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거짓말 이용권 (2)
“어떠셨습니까. 생각하셨던 대로 회담은 잘 진행되었는지요.”
“뭐, 그럭저럭?”
회담장을 뒤로하고 나오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 이쪽을 향해 물어오는 데미안 녀석. 라키엘은 싱긋 웃었다.
“다행히 앙부아즈 대사가 내 진심을 아주 잘 알아주더라고.”
“전하의 진심……을 말입니까?”
“어.”
“대체 어떤 진심을 보이셨기에…….”
“말 그대로 상호존중과 평화를 위한 내 마음을 보였달까.”
“사실은 호구 획득과 착취를 위한 마음은 아니셨고 말입니까?”
“어허. 날 뭘로 보고.”
“크레모에서 약속하셨던 위험수당 지급을 아직 안 해주신 악덕업주…….”
“……어?”
라키엘은 멈칫했다. 뜨끔하는 심정으로 데미안을 쳐다보았다.
“아직 안 줬어? 내가?”
“예.”
“…….”
“황도로 돌아오면 바로 지급한다고 하셨는데, 그 뒤로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어, 음, 미안. 내가 좀 정신이 없었네.”
사실이었다. 황도에 돌아와 별궁 한의원을 정비하자마자 황제가 쓰러졌더랬다. 그 사태를 수습하느라 정말로 정신이 없긴 했다.
하지만 약속했던 수당을 까먹고 있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딱히 변명할 구석이 없었다.
‘이 녀석, 오늘 어쩐지 뚱한 기색이다 했더니 그래서였구나.’
라키엘은 데미안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때 마침 데미안이 툭 말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말하는데 표정은 아니다. 삐친 걸까. 라키엘은 겸연쩍게 웃었다.
“내가 면목이 없네. 별궁에 돌아가면 바로 지급 받을 수 있게 조치할게. 아, 그리고…….”
“따로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어.”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앙부아즈 대사를 설득(?)하는 데에 성공했다. 거짓말 이용권을 묻힌 서신을 앙부아즈 국왕에게 보내두었다. 그러니 앙부아즈의 왕녀 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이쪽이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될 것이다. 당분간 그쪽 걱정은 할 일이 없다.
그러니 이제는?
‘황제를 챙겨야지.’
참 바쁘다, 바빠.
라키엘은 속으로 탄식을 삼켰다. 데미안에게 바짝 다가갔다.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오늘, 별궁에 아주 중요한 환자가 입원할 거야.”
“……예?”
“쉿. 목소리 죽여. 아무도 못 듣게.”
“환자가 누구이기에 이러시는 겁니까.”
“황제 폐하.”
“…….”
“그러니까 먼저 별궁에 돌아가 있어.”
“특근대 전원에게 비상근무를 준비시켜두면 되겠습니까?”
“어. 정답.”
“알겠습니다.”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키엘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요즘 한창 훈련에 매진하는 중인 듯하던데, 미안하게 됐어.”
“괜찮습니다. 훈련보다는 중요인사의 보호가 제 우선적인 임무니까요.”
데미안의 입가에도 쓴웃음이 살짝 맺혔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부쩍 훈련량을 늘린 그였다. 호위 임무를 수행하는 시간 이외에는? 거의 별궁 연무장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한계를 느낀 까닭이었다.
‘크레모에서. 그렇게 벽을 느낄 줄은 몰랐어.’
우루스.
그 거대한 미노타우로스의 습격을 받았던 밤이 떠올랐다. 아직도 자려고 누우면 그때 당시의 순간들이 생생했다.
잊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미노타우로스 앞에서 역부족이었던 자신의 모습. 당시에 느꼈던 거대한 벽과 무력감. 생전 처음으로 당해본 패배였다. 그런 굴욕 또한 처음이었다.
그래서였다.
황도에 돌아온 이후, 틈만 나면 검을 쥐었다. 연무장에서 땀을 흘리며 특훈에 매진했다. 더 강해져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하지만…… 아직은 길이 보이지가 않아.’
솔직히 조금은 막막했다. 여기서 뭘 더 해야 위로 올라갈 수 있을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체계적 검술을 익혀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누군가에게 배움을 받는 건 소용이 없겠지. 날 가르칠 수준의 기사? 그런 이가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 만나보지 못했어.’
하여 철벽에 머리를 들이받는 기분으로 매일 땀을 흘리는 요즘이었다. 언젠가는 자신만의 검술과 마나 운용법을 정립하리라. 그 목표만을 되새기며 정진하고 있었다. 라키엘도 그런 데미안의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왜 모르겠냐.’
그는 묘한 시선으로 데미안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읽은 소설, 마검황. 그 이야기의 주인공 데미안 카이엔.
