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정성과 신뢰 사이 (3)
……드디어 오늘인가.
황제, 아스테리온은 눈을 떴다. 벌써 한 달째 누워서 올려다본 VVIP 병실 천장. 이 천장도 오늘이 마지막이겠지. 다시 이곳에 누워 지내는 일은 없겠지.
반드시 그리되어야 할 터다.
“하면 폐하, 이제 시작하겠사옵니다.”
“…….”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고개를 힘겹게 돌렸다. 반쯤 떠진 눈꺼풀. 그 사이로 새하얀 법복을 입은 노인이 보였다.
대주교였다.
그 옆으로 서너 명이 더 있었다. 시종장. 근위대장. 맏아들 라키엘까지.
“…….”
라키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근래에 들었던 어떤 소문이 문득 떠올랐다. 과연 그게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짐은 어찌 반응하면 좋을 것인가. 황제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그래, 부탁함세.’
황제는 대주교를 향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바로 오늘이다. 한 달 동안 기다려온, 대주교의 신성 축원이 가능해지는 날. 이젠 지긋지긋한 병상 생활도 끝이다. 한 달 내내 힘썼던 재활치료와도 작별이다.
가슴이 뛰었다.
걱정도 들었다.
그 사이, 대주교가 병상 옆으로 다가왔다. 손을 뻗어왔다.
눈을 감았다.
파아앗……!
대주교의 전신에 서리는 은은한 광휘. 그 손길을 통해 따스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어깨를 간질이고, 가슴을 지나, 전신으로, 발끝까지, 다시 척추를 따라 목덜미로, 얼굴을 거쳐 머릿속까지.
맑아졌다.
모든 병마의 찌꺼기. 번뇌의 마지막 티끌까지. 말끔히 씻어냈다. 뇌졸중을 겪으며 손상되었던 소뇌 조직이 복구되었다. 뒤틀렸던 신경조직이 정비되었다. 근육이 제자리를 되찾았다. 관절이 다시금 맞추어졌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폐하!”
시종장과 근위대장의 감격에 찬 외침. 탈진해서 물러나는 대주교. 그들의 눈빛을 받으며 황제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
뒤틀렸던 손목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모든 감각이 제자리를 되찾았음이 느껴졌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황제는 고개를 들었다.
“황태자여.”
“예, 폐하.”
“날짜는 언제로 잡을 생각이더냐.”
“……예?”
“날짜 말이다.”
“송구하오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라키엘은 콧잔등을 살짝 찡그렸다. 날짜라니. 저게 웬 뚱딴지같은 말일까. 문득, 6번 척추가 바르르 떨리는 걱정과 불길함이 쑴펑쑴펑 샘솟았다.
‘날짜라니, 저거 뭔 소리야. 황제가 왜 갑자기 헛소리를 하지? 혹시 뇌졸중이 다 안 나았나? 아니면 후유증이 남았나?’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아까부터 경혈 스캐닝으로 황제의 상태를 관찰하고 있던 터였다. 덕분에 대주교의 신성축원으로 황제의 소뇌와 신경 조직이 완벽하게 복구되는 과정을 모두 확인했다.
‘그러니까 후유증이 남을 리가 없는데? 한 달 내내 재활도 빡쎄게 했는데?’
그럼 대체 뭘까.
아리송한 불길함이 모락모락 피어나려던 무렵. 황제의 눈길이 이쪽을 똑바로 쏘아보듯 콕 찔러 왔다.
“앙부아즈의 왕녀를 일컬음이니라.”
“예에?”
“예, 는 무슨. 듣자 하니 짐이 병상에 누운 사이에 네가 제법 앙큼한 일을 벌였더구나.”
“앙큼한 일이라심은……?”
“네가 어떤 수로 앙부아즈의 대사를 홀렸는지는 따로 묻지 않겠다. 앙부아즈의 국왕, 그 여우처럼 교활한 늙은이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도 굳이 따지지 않겠노라. 어떠한 수단을 썼든 간에, 그것은 결과적으로 모두 너의 기량이 빚어낸 성과일 터이니 말이다. 한데-”
이쪽을 보는 황제의 눈길이 엄숙해졌다.
“그렇듯 묘책과 기책을 발휘하여 벌인다는 일이 고작 여인과 시시덕거리는 일이었더냐?”
“…….”
“물론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허나, 너는 장차 황가를 어깨에 짊어질 사람이다. 제국의 수백, 수천만 백성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다. 한데 그러한 너의 혼사를 주위와의 아무런 상의도, 의논도 없이 독단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는 말이더냐?”
“…….”
“황태자는 어찌하여 대답이 없는가.”
“으음, 그것이.”
라키엘은 멋쩍게 웃고 말았다. 황제의 타박을 듣다 보니, 제대로 오해를 샀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뭐야. 설마 내가 왕녀와 썸이라도 타는 걸로 아는 건가.’
생각해보니 그럴 법도 했다. 처음엔 앙부아즈의 대사도 비슷한 오해를 했더랬다. 게다가 실제로 왕녀가 담석 치료 때문에 요즘 하루도 빼먹지 않고 진료실을 들락거리고 있다. 주위에서 오해의 시선을 보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오해를 정정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설픈 변명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왕녀를 그냥 놔두면 담석으로 죽을 거고, 그 죽음이 정치적인 도미노가 되어 대전쟁이 벌어질 거라는 말을 해봤자 과연 황제가 믿어주겠느냔 말이지.’
그건 오직 소설 마검황을 읽은 자신만이 아는 역사다. 말한다고 해서 믿어주는 게 비정상이다. 그래서였다. 그는 어설픈 변명 대신 능청스러운 대응을 선택했다.
“실은, 제가 차였습니다.”
“……뭐?”
대놓고 거짓말을 했다.
황제가 멈칫했다.
좋아. 먹힌다.
용기(?)를 얻은 라키엘은 풀악셀을 밟았다.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폐하께서 병상에 누워계신 틈을 타서 삿된 생각으로 수작을 부려보았습니다. 처음엔 시도가 잘 먹히는 듯했습니다. 들으셨다시피, 왕녀를 황도까지 불러오는 데에는 성공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 뒤가 생각대로 되지가 않았습니다. 차였습니다.”
“설마.”
“떠올리신 그 설마가 맞으실 겁니다.”
“들이댔던 것이더냐?”
“예.”
“그래서 결국?”
“예.”
“쯧쯧, 못난 놈!”
“…….”
“기왕 일을 벌였으면 유의미한 성과를 내었어야 마땅한 것임을. 어찌 그리도 못난 짓을 벌였더냐.”
“…….”
“짐의 반의 반만 닮았어도 그리 꼴사나운 지경에 달하지는 아니하였을 것을. 쯧!”
“…….”
억울……하다.
사실 난 들이댄 적도 없는데.
라키엘은 이 광활한 우주에서 아무런 존재가치도 없는 미물 쪼가리로 전락하려는 멘탈을 씁쓸하게 부여잡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심 안도했다. 독단적으로 앙부아즈의 대사를 움직여서 왕녀를 부른 일을 이 정도 타박으로 무마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쓴소리 몇 마디 듣는 걸로 땡치면 나야 이득이지.’
실질적으로 얻을 것은 다 얻었다. 왕녀의 담석을 성공적으로 제거하고 있는 요즘이다. 이대로면 대전쟁을 막아낼 수 있을 거다. 게다가 황제의 뇌졸중도 제대로 완치되었다.
그거면 됐다.
‘아쉽게도