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42화 (42/468)

42화. 별궁 한의원 오픈 (2)

무진장 바빠졌다.

개업 대박 때문이었다.

별궁이 북적북적해졌다. 환자, 아니, 고객님들이 몰려온 덕분이었다.

‘이래서 장사는 오픈빨(?)이지!’

라키엘은 쾌재를 불렀다.

뭐든지 오픈빨이 중요한 법이다. 싸움으로 치면 선빵필승. 가수로 치면 신곡 발표 첫날 음원 성적. 그런 첫 포문을 가늠하게 해주는 게 장사의 오픈빨이다.

이후에 뒷심이고 성적 유지고 뭐고. 일단 오픈빨을 최대한 크게 봐야 한다. 오픈빨이 작으면 뒷심도 함께 작아지는 법이니까.

한데 지금은?

‘대박이야.’

절로 어깨가 뿌르르 떨렸다. 그런 탓이었을까. 진맥을 받느라 이쪽에게 손목을 잡혀 있던 환자가 움찔했다.

“아이그머니, 죄, 죄송…… 황송, 아니, 송구…… 죄송합니다, 전하!”

새치가 드문드문 난 아주머니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무리 무료로 진료를 해준다고 해도. 신분과 재산을 구분하지 않는다 해도.

그럼에도 여기가 별궁이라서. 이쪽이 황태자라서. 그 사실들이 전해주는 부담감과 압박은 여전히 떨치지 못했나 보다.

하지만 라키엘은 내색하지 않았다. 구태여 괜찮다 라거나, 그러지 말라는 살가운 당부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반응이 더 부담스럽겠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 심리다. 부담스러워하지 말라는 말이 더 부담스러운 법이다.

대기업 회장님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부담스러워하지 말게나 허허허’라고 웃으면, 그 웃음과 마주한 사원의 부담감이 참으로 잘도 덜어지겠다.

그래서였다.

라키엘은 그저 빙긋 웃었다. 아주머니의 반응을 보지도 못한 것처럼 굴었다.

“다행히 맥은 정상이고. 요즘 아침저녁으로 재채기가 계속 나오고, 코가 뻐근하게 아프고, 눈물이 계속 줄줄 나온다고 했죠?”

“네, 네…… 전하.”

이쪽의 살가운 대화법에 아주머니가 더욱 긴장했다. 황태자에게 듣는 존칭이라니. 당황스러울 거다.

하지만 라키엘은 굳이 일부러 말투를 바꾸지 않았다. 자신에겐 이게 편했다. 제법 오랜 시간을 한의사로 살았던 자신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이곳에서 오픈한 한의원 진료실. 이 공간에서 환자와 마주하게 되니?

마치 직업병처럼, 자연스럽게 예전의 살가운 말투가 술술 나왔다. 한의사들에게 가히 필수 스킬이라 할 수 있는 친절과 경청의 상담 모드(?)였다.

“부담 없이 증상만 말하면 됩니다. 지금은 황태자가 아닌 의료인이니까. 그쪽 분은 환자니까. 어쨌건 그 증상, 지금처럼 봄철이 올 때와 가을철에 제일 심해지죠? 매년 그랬죠?”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도 비슷했거든요. 비염입니다, 그거.”

“비염……이요?”

“워낙 고질적인 질환이라 완치는 어려울 겁니다. 대신 증상을 가라앉힐 처방을 해드리죠.”

슥슥슥, 삭삭!

진맥으로 느껴지는 아주머니의 체질. 그 체질에 상성이 잘 맞을 소청룡탕(小靑龍湯) 처방전을 썼다.

“평소에 수분 대사가 좋지 못할 겁니다. 위내정수(胃內停水)라 하여 위장에 물이 고여 있기도 하구요. 그렁그렁 가래 끓는 느낌이 자주 나죠? 특히 뜨거운 국물 음식을 드신 직후에. 맞습니까?”

