 하늘을 날아다녀서 그런가 봐.”
“저 손님은 날개는 안 달려 있던데 말입니다…….”
“하피분들이 항상 날개 달고 다니시진 않지. 안 그러면 일상생활 못 하잖아.”
“그럼 탈부착식인 건가?”
“신체 변환. 중학교 필수 과목이야.”
확실히 피타고라스의 정리보단 저게 훨씬 도움될 것 같긴 하다. 생각하고 있자니, 점장이 약간 걱정된다는 얼굴로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찬아, 올 때 별문제는 없었어?”
“네? …아, 네. 별문제 없었어요. 그냥 들어왔는데.”
“사람들이 눈치는 안 줬구?”
“아예 사람 없는 동네라 눈치 볼 사람도 없었어요. 점장님께서 뭐 하신 게 아니세요?”
“난 한 거 없는데? 지금 밖에 한번 봐봐.”
보래서 봤다. 내가 왔던 사거리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이종족들이 돌아다니는 그 도심지 사거리의 그 광경이었다. 들어올 땐 내 세상이었는데, 들어와서 보니 딴 세상이야. 이게 뭔?
“찬이 출근하겠다 싶을 즈음 뭘 해보려고는 했어. 잘됐을진 모르겠지만… 아.”
점장이 말을 멈췄다. 손님, 아니. 손놈이 와서였다.
드워프였는데, 어제 그 양반들이랑 비슷하게 생기긴 했으나 수염 땋은 모양새가 달랐다. 그러니 똑같은 담배를 피우지도 않을 거고. 또 스무고개 하게 생겼다.
“담배 줘.”
첫 번째 힌트. 일단 담배다.
“네, 어떤 걸로 드릴….”
“찬아, 일찍 왔는데 앉아서 잠깐 쉬고 있어. 내가 받을게.”
점장이 날 만류하고는 드워프의 얼굴을 슬쩍 보더니, 담배 진열대에서 담배를 집어 내밀며 말했다.
“이거 드리면 될까요?”
점장이 집은 게 골든 리프. 담배 중에서도 몇 없는 6,000원짜리 고가 담배인데, 왜 비싼지는 나도 펴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
받아 든 드워프는 살짝 고개를 갸웃하다 끄덕이고는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담배 두 갑을 더 꺼내 주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스름돈을 계산하는 점장. 방금 본 광경이 하도 신기해서 물어봤다.
“점장님. 저 손님 담배 뭐 달라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이것도 마법인가?”
“에이, 마법을 왜 써. 마력 아깝게.”
“그럼 팁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별건 없고, 담배 사는 손님이 말이 없다 싶으면 그 손님의 눈을 한번 봐봐.”
눈은 또 뭔. 타짜야?
“담배 사러 카운터 오는 손님은 진열대에서 자기 담배 어딨나부터 찾으니까. 슬쩍 보면 딱 시선이 고정되는 곳이 있어.”
“어제 드워프 한 분은 자기가 피우는 담배 이름도 모르시던데, 그런 경우엔요?”
“그런 경우는 어쩔 수 없고. 그래도 드워프 손님들이 돈이 많아서, 대체로 비싼 담배들을 많이 피셔. 좀 더 넓게 보면, 얇은 담배들.”
아저씨 손님들이 얇은 담배 많이 태우기는 한다. 얇아서 피우기 좋은가 봐.
외에도 군인들은 PX에서 싸제 담배 못 산 게 한이 된 건지, 휴가 외박 나올 때마다 해외산 담배는 다 털어가는 편이고.
점장이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 어제 담배 사 간 드워프 손님 담배 한번 맞춰볼까?”
“굳이?”
“나 심심하단 말야. 12시간 내내 여기에만 있었다구.”
나이는 모르겠지만 참 주책이시다. 점장은 양손 검지를 옆머리에 각각 가져다 대고는, 텔레파시를 하는 시늉을 내다 중얼거렸다.
