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비고를 털어라 (1)
“발진…… 티푸스.”
라키엘은 짓씹듯 중얼거렸다. 하고많은 열병 중에 하필이면 이거라니. 그는 제발 아니길 바라며 자신의 오장육부, 간에게 물었다.
‘이봐, 진짜야? 확실해?’
[간장 : 진짜로 진심으로 확실한데?]
‘어떻게?’
[간장 : 저 아줌마 간에 출입하는 혈액 속 리케치아 세균이랑 하이파이브 하고 왔는데?]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오장육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환자의 혈액 속에 리케치아 세균이 있다면 확실하다. 발진 티푸스가 맞다.
‘쯧.’
라키엘은 딘라이어 영식을 돌아보았다.
“하나 묻지. 환자가 마지막으로 목욕을 한 지 얼마나 됐나?”
“……예?”
딘라이어 영식이 멈칫했다. 무슨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듯한 기색이었다. 만약 이쪽이 황태자가 아니었다면, 그런 질문이 모욕적이라며 따질 수도 있었으리라.
라키엘은 쓸데없는 오해를 짓뭉갰다.
“환자의 상태를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이야. 어서.”
“아, 그건, 어제도 하셨습니다.”
“어제도?”
“매일 빠뜨림 없이 데운 물로 목욕을 하는 편이시거든요.”
“흐음…….”
매일 목욕을 하는데 발진 티푸스라. 어지간하면 그럴 수는 없을 텐데. 이상했다. 영식에게 재차 물었다.
“그럼 집의 정리정돈 상태는? 특히 침구 상태는 어떻지?”
“깔끔하게 관리되는 편입니다.”
“이나 벼룩은 없고?”
“네. 절대로.”
“그럼 최근 환자분이 이나 벼룩이 있을 법한 환경에서 머무른 적은 없나?”
“음, 아…… 있습니다.”
“언제?”
“보름쯤 됐을 겁니다. 어머니가 친척댁에 다녀오시던 길에 마차가 진창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셨노라 했습니다. 그때 마침 근처에 농가가 있어서…….”
“농가?”
“예. 그 농가에서 하룻밤을 머무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그곳의 부부가 자신들의 침대를 어머니에게 양보했다고 하더군요. 허름하기 짝이 없는 지푸라기를 깔고 그 위에 털가죽을 덮어둔 침대였노라고…… 조금 내키진 않으셨지만 부부의 성의를 봐서 거절할 수 없으셨다고 했습니다.”
딘라이어 영식이 떠듬떠듬 기억을 더듬듯 말했다. 라키엘은 혀를 찼다.
“쯧. 그거구나.”
“예?”
“아마도 환자분은 그때 그곳에서 감염됐을 거야.”
“감염……이라니요?”
단어 자체가 주는 불길함. 그걸 느낀 건지 영식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라키엘은 최대한 차분하게 설명했다.
“환자분의 질환은 발진 티푸스라는 거야. 흔히 장티푸스와 혼동하고는 하는데, 전혀 다른 질환이지. 어쨌건, 이건 사람의 피부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 이(louse)를 통해 감염되는 질병이랄까.”
“이라니…….”
“리케치아 균이라는 게 있어. 그걸 보유한 이가 사람의 몸에 기생 활동을 하며 피부에 배설물을 남기지. 그 배설물에 리케치아 균이 섞여 나와. 그러면…….”
“그러면요?”
“사람은 간지러움을 느끼지. 이가 남긴 배설물 때문에 말이야. 그러면 무의식중에 그 부분을 긁겠지. 그때 손톱에 의해, 눈에도 보이지 않을 아주 미세한 상처가 피부에 생기고…… 그 상처를 통해 리케치아 균이 몸으로 침투해. 감염되는 거지.”
“그런…….”
“때로는 리케치아 균이 들어 있는 이의 배설물이 먼지에 섞여 호흡기로 들어오기도 해. 그나마 다행인 건, 사람 사이의 전염은 되지 않는 것 정도겠군.”
“…….”
상상도 못했던 질환에,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걸렸다는 게 아득하게 느껴지는 걸까. 이제 영식은 대답마저 잃어버렸다. 하지만 라키엘은 문진(問診)을 멈추지 않았다.
“어쨌건, 열이 정확히 언제부터 나기 시작했다고?”
