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총력전 (2)
기적이란 무엇일까.
간절히 바라는 순간에 선물처럼 주어지는 결과물일까. 혹은,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절망의 끄트머리에서 건져내는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일까.
딩동!
머릿속에 세차게 울리는 소리. 그리고 눈앞에 떠오르는 숨 가쁜 메시지. 하지만 메시지를 읽을 여유 따윈 없었다.
“누우오오오-!”
괴성.
파공성.
떨어져 내려오는 거대한 주먹.
“……!”
끝인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두 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미노타우로스의 주먹을 막아냈다.
뻐걱-!
“……그읏?”
팔뚝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하마터면 어깨 관절이 빠질 뻔했다. 마치 커다란 몽둥이를 팔뚝으로 막아낸 기분이었다. 운이 나쁘면 부러지거나 최소한 멍이 들게 되는, 딱 그런 정도의 통증과 충격.
“…….”
그런데 잠깐. 나, 방금 미노타우로스가 내리치는 주먹을 막은 건데?
‘설마 벌써 죽은 건가.’
한 방에 죽는 바람에 감각의 혼동을 느끼고 있는 걸까. 혹은 죽어가는 과정에서 말도 안 되는 환각에 빠진 걸까.
한데 그때였다.
“……푸르륵?”
미노타우로스의 왕, 우루스의 콧김이 크게 터져 나왔다. 뜨거운 바람이 볼에 훅 와 닿았다. 얼결에 얼굴을 찡그렸다. 감았던 눈을 떴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어?”
우루스의 거대한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놈이 이쪽을 노려보며 거친 콧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시금, 콧김이 확 와 닿았다.
‘우윽, 냄새.’
엄청난 누린내가 확 끼쳤다. 그 감각은 결코 환각이나 착각이 아니었다.
“푸르륵! 푸륵!”
꾸드득! 드득!
우루스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두 주먹을 내리눌렀다.
“으읏!”
치켜든 팔뚝을 엄청난 무게가 짓눌러 왔다. 마치, 바위가 짓누르는 듯한 감각. 한데 이쪽이 팔뚝으로 떠받치고 있는 대상이 바로…….
“어?”
우루스의 주먹이었다. 그러니까, 이쪽이, 우루스의 주먹을 팔뚝으로 막고 있다. 한데 더욱 이상한 점이 따로 있었다.
‘미노타우로스 이놈, 작아졌어?’
아까는 주먹이 바위만큼 컸는데. 분명 이쪽 몸통보다 컸는데. 지금은 그냥 잘 익은 멜론 크기로 보였다.
주먹뿐만이 아니었다. 7미터의 압도적인 거구? 아니었다. 그냥 이쪽보다 머리 하나쯤 더 클 뿐이다. 그저 이쪽보다 등빨(?)이 조금 우람할 뿐이다.
그러니까, 즉…….
‘크기 차이가…… 없어졌잖아.’
어떻게 된 걸까. 이쪽은 그저 뭐라도 해보려고, 살아보려고 발악했을 뿐인데. 그러다가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환상종 전용인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었을 뿐인 건데.
‘그런데 날 죽이려던 미노타우로스의 덩치가 나랑 비슷하게 줄어들었다고? 그게 말이 돼?’
말도 안 되는 괴상한 일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멍해진 이쪽의 반응이 마음에 안 든 걸까.
“푸르륵! 누우우우-!”
우루스가 주먹을 풀었다. 손아귀를 와락 뻗어왔다. 어찌해볼 틈도 없이, 이쪽의 멱살을 붙잡았다. 끌어올렸다. 내동댕이쳤다.
“……으어엇!”
콰콰쾅-!
그저 이쪽은 바닥에 패대기쳐졌을 뿐인데, 덤프트럭이 전복되는 엄청난 소리가 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반쯤이나마 온전히 남아 있던 범선 선미루가, 이쪽의 등짝에 깔려 완전히 짓뭉개져 버렸다!
‘뭐지?’
당황스러웠다. 졸지에 이쪽과 사이즈가 비슷해진 우루스. 한데 넘어지고 보니 이쪽이 범선 선미루를 등짝으로 깔아뭉갰다. 그러니까 이건, 즉…….