“스페셜 골드?”
“두 분이셨는데, 다른 한 분은 뭐 사가셨게요.”
“…그렇다고 무조건 얇은 것만 피우는 것도 아니니까… 혹시 저거 아니야?”
진열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는데, 어제 사 갔던 담배가 맞았다.
“오메. 이제야 점장님이 마법사라는 게 실감이 납니다.”
“이게, 너 혼날래.”
꿀밤을 때리려고 하길래 쫄아서 몸을 움츠렸다. 씨익 웃은 점장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뱀파이어분들은 거친 담배 좋아하시구. 원체 고통을 잘 안 느끼시는 손님들이라, 자극적인 게 좋으신가 봐.”
“허어….”
“외에도 코볼트분들은 향 독특한 것들 많이 피우시구, 고블린분들은 신상만 찾구. 신상 피우는 게 이득이라 생각하시는 것 같아.”
계속 듣고 있으면 꿀팁이 되겠다 싶었다. 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담배 피울지는 나도 때려 맞출 수 있지만, 이 동네는 손님들이 사람이 아니잖아.
생각하는 와중에 또 손님이 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침 오셨네요. 고블린 손님.”
이번 고블린은 동전 300개를 가져와 진상을 부리진 않았고, 담배 사러 온 것도 아니었다. 들어와서는 얌전히 도시락 코너를 뒤적거리다가, 샌드위치며 햄버거며 품에 안아 잔뜩 들고 와서는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누가 봐도 봉투 없이 들고 가긴 힘들 물량이었다. 바코드를 다 찍은 점장이 고블린에게 물었다.
“12,800원이세요. 봉투에 담아드릴까요?”
물었으나, 고블린은 딴청을 부리며 카드만 내밀어 온다.
점장이 재차 물었으나 고블린은 대답하지 않았고, 점장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계산을 끝마쳤다. 그때서야 고블린이 말해온다.
“봉투에 담아줘.”
이런 경우 꼭 있어. 담아주냐고 몇 번이나 물어봐도 대답 없다가, 계산 끝나고 나면 봉투 달라고 그러는 거.
이 경우에 계산하기가 참 난감해진다. 봉툿값이 20원인데 10원짜리를 들고 다니는 손님이 있을 리도 없거니와, 카드로 20원 결제하는 것도 우습잖아. 메시지에 ‘어디어디 편의점 결제 20원’이라 찍힐 텐데.
정말 잠깐 까먹어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재차 물어봐도 대답이 없었을 경우엔 보통 음습한 의도가 숨어있다.
“봉툿값 20원이세요.”
“20원짜리 없는데. 그냥 주면 안 돼?”
“카드 결제하셔도 괜찮아요.”
“카드 20원을 결제하기도 그렇잖아. 그러게 미리 물어보지.”
“여쭤봤답니다, 손님. 두 번 정도.”
“난 못 들었어.”
옆에서 보는 내가 암이 걸릴 지경이다. 허나 점장은 미소를 띤 얼굴 그대로였다. 저게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여쭤본 거 맞아요, 손님. 저도 옆에서 들었고.”
암 걸리기 싫어서 옆에서 거들었다. 고블린은 흐리멍텅한 건지 예리한 건지 모를 눈빛으로 날 바라보다, 못마땅한 듯 품에 한 아름 산 물건을 안고는 중얼거렸다.
“쩨쩨하게, 그놈의 20원이 뭐라고.”
지금 그 20원 주기 싫어서 수작 부리는 거 아니야? 내 눈엔 그런데.
고블린이 투덜대며 나간 뒤, 점장에게 물었다.
“점장님은 봉툿값 같은 건 신경 안 쓰실 줄 알았습니다.”
“나도 원래는 잘 신경 안 써. 근데, 저 손님은 좀… 얄밉잖아. 속도 빤히 보이고.”