“네? 네. 맞아요.”

“받게 되실 탕약에는 여러 재료가 들어갑니다. 마황과 계피는 발산작용을 하고, 작약과 오미자가 수렴작용을 해줄 겁니다. 세신과 건강은 거한작용을 해줄 거고요. 마황과 오미자, 감초가 항알러지 작용을 도와줄 겁니다.”

“아, 예…….”

“자, 여기 처방에 쓰인 대로 복용하세요. 복용 횟수와 시간은 꼭 지켜주시고요.”

“감사, 감사합니다, 전하.”

“괜찮습니다. 일단 꾸준히 복용하시고 열흘 뒤에 다시 오세요. 다음 환자분!”

다음 환자가 들어왔다.

그렇게 진맥과 진단을 하고. 침을 맞을 환자에겐 침을 놓아주고. 때론 뜸을 뜨기도 하고. 대부분 탕약 처방을 내려주었다.

수많은 환자들이 오전 내내 그를 거쳐 갔다. 잠깐의 숨 돌릴 틈도 없는 진료의 연속이었다.

‘후아. 어지럽다.’

아직은 저질 체력이라, 간혹 띵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라키엘은 힘껏 참아냈다. 한데 그러던 와중이었다.

딩동!

[당신은 일정 숫자 이상의 환자를 진료하며 충분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이 경험이 토대가 되어 <진맥> 스킬이 한층 개선됩니다.]

[진맥 스킬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오옷.’

혹시나 하고 은근 기대했는데. 역시나 하고 진맥 스킬이 성장했다. 라키엘은 간식 먹자 소리를 들은 강아지처럼 눈을 반짝거렸다.

[스킬명 : 진맥 Lv. 2]

[대상의 맥을 짚어 건강 상태를 진단합니다. 진맥 결과는 <종합검진표>를 통해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신이 일깨운 오장육부가 환자의 같은 부위 오장육부와 상담을 하며 더욱 자세한 병증을 진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뭐?’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쪽이 일깨운 오장육부가 환자의 같은 부위 오장육부와 상담을 한다고? 처음엔 뭔 씨나락 원샷으로 까먹는 소린가 싶었다.

한데 다음 순간이었다.

딩동!

[오장육부가 진맥에 참여합니다.]

[심장이 몸을 풉니다.]

[허파가 심호흡을 합니다.]

[대장이 칠성장어 승천댄스를 선보입니다.]

[간장이 피로회복제를 잔뜩 챙겨옵니다.]

“…….”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한데 더 어처구니가 없는 건, 저렇게 나선 오장육부가 정말로 환자의 오장육부와 상담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심장 : 얘들아, 소개팅이다. 연장 챙겨라.]

[허파 : 설렌다…… 허…… 파학…….]

[대장 : 소개팅은 못 참지 말입니다ㅋㅋ]

[간장 : ……형들 정신 차려! 상대는 할아버지야!]

“…….”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황당함을 곱씹으며 기다렸다.

잠시 후.

딩동!

[오장육부 자체 상담 결과가 나왔습니다.]

[심장 : ……속았다. 심장 이상 무.]

[허파 : 후…… 푸후……. 이상 무.]

[대장 : 경증 변비가 발견됐지 말입니다. 그 외 이상 무.]

[간장 : 이 할배 간염 기미 발견. 술 좀 끊어야겠는데?]

간염? 술?

라키엘은 간장에게 물었다.

‘간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간장 : 어ㅋ 할배 간이 울던데. 10살 때부터 매일 들어오는 알콜 처리하느라 50년째 만성피로라고. 쟤 이대로 5년만 더 있으면 아작나는 거 확정임ㅋㅋ]

……그렇구나.

‘이거 은근 엄청난데?’

라키엘은 새삼 흐뭇함을 느꼈다. 이쪽이 일깨운 오장육부가 직접 환자의 오장육부 상태와 히스토리까지 체크할 수 있게 되었다니. 설마하니 진맥 스킬에 이런 기능까지 생길 줄은 몰랐다.