‘내가 커진 거라고?’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휘영청 달이 떠오른 밤하늘. 쿠쿵, 쿵, 다가오는 우루스. 그 사이로 보이는…… 붉은색 경고성 메시지.
“…….”
그러고 보니 아까 ‘딩동’ 하고 알림음이 울렸었지.
재빨리 눈알을 굴렸다.
메시지 내용을 훑었다.
[WARNING!]
[당신은 환상종 전용의 빨간 해바라기씨를 무단으로 복용하였습니다!]
[빨간 해바라기씨는 인간의 신체에 극단적이고 급격한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으니, 복용하였을 경우 의사, 약사, 한의사의 진단을 받으십시오.]
‘……내가 한의산데?’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 그 와중에도 계속 시선을 움직였다.
[당신이 복용한 빨간 해바라기씨가 불안정한 거대화 효과를 일으켰습니다.]
[당신은 환상종이 아닌 인간입니다.]
[따라서 거대화 효과가 3분으로 제한됩니다.]
[거대화 종료 후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당신은 거대화가 끝난 시점으로부터 120시간(5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현재 남은 거대화 유지 시간 : 2분 37초]
“…….”
잠깐. 상황을 정리해보자. 그러니까 지금 내가 빨간 해바라기씨 덕분에 우루스와 비슷한 덩치로 커졌고…….
콰앙-!
“그억!”
주먹질이 날아왔다. 안면을 찍듯 후려쳤다. 눈앞에 별이 빡 하고 보였다. 그 사이로 시야 한쪽을 붉게 차지한 메시지도 보였다.
[현재 남은 거대화 유지 시간 : 2분 34초]
“……으그읏!”
확실해졌다. 지금껏 메시지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내가 커진 거야. 빨간 해바라기씨 덕분에. 앞으로 2분 30초 정도는 이 미노타우로스와 비슷한 덩치가 유지될 거란 소리고, 그 시간이 종료되면…… 120시간, 5일 동안이나 혼수상태에 빠진다는 거지?’
깨달음이 대뇌피질에 팍 꽂혔다. 정리하자면 그런 거다. 앞으로 2분 30초. 그 안에 미쳐 날뛰는 미노타우로스와 결판을 봐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5일짜리 혼수상태에 빠진다. 이 난리 통에, 완벽히 무력한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
즉, 100% 사망 당첨일 거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는…….
“그아아앗!”
깨달음이 행동을 불러왔다.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방금 맞은 얼굴이 아팠지만 참을만했다. 거대해진 덩치 덕분인 듯했다.
‘아파. 하지만 이 정도로 죽진 않아!’
아까까진 스쳐도 전신 골절이나 사망 확정이었을 우루스의 공격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맞아도 죽진 않는다. 그저 더럽게 아플 뿐.
‘고등학교 때 생각나잖아!’
한 번은 일진한테 대든 적이 있었다. 왜 내가 너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느냐고. 대차게 개긴 적이 있었더랬다. 그리고 복날 개 맞듯이 맞았다. 지금 우루스와 맞서는 이 순간의 느낌이 딱 그때 당시의 추억(?)을 강제로 소환시켜주었다.
‘PTSD 오겠네, 진짜!’
“푸르륵! 푸륵!”
우루스와 대치하듯 마주 섰다. 비슷해진 눈높이에 미노타우로스가 당황하는 게 보였다. 경혈 스캐닝 옵션으로 엿보이는 놈의 기혈 흐름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지금!’
머뭇거릴 틈이 없다. 이제 남은 시간은 2분 20초 남짓. 재빨리 움직였다. 앞으로 뛰쳐나갔다. 몸을 숙이며 바닥에 손을 뻗었다. 아까 떨어뜨린 꼬슴이의 가시를 집어들었다. 우루스가 이쪽의 돌진에 반응했다.
“-누우우우!”
놈이 몸을 낮추며 뿔을 들이밀었다. 그 반응과, 기혈의 움직임으로 놈의 동작을 예측할 수 있었다.
‘박치기!’
소싸움을 하듯 이쪽과 박치기를 하려는 거겠지. 그걸 깨달은 즉시 갑판을 박찼다.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콰앙-!