“고블린 하면 속 좁은 놈들이다― 라는 이미지였는데, 이런 건 이세계라고 크게 다를 건 없네요.”
내 말을 들은 점장은 제법 놀란 얼굴이 되었다.
“어? 찬이 네 세상에도 고블린이 있어?”
“없죠. 대신 사람들이 상상으로나마 생각한 이미지가 좀 있는 편이라서.”
그런 거 있잖은가. 고블린은 대체로 욕심 많고 성격 더러운 놈들이고, 켄타우로스들은 별자리 보고 사주팔자 잘할 것 같고, 엘프들은 오래 살고, 오만하고, 이쁘고 멋지고 그런 거.
“와. 신기하네.”
“저도 직접 보니 신기하긴 해요. 그렇게 상상하는 데에 다 이유가 있나 봐.”
“얘기하니까 재미있네. 그런 이미지들이 다 들어맞는 편이야?”
“다는 아니고요. 가령….”
말 도중에 손님이 들어와, 또 중간에 말을 멈춰야 했다.
이번 손님은… 어제 본 손님이었는데, 어제 했던 소리를 또 하기 시작했다.
“소주 어딨어?”
“저쪽 주류 코너 한번 보시겠어요?”
술 취한 엘프, 그 놈이다. 어제도 주류 코너 위치가 어디라고 알려줬던 것 같은데, 그새 까먹은 모양이다. 비틀비틀 걸어가는 엘프를 바라보던 점장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 손님은 딱 봐도 취하신 것 같네….”
“제가 받을게요.”
어제 비록 욕을 처먹긴 했지만 나름 잘 대처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번에도 내가 받지, 뭐.
잠시 후 엘프가 집어 온 게 소주 한 병. 계산대에 올려놓고 묻는다.
“사장님, 오늘은 마시고 가도 되지?”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안 됩니다, 손님. 불법이라니까요.”
“아니. 내가 산 거 내가 먹고 간다는 게 대체 왜 불법인데!”
“이것도 어제 말씀드린 거지만, 여기가 어른분들만 오는 곳이 아니잖습니까?”
“해가 진 지가 언제인데, 뭔 애가 오냐고 지금 시간에!”
그야 모르는 일이지. 야자 끝낸 애들이 잠깐 들를 수도 있잖아?
외에 엘프가 여러 말을 씨부렁댔으나, 흘려들었다. 흘려들으며 느낀 게, 말이 제법 유창했다는 점.
어제보단 덜 취한 것 같긴 했지만, 덜 취한 정신으로 똑같은 소릴 하고 있으니 더 열이 뻗쳤다. 내 머릿속 이종족들 중에 그나마 이미지가 좋은 게 엘프였는데, 이 머리 벗겨진 엘프가 그걸 다 박살 내고 있다.
“차라리 어제처럼 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컵 받으시고….”
“싫은데? 이거 나 무시하는 거잖아, 엘프라 무시하는 거 아니냐고!”
“제가 엘프를 왜 무시합―”
“너 임마, 옛날이었으면 너네 인간 놈들은 숨도 못 붙이고 살았어, 알어?”
“예?”
어째 이야기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새는 것 같다?
이후에도 엘프의 입에서 좀 이상한 이야기들이 연달아 튀어나왔다. 먼저 시비를 건 건 네놈들이면서 왜 우리가 더 피해를 봐야 하냐느니, 너희 같은 놈들은 전쟁에서 다 죽어버렸어야 한다느니, 등등.
왜 내가 이딴 소릴 들어야 되는지 쥐뿔 모르겠어서, 답답한 마음에 점장을 힐끗 쳐다봤다. 점장은 포스기에 손을 올리고 꾹 뭔가를 누르고 있었다.
“손님, 잠깐만 기다리십쇼. 점장님, 뭐 누르고 계신 겁니까?”
“응, 신고 버튼.”
“…예?”
순간 정적이 흐르고, 점장은 무슨 일이냐는 듯이 대꾸했다.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