‘아직 잠자코 있는 다른 오장육부도 마저 깨워야겠어.’

물론 방법은 모른다.

열심히 진료를 하다 보면, 뭔가 계기가 생길 때마다 오장육부들이 깨어나지 않을까.

‘그러면 HP도 더 많이 후원받을 수 있을 거고. 오장육부들이 상담으로 커버할 수 있는 범위도 늘어날 거고. 진맥과 진단도 더 정확하게 할 수 있겠지.’

정확한 진맥과 진단.

그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

의료인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것이 바로 오진이니까. 잘못된 진단을 내려서 잘못된 처방과 진료를 하여 환자의 진짜 병을 치료할 시기를 놓치는 거니까.

“뭐 어쨌건, 어르신. 간이 상당히 망가져 있으시네요.”

“예?”

“그래서 계속 피곤하고 얼굴빛이 누런 겁니다. 간이 지쳐 있으니까요. 일단 소시호탕(小柴胡湯)을 처방해드릴게요. 이렇게 열흘 드셔 보시고, 다음 경과를 봐서 계지복령환(桂枝茯苓丸)도 추가해보는 걸로 하죠. 그리고-”

할아버지 환자를 향한 라키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오늘부로 술은 무조건 끊으셔야 합니다.”

“예에?”

“간이 망가져 있으니까요. 그런데 계속 그렇게 술 드시다간 5년도 못 삽니다.”

“하지만 저는…….”

“술이 없으면 밥이 안 넘어간다고요?”

끄덕끄덕.

할아버지 환자의 고개가 맹렬히 끄덕여졌다. 하지만 라키엘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의료인이 아니라 황태자로서 내리는 명령입니다. 어기면 감옥에 집어넣을 겁니다.”

“…….”

“아시겠죠?”

끄덕끄덕!

할아버지의 고갯짓이 아까보다 맹렬해졌다. 모처럼 권력을 남용(?)한 라키엘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다음 환자를 받았다.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라키엘은 수많은 환자를 받았다. 다행히 상세가 위중한 이는 아직까지 없었다. 대부분이 신경통이거나 관절통, 간이 안 좋거나 감기, 몸살 등으로 찾아온 환자들이었다.

‘그래서 문제야.’

사흘째 진료를 마친 저녁.

라키엘은 그동안의 진료를 돌이켜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보너스 수명을 많이 안겨줄 위중한 환자가 도통 오질 않아서? 그건 아니었다.

‘아직 내 의술에 대한 신뢰가 크지는 않을 테니까. 지금은 그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오는 환자가 대부분이니까. 그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내 의술에 대한 소문이 더 많이 퍼지고, 완치된 환자들의 사례들이 쌓여가면서 차츰 해결되겠지. 그때쯤엔 제법 위중한 환자들도 많이 찾아오게 될 거고. 문제는 그다음이야.’

진짜로 위중한 환자가 왔을 때.

그런 환자들이 많이 오게 될 때.

그들을 안정적으로 간호할 체계를 갖추어야 했다.

‘지금 이대로는 곤란해.’

사흘간 별궁 한의원을 운영해보니 피부로 절감되었다. 가장 시급한 점은 바로 탕약 조제와 환자 간호였다.

‘시녀들에게 탕약 조제를 맡겨봤지만…… 으음…….’

다들 낯선 분야라서 그런지 영 어설펐다.

약재를 다듬는 것도. 보관된 약재의 상태를 주기적으로 살피는 것도. 탕약을 달이며 불 조절을 하는 타이밍을 잡는 것도. 데우고 식히고, 짜내는 일련의 과정들도.

모두 경험과 감각이 필요한 일이었다.

‘한데 그게 잘 안 되고 있어. 계속 시키면 차츰 나아질 거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오고 있는 환자들을 연습 대상으로 삼는 격이라서 찜찜해.’