부서지는 갑판 파편. 그 사이로 몸을 날렸다. 뿔을 앞세우고 돌진하는 우루스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놈의 꼬리를 잡았다.
터컹!
착지와 동시에 뒤에서 놈의 허리를 껴안았다. 곧바로 놈의 팔꿈치가 날아왔다.
“누우-!”
뻐걱!
“……그악!”
눈앞이 번쩍. 팔꿈치에 코를 맞았다. 인중이 확 뜨거워지며 찝찝한 맛이 느껴졌다.
‘코피?’
아무래도 쌍코피가 터진 듯했다. 하지만 코피 따위를 닦을 틈도 없었다.
‘남은 시간은…… 2분 10초!’
날뛰는 우루스를 뒤에서 붙들고 늘어졌다. 그리고 가시를 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내리찍었다.
푹!
덩치가 커지고 체중이 늘어난 덕분일까. 가시가 질긴 소가죽을 뚫어냈다! 덕분에 목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목빗근(sternocleidomastoid muscle) 뒤쪽의 오목한 곳, 목덜미 옆쪽의 천유혈(天牖穴)에 정통으로 꽂혔다.
“푸르륵!”
……하지만 얕았다.
우루스의 천유혈을 지나는 마나의 흐름이 경혈 스캐닝을 통해 보였다. 가시의 끝이 그 흐름에 닿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오, 이 저질 체력!’
이쪽의 힘이 징그럽도록 약한 탓이다. 덩치가 커지고 체중이 늘어났음에도, 태생적으로 약한 근력 때문에 충분한 깊이까지 가시를 찔러넣을 수가 없었다.
“누우우우!”
설상가상으로 우루스가 격하게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따끔한 탓이겠지. 물론 여기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이쪽도 목숨이 걸렸으니까.
‘우아아아!’
아예 놈의 등에 어부바하듯 올라탔다. 다리로 놈의 허리를 감았다. 매미처럼 촵 매달렸다.
“데미아안!”
지금 상황을 도와줄 수 있을 유일한 능력자. 이쪽의 외침에 녀석이 퍼뜩 고개를 드는 게 보였다. 녀석을 향해 재빨리 외쳤다.
“와서! 우어업! 이 가시! 뒷부분! 쳐!”
미친 황소처럼 날뛰는 우루스. 그 등에 로데오 하듯 매달린 이쪽. 여전히 가시를 놈의 천유혈에 갖다댄 채 외쳤다.
그런 이쪽의 의도를 깨달은 걸까. 데미안이 절뚝거리며 달려왔다. 몸을 날렸다.
파앗!
녀석의 손에 들린 검이 서늘하게 빛났다. 이쪽이 쥔 가시 뒤편을 강하게 후려쳤다.
콰텅-!
망치로 못을 치듯, 검으로 가시를 쳤다. 효과(?)는 확실했다.
뾱?
두꺼운 소가죽 겉면에만 간신히 박혀 있던 가시가 10센티쯤 푹 들어갔다! 마침내 우루스의 천유혈을 제대로 찔렀다!
“……누오!”
따끔한 걸까.
우루스의 몸부림이 더욱 격해졌다. 하지만 시술을 멈춰줄 생각은 없었다. 살아야 하니까. 우루스의 난동을 멈춰야 하니까. 그러자면 일단 이놈을 진정시켜야 하니까.
‘이놈을 무력화시켜야 해. 죽이는 거? 아니. 그건 나한텐 불가능할 거야. 덩치는 비슷해졌지만 난 여전히 약골이니까. 이놈이 나보다 힘이 세니까. 지금도 가시로 가죽만 간신히 뚫었잖아.’
그러니 죽이는 건 힘들 거다. 특히, 2분 남짓한 시간에 이놈을 죽이는 건 절대 불가능이다. 하니 남은 방법은?
‘얌전하게 만들어줘야지. 마비? 아니. 워낙 흥분한 채 날뛰고 있어서 불가능해. 아니스 꼬리를 시술할 때 썼던 독약도 없어.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놈의 흥분상태를 가라앉히고 광포화를 끝내는 거야. 그럼 승산이 있어. 내가 혼절하더라도, 남은 데미안과 나머지 근위기사들이 어떻게 맞서볼 수 있겠지.’