“그건…… 점심까지는 괜찮으셨습니다. 한데 오후에 몸이 춥다고 하시더니 열이 펄펄 끓고…….”
오늘부터 발열이 시작됐다, 라.
그럼 아귀가 딱 맞았다.
‘농가에서 머물렀다는 게 보름 전. 그리고 오늘부터 증상이 발현. 그 사이의 보름이 잠복기였던 셈이네.’
발진 티푸스의 증상 발현 특성과 정확히 일치했다. 라키엘은 쓰려지는 입맛을 다셨다.
‘큰일이다. 환자의 나이가 많아.’
발열이 심했다.
이런 경우엔 어린아이나 고령자가 특히 위험하다. 최악의 경우 폐렴이 발생하거나, 고열에 의한 중추신경의 손상, 혹은 신체 말단이 괴사하는 경우도 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정벌군이 시달렸던 것처럼.’
문득, 역사 속의 사례가 떠올랐다.
19세기 초, 유럽의 패왕으로 군림하던 나폴레옹. 그는 자신에게 거역한 러시아를 침공했다. 그가 동원한 정벌군의 규모는 엄청났다.
보병 38만.
기병 8만.
대포 1천 문.
예비병력마저 무려 10만.
도합 60만 대군이었다.
그중에서 예비병력과 일부를 제외한 40만이 러시아를 침공했다. 한데 폴란드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발진 티푸스가 그의 군단을 덮쳤다.
병사들이 고열에 시달렸다. 온몸에 붉은 발진이 돋아났다. 반쯤 정신이 나가 헛소리를 하다가 쓰러지고 죽어갔다. 그렇게 폴란드를 통과하며 병력의 1/5을 잃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는? 고작 10만 명만 살아남은 상태가 되었다. 러시아 군대와의 전투에서 죽은 이보다, 발진 티푸스에 걸려 죽은 병사가 훨씬 많았던 셈이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지. 정벌에 실패했어. 아비규환 같은 철수작전을 펼쳐야 했지. 그때까지도 발진 티푸스는 계속해서 그의 군대를 괴롭히고 있었고. 그는 생살을 도려내듯 발진 티푸스에 걸린 병사 3만 명을 리투아니아 빌나(Vilna)에 버리고 도망쳐야 했지.’
그렇게 나폴레옹의 러시아 정벌군이 궤멸당했다. 발진 티푸스가 불세출의 패왕을 몰락시킨 셈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지. 비슷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았어.’
15세기 이슬람에 맞서 싸운 스페인의 ‘레콩키스타(Reconquista)’ 전쟁에서도. 16세기 스페인과 프랑스의 전쟁에서도. 오스만 튀르크와 신성로마제국의 전쟁에서도. 독일을 폐허로 만든 30년 전쟁, 그리고 영국 내전에서도.
발진 티푸스는 인간을 학살하며 악명을 떨쳤다.
“후우. 그럼 일단 옷부터 갈아입혀야겠어.”
시녀들을 불렀다.
꼼꼼하게 지시했다.
“환자분의 옷을 벗겨. 속옷까지 전부 다.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온몸을 닦아줘. 머리칼과 체모에 이가 있는지 꼼꼼히 살피는 것도 잊지 말고. 그 후에 환자복을 입히도록.”
“그럼, 벗긴 옷은 어찌하여야 합니까?”
“태워.”
“태우……라고요?”
“음. 전부 빠짐없이. 이 환자가 지금 누운 여기 침상의 침구도 모조리 태워. 그리고 너희도 내가 시킨 일을 마치면 즉시 목욕부터 하고, 지금 입고 있는 옷도 태워 버려.”
“…….”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시녀들의 눈빛. 라키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라도 어긴다면, 즉시 해고하고 죄를 물을 거야.”
“아, 알겠습니다.”
시녀들이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라키엘에겐 이게 당연한 일이었다. 혹시나 환자의 몸에 아직도 이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매일 데운 물로 목욕을 한다지만, 의복이나 침구에 이가 옮겨붙었을 가능성도 있다.
라키엘은 딘라이어 영식을 향해 말했다.
“그쪽도 마찬가지다. 지금 입고 있는 옷도 태워야 하니 당장 다 벗고 목욕부터 하도록. 새 옷은 준비해줄 테니까.”