자칫 잘못 조제된 탕약이 나갈 수도 있다. 그러면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가 입게 된다.

그건 싫었다.

‘게다가 간병이 필요한 환자들이 병동에 잔뜩 입원한 상태가 되면…… 지금 이대로면 그것도 문제야.’

지금이야 시종과 시녀들에게 한의원의 잡일을 맡겨둔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은 궁정의 잡무를 하는 시종 시녀일 뿐. 전문 간호 인력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24시간 환자를 케어할 수 있어야 해. 그걸 위해 교대로 병동에 상주할 전문 간호 인력이 필요해. 아, 이럴 때 김쌤이랑 이쌤 계셨으면 딱 좋았을 텐데.’

한국의 한의원에 계시던 분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여기선 그런 인력은 사치일 뿐이었다.

‘여긴 간호사라는 개념 자체가 없으니까.’

그동안 알아보니 그랬다.

아직 이 세계엔 간호사라는 개념도, 직업도 없었다. 그저 전문 의사들만 있을 뿐. 그냥 의사들이 데리고 다니는 제자나 조수 정도만이 존재할 뿐. 오직 간호와 간병만을 위해 교육을 받은 이들은 아예 없었다.

그게 참 아쉬웠다.

‘어쩔 수 없지. 시녀와 시종들 중에 소질이 있는 사람들을 뽑아서라도 쓸 수밖에.’

쓰려지는 입맛을 다셨다. 밥이나 먹자 싶어 식탁에 앉았다. 한데 첫술을 뜨려는 순간이었다.

“전하!”

덜컹!

갑자기 문이 확 열렸다. 가르딘 경이 다급한 표정으로 뛰어들어왔다. 이유를 묻기도 전에 외쳤다.

“위급환자입니다!”

이쪽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스푼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가르딘 경과 나란히 뛰듯 복도를 걸었다.

“환자는?”

“방금 진료실에 눕혔습니다. 58세의 여성이며, 고열이 엄청납니다.”

“고열?”

“예.”

“…….”

무슨 병증인 걸까. 이야기만 들어선 짐작할 수가 없었다. 고열의 원인이 참으로 다양한 까닭이었다.

‘제발 별일 아닌 거면 좋겠는데.’

내심 바라며 걸음을 재촉했다. 진료실에 도착해보니, 침상에 눕혀진 여인이 보였다.

“저……전하……를…… 뵙습니다…….”

60이 다 되어가는 여인. 나름 귀족가의 사람인 걸까. 원래는 정갈했을 머리칼이 진땀으로 온통 흐트러져 있었다.

“딘라이어 가문의 첫째가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 어머니를 살려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딘라이어 영식이라 스스로를 밝힌 젊은 남자가 애원했다. 라키엘이 물었다.

“언제부터 이랬지?”

“오후부터였습니다. 그전엔 괜찮았는데, 해가 기울 무렵부터 오한이 난다고 하시더니 지금은 이렇게…….”

“흐음.”

딱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호흡이 얕으며 거칠었고, 거의 인사불성으로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라키엘은 딘라이어 부인의 맥부터 짚었다. 진맥 스킬을 사용했다. 오장육부 상담 기능까지 동원했다. 그러는 내내 진심으로 기원했다. 제발 심각한 질환이 아니길. 여기서 자신이 치료할 수 있는 병증이길.

그리고 곧 깨닫게 되었다. 이번만큼은 자신의 기원이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진…… 티푸스.”

마침내 진단하게 된 부인의 병명. 그 앞에 라키엘은 입술을 와락 깨물고 말았다.

발진 티푸스(epidemic typhus).

리케치아(Rickettsia prowazekii) 세균에 감염되어 발생하는 질환. 또한 그것은, 러시아 원정에 나섰던 나폴레옹의 40만 대군을 궤멸시킨 바 있는, 치명적인 급성 열성 질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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