냉철한 계산을 거듭했다. 그러자니 각이 보였다. 지금 저쪽에서 경악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데미안과 근위기사들, 특근대원들. 이쪽이 우루스와 실랑이를 벌이며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타격에서 어느 정도 회복된 모습이었다.
저 정도면 된다.
우루스를 진정시키면, 광포화를 끝내주기만 하면, 그러면 뒤처리는 저들이 해줄 수 있을 거다.
‘신경계의 흥분을 가라앉혀야 해. 교감신경의 흥분성을 감소시키고 부교감신경을 활성화하자.’
결론이 나왔다.
방법도 명확했다.
“꼬슴아! 가시!”
우루스를 붙잡고 늘어지며 외쳤다. 꼬슴이가 때맞춰 호응했다.
“꼬슴!”
표표푝!
녀석이 가시를 연달아 뽑아냈다. 이쪽을 향해 하나씩 던졌다. 그걸 받는 대로 우루스의 몸에 팍팍 꽂았다.
“천료혈(天髎穴)!”
어깨뼈 가장 위쪽의 각이 진 자리. 어깨뼈위각(superior angle of the scapula)의 오목한 곳에 가시가 살짝 꽂혔다.
“데미안!”
외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데미안이 움직였다. 높이 뛰어올라 검을 내리쳤다.
콰턱-!
망치처럼 가시를 내리치는 검. 덕분에 질긴 소가죽을 뚫고 들어가는 가시.
“누오!”
우루스가 더욱 날뛰었다. 하지만 손을 멈추지 않았다.
“계맥혈(瘈脈穴)! 데미안!”
콰칵!
사람으로 치면 귓바퀴 뒤쪽으로 대각선 아래. 그곳에 가시가 인정사정없이 꽂혔다. 놈의 계맥혈이 순간 밝게 빛나는 게 보였다. 그 빛이 수소양삼초경(手少陽三焦經)의 경혈 흐름을 따라 번졌다. 번지는 그 흐름에 따라 계속해서 가시를 꽂았다.
“예풍(翳風)!”
쾅!
계맥혈에서 조금 아래에 가시 하나. 다음 차례는 귓바퀴 꼭대기(auricular apex) 바로 위쪽이었다.
“각손(角孫)!”
콰텅!
“누오!”
이쪽이 뭔가를 한다는 걸 느낀 걸까. 우루스의 날뜀이 더욱 거칠어졌다. 하지만 이쪽도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리고 스스로를 향해 세뇌하듯 되뇌었다.
‘이놈은 환자다. 침 맞기 싫어서 떼쓰는 어린이 환자다. 그런데 그 어린이가 좀 심하게 많이 건장해. 단지 그뿐인 거야!’
그렇게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니 자신감이 치솟았다. 제압(?)할 수 있겠다는 직업적 사명감이 솟구쳤다.
“얌전히 맞으면 사탕 준다아!”
푹!
마지막은 이문혈(耳門穴)이었다.
귀에서 얼굴 방향. 사람으로 치면 귀 주름 두 개가 만나며 골짜기를 이루는 귀구슬위패임(supratragic notch) 바로 앞쪽 오목한 곳. 가시를 세차게 찔러 넣었다. 데미안이 말뚝 박듯 검으로 가시를 때리고 찍어 넣었다.
효과는 확실했다.
“……누우!”
우루스의 난동이 딱 멎었다. 붉게 충혈되었던 안구의 실핏줄이 가라앉았다. 급격하게 날뛰던 호흡과 근육, 오장육부의 움직임이 평온해졌다. 심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쿵-! 두쿵! 두쿵…….
혈전으로 일부가 막혀 버렸던 우루스의 심장혈관. 그 관상동맥이 이완되며 확장되었다. 정체되던 심근 혈류가 향상되었다. 심근의 산소 요구량이 극적으로 낮아졌다. 지금껏 심장을 옥죄던 끔찍한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광포하게 이글거리던 우루스의 눈동자가 평온해졌다.
“……누, 누우?”
지금껏 원수 보듯 라키엘을 노려보던 우루스의 시선. 그 시선이 서서히, 그러나 조금씩 확실하게, ‘자신을 치료해준 은인’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바뀌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