“예? 아…… 예, 전하.”
“그리고 또 하나. 집에서 쓰는 모든 침구와 카펫, 옷을 세탁하고 햇볕에 말려야 해. 그건 이쪽에서 사람을 보내 알리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전하.”
“그럼 다들 실시.”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라키엘도 곧바로 자리를 옮겨 옷을 갈아입고 목욕부터 했다. 그리고 환자를 위한 탕약을 준비했다.
‘역시 갈근탕(葛根湯)이 좋겠지.’
갈근탕은 탕약 중의 기본에 해당하는 탕이었다. 그럼에도 열성질환에 탁월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갈근의 발한, 해열작용이 뛰어나지. 동물실험에서 해열작용과 뇌혈관 혈류 증가 효과와 관상동맥 확장 효과가 있는 게 입증되기도 했고.’
거기에 함께 들어가는 마황에도 해열효과가 있다. 계지가 그 효과에 더욱 시너지를 불어넣는다. 함께 첨가되는 작약, 대추, 감초에는 자양강장 효과가 있으며, 과도한 발한을 제어하는 부가적인 효능이 있기도 하다.
‘분량은 정확하게. 배합도 빠짐없이.’
1회 복용량을 정밀하게 조절했다. 갈근 8.0g, 마황 4.0g, 대추 3.0g, 계지 2.0g, 작약 2.0g, 감초 2.0g, 생강 2.0g……. 약재들을 정확히 분배하고, 손질했다. 직접 정성껏 달였다. 딘라이어 부인에게 먹였다.
“자, 환자분? 이 약을 마시면 조금 나아질 겁니다. 천천히, 조금 쓰겠지만 천천히 마셔보세요.”
“전하…….”
진땀으로 범벅이 된 부인이 울먹였다.
많이 아픈 탓일 거다.
달래가며 약을 먹였다.
그때부터였다.
하루, 이틀, 사흘. 무려 세 명의 시녀를 그녀에게 간병인으로 붙였다. 8시간씩 3교대. 24시간 빠짐없이 보살피게 했다.
라키엘 본인도 다른 환자들을 진료하는 틈틈이 부인을 살폈다. 수시로 맥을 재고, 열을 체크했다. 탕약에 더욱 신경을 쓰고, 차도를 살폈다.
하지만 부인의 열이 도통 가라앉질 않았다. 갈근탕을 매일 꾸준히 복용하고, 충분한 영양과 휴식을 취함에도 별다른 차도가 보이질 않았다. 아니, 상세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큰일이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약효가 없어. 아니, 약해. 이건 그냥 갈근탕으로 어떻게 될 수준이 아니야.’
입원 나흘째.
딘라이어 부인을 진맥한 라키엘은 탄식을 내뱉었다. 부인의 상태가 입원 당시보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계속되는 고열에 오히려 체력이 소진되고 있었다. 라키엘은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음기가 너무 많이 상했어.’
진맥을 하니 느껴졌다. 아스라한 심법의 마나 진단법으로도 명확히 볼 수 있었다.
부인의 몸속 음기가 말라붙어 있었다. 그 반작용으로 양기가 지나치게 활성화되어 있었다. 뜨겁고 들뜨는 성질의 마나가 온몸의 혈맥 속에서 날뛰는 중이었다.
‘음양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아스라한 심법으로도 느낄 수 있어. 이 균형부터 바로잡아야 해. 그래야 환자의 몸이 갈근탕의 약효를 제대로 받아들이게 될 거야.’
요약하자면? 날뛰는 양기 때문에 약빨(?)이 하나도 들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럼 어떡하지?’
라키엘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이대로 둔다면 환자의 몸속 균형이 더욱 무너질 거다. 그러면 치료의 희망이 사라지게 된다. 죽는 것이다.
‘그건 싫어.’
환자가 죽는 건 싫었다. 게다가 지금 이곳에서 환자가 죽으면? 기껏 한의원을 개업하며 누리게 된 오픈빨에 직격타로 찬물이 뿌려지게 될 것이다.
‘그럼 망하는 거지. 내 한의원에 대한 신뢰도 깨질 거고. 여기 와서 낫는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사람 죽은 곳이니까. 누가 찾아오겠어.’
한의원을 찾는 발길이 뜸해질 것이다. 자신의 계획이 무너지는 셈이다.