사실 녀석은 이야기 속 초반엔 그렇게 강하지 못했다. 그저 불법도박판 지하 검투장의 챔피언 정도에 불과했다. 세계관 전체를 통틀어보면 압도적이라고 표현하기에 부족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의 계기가 녀석을 바꾸게 되지.’
녀석이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 순간. 그 본질에 걸맞은 마나 운용법을 갖추는 순간. 그때부터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됐다. 엄청난 폭풍 성장을 보여주었다. 진정한 최강자로 거듭났다.
‘슬슬 때가 오는 건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살짝 곤혹스러웠다. 최대한 그걸 늦추거나 방해하고 싶었다. 그래야 녀석이 얌전히 곁에 머물러 줄 테니까. 이런 핑계를 대어서라도 녀석의 훈련에 태클을 걸어둠이 좋을 듯했다.
라키엘은 속내를 숨기며 말했다.
“어쨌건, 그런 이유로 특훈은 잠시 멈추고 임무에 충실해 줘야겠어. 미안하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비상근무 수당만 챙겨주시면 됩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이번에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어, 미안.”
본의 아니게 악덕업주(?)가 되어 버린 기분이 이런 걸까.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그럼 저는 먼저 별궁으로 돌아가 준비를 갖춰두고 있겠습니다.”
데미안이 예를 표하며 물러났다. 라키엘도 할 일을 시작했다. 별궁으로 황제를 옮기는 일이었다.
‘저대로 황궁에 둘 수는 없어. 황제의 측근 중에 누가 딴마음을 품었는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게다가 황제는 아직 중증 환자다. 언제 응급상황이 생길지 모른다. 1개월 뒤, 대주교의 신성 축원 쿨타임(?)이 돌아오기 전까지 최대한 자신이 곁에 붙어서 보살펴야 한다.
한데 황제를 황궁에 놔두면?
‘나도 덩달아 온종일 황궁에 머물러야 해. 그러면 안 돼. 사람들이 의심하게 될 테니까.’
황제가 단순한 감기몸살로 쉬고 있노라 알렸다. 한데 자신이 온종일 황제의 거처를 들락거리면?
모두가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사실은 황제의 상태가 많이 나쁜 거 아닐까, 라고. 그래서 치료에 조예가 있다는 황태자가 전에 없이 저토록 온종일 황제의 거처를 들락거리는 게 아니겠느냐고.
‘그런 상황은 피하는 게 좋지.’
다행히 황제를 몰래 황궁에서 데리고 나오는 일은 쉬웠다. 황제와 최측근만이 알고 있는 비밀통로를 이용했다. 비밀통로 출구에 마차도 미리 준비해두었다. 덕분에 황궁의 눈과 귀를 피해서 황제를 별궁에 입원시킬 수 있었다.
“이제 당분간 여기서 제가 직접 보살펴드리겠습니다, 폐하. 아까 설명해 드렸다시피, 이곳에서 요양하시는 편이 모두에게 나을 듯해서 말입니다. 괜찮으시겠지요?”
“…….”
무사히 입원을 시킨 직후, 병상에 누운 황제를 향해 물었다. 아직 황제는 거동이 불편했다.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쪽을 향해 천천히 깜빡이는 눈빛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리하라고.
너를 믿겠노라고.
그 눈빛을 보며 라키엘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했다.
‘황제를 무사히 별궁까지 데려왔으니…… 이제 다음 VIP 손님을 맞이할 준비도 슬슬 해둬야겠구만.’
자신이 앙부아즈의 국왕에게 보낸 서신. 그 서신에 묻힌(?) 거짓말 이용권이 슬슬 효력을 드러내고 있으리라. 라키엘은 곧 이곳에 오게 될 앙부아즈의 왕녀를 떠올렸다.
♣
“아바마마, 아니, 전하. 저는 전하께서 내리신 명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곳은 앙부아즈의 왕도, 앙부즈.
그곳의 왕성에서 왕녀, 아델린 보아르네 앙부아즈는 인상을 찡그렸다. 감히 고개를 들어 자신의 부왕이자 앙부아즈의 국왕인 메로뱅거 발루아 앙부아즈를 바라보았다.
불끈.
치켜든 고개 아래, 탄탄하게 발달한 그녀의 승모근이 꿈틀거렸다. 수없는 수련으로 타격에 최적화된 광배근도 수축했다.
그녀의 입에서 불만 가득한 물음이 나왔다.
“저는 정녕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마젠타노 제국의 요구에 그리 쉽게 응하시다니요. 저더러 황도 마젠타에서 무려 6개월을 체류하라니요. 아무리 마젠타노 제국이 우리보다 강성한 제국이라 한들, 왕족인 저를 그토록 쉽게 볼모로 보내실 결정을 내리시다니요.”