환자에게도.
자신에게도.
최악의 결과가 될 것이다.
‘그건 안 돼. 무조건 살린다.’
라키엘은 각오를 다졌다.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고. 절대로 포기할 수도 없다고. 환자도 살리고, 한의원도 살리고. 그렇게 부귀영화의 희망찬 미래를 살려나가겠다고.
다짐하며 더욱 고민했다.
맹렬히 궁리했다.
‘양기가 날뛰는 원인은 음기가 쇠락해서야. 한데 양기를 억누르는 방법으로는? 안 돼. 자칫 그랬다가 양기와 음기 양쪽이 전부 약해져서 신체의 기운 전체가 허해지는 결과가 올 수도 있어.’
체력이 떨어진 상태. 거기에 기혈마저 허해진다면? 순식간에 위중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러니까 결론은…… 음기를 끌어올려야 해.’
음기를 살려줄 방법.
그게 가능할 약재.
무엇이 있을까.
‘지금 보유한 약재들로는 불가능해. 음기가 너무 많이 약해져 있어. 저걸 살리려면 보통의 약재로는 안 돼.’
라키엘의 미간에 더욱 깊은 주름이 파였다. 강력한 음기를 지닌 약재가 필요하다. 혹은 그런 특별한 물건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황궁 비고.’
자연스럽게 결론이 나왔다.
다수의 희귀한 물품, 아티팩트가 보관된 황궁의 보물고. 어쩌면 그곳에 자신이 찾는, 강력한 음기를 지닌 약재나 물건이 있지 않을까.
‘확신할 수는 없어. 하지만 그나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거기겠지.’
자신에겐 시간이 얼마 없다. 환자에겐 더더욱 없다. 며칠만 어영부영 지나고 나면? 금방 상세가 악화되어 위독한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
한데 황궁 비고는?
‘가깝지. 황궁에 있으니까. 게다가 나는 황태자야. 그러니 당장 찾아가도 어찌어찌 출입할 수 있을 거고.’
그는 바로 외출할 채비를 갖추었다.
“가르딘 경? 시종장에게 마차 준비하라고 전해줘.”
“예? 마차라니요? 이 시간에 어딜 가시려고요?”
“황궁 비고.”
“……예에?”
“거기서 찾아봐야 할 게 있거든.”
“하지만 전하. 비고에 출입하려면 출입 절차를 밟아야 할 텐데요?”
“출입 절차?”
“예, 전하.”
가르딘 경이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황궁 비고엔 황제 폐하 외엔 아무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설령 황태자 전하라고 해도 말이지요.”
“그래서, 출입 절차라는 걸 밟아야 한다는 거?”
“예, 전하.”
“그거 복잡해?”
“복잡하지는 않고, 음, 신청 서류를 해당 관리 부서에 제출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비고를 방문하는 목적이라든가, 비고에 보관된 어떤 등급까지의 물품을 열람하겠다든가, 하는 항목들을 작성해서요.”
“그럼 그걸 제출하고 나면?”
“까다로운 심사를 받게 된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황가의 보물을 보관한 중요한 곳이라서…… 어지간한 대귀족들도 심사에서 탈락하기 일쑤라고 합니다. 황족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지요. 게다가 서류를 제출해도 심사 기간이 제법 길다고 들었습니다.”
“얼마나 긴데?”
“최소 한 달은 기다려야 한다고…….”
“…….”
뜻밖의 변수가 생겼다. 까다로운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그게 무려 한 달이나 걸린다니.
‘쩝.’
라키엘은 쓰려지는 입맛을 다셨다. 한 달을 기다릴 여유 따위는 당연히 없다. 그동안 발진 티푸스가 환자를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라키엘은 고개를 들었다.
이런 치사한 방법까지 쓰긴 싫었는데.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가 없겠다. 라키엘의 입가에 미소 한 자락이 슬며시 피어났다.
“그거라면 걱정 마. 방법이 있으니까.”
“방법이라니, 그게 뭡니까?”
“내가 황태자잖아.”
“그래서요?”
“그러니까 써먹을 거야.”
“어떤 걸 말입니까?”
가르딘 경이 의아한 듯 물어왔다. 라키엘의 입가에 서린 음흉한 미소가 상큼하게 빛났다.
“아빠 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