그녀의 서릿발 같은 물음이 쏟아졌다.
사실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왕족이었다. 동시에 국왕의 외동딸이었다. 공식적인 왕위 승계서열 1위의 왕녀였다. 즉, 장차 앙부아즈의 왕이 될 몸이었다. 한데 이렇듯, 마젠타노 제국에 6개월이나 볼모로 잡혀가는 처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런 결정은 부당합니다. 아니, 옳지 못합니다. 우리 앙부아즈는 엄연한 독립국이며, 왕조의 정통성과 지배의 정당성을 주변국으로부터도 두루 인정받는 왕가입니다. 한데 양국 사이의 사소한 마찰이 있었다고 하여 이렇듯 쉽게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시다니요. 이러면 아니 되십니다.”
진심이었다.
비록 마젠타노 제국이 대륙의 패권국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앙부아즈의 힘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자존심까지 굽혀가며 굴욕적인 외교를 할 이유는 없었다. 국왕을 바라보는 왕녀 아델린의 얼굴에 분통과 답답함이 떠올랐다.
그제야 국왕의 입이 열렸다.
“아델린, 나의 외동딸이여.”
“예, 전하.”
“너는 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마젠타노의 위세에 눌려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이리라 여기는 것이더냐?”
“그건…….”
“역시 그렇겠지. 하니 그토록 내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겠노라 항변하는 것이겠지.”
“…….”
아델린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부왕의 손을 향했다. 부왕의 손에 서신이 들려 있었다 .마젠타노 제국의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부왕에게 보낸 친서였다.
‘대체 저 서신이 무슨 내용이기에…….’
부왕께서 이토록 이해되지 않는 결정을 내리신 걸까. 혹시 마젠타노의 황태자에게 약점이라도 잡히신 걸까. 혹은 자신이 상상도 못하는 종류의 협박이 쓰인 걸까. 그렇기에 강직하신 부왕께서 저토록 손쉽게 황태자의 요구를 수락하시게 된 것일까.
‘궁금해.’
절로 걱정이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내용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국왕은 그런 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신을 야무지게 접어 품속에 쏙 갈무리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그래. 받아들이기 어렵겠지. 너의 억울한 심정을 알겠다. 이 아비를 이해하지 못하겠노라 외치는 마음 또한 알겠다. 하지만 그렇기에 너에게 일러두자면, 언젠가는 이 아비가 내린 결정을 온전히 이해하며 감사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그 의문 또한 시간이 지나면 풀리게 될 터. 더는 너의 반론을 듣지 않겠다.”
“하오나, 저는…….”
“그만. 거기까지.”
국왕의 단호한 명이 떨어졌다.
그는 내심 안타까운 심정을 삼켰다.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것이 너와 왕국을 위한 길이란다.’
그는 문득,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보낸 친필 서신을 떠올렸다. 그 내용은 지극히 간단했다.
- 장인어른,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
평소라면 절대로 믿지 않았을 헛소리. 미친놈 아니냐며 길길이 날뛰었을 개소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딩동!
[거짓말 이용권이 성공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목표대상 : 국왕 메로뱅거가 서신의 내용을 완벽하게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 알림음이 울리는 순간.
국왕이 근엄한 선언을 했다.
“이 자리에서 국왕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의 딸이자 미래의 왕위 계승자인 아델린 보아르네 앙부아즈는 현시간부로 즉시, 마젠타노 제국의 황도 마젠타로 이동하여 6개월간 체류하도록 하라.”
“아, 아바마마?”
“명을 시행하도록.”
반론할 틈도 없었다.
국왕의 명을 받은 근위기사들이 왕녀의 주위를 에워쌌다. 팔을 붙잡았다. 물론 격투술로 단련된 건장한 왕녀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퍽! 투콱!
그녀의 주먹과 팔꿈치가 사납게 움직였다. 근위기사들이 비틀거렸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국왕의 눈짓을 받은 궁정마법사가 주문을 읊었다. 왕녀에게 강력한 속박 마법이 걸렸다.
“……으읍! 읍읍!”
꿈틀거리는 왕녀가 순식간에 밖으로 옮겨졌다. 미리 대기 중이던 마차에 실렸다.
“출발하도록.”
국왕의 명이 떨어졌다. 마차와 수행원 무리가 움직였다. 마차 안쪽에서 왕녀의 다급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아바마마! 아바마마아!”
쿵! 쿠콱! 쿵!
육중한 주먹질이 마차를 내부에서부터 들썩이게 했다. 하지만 마차에 걸린 3중 방어마법을 깨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앙부아즈의 왕녀 아델린은 졸지에 황도 마젠타로 마차배송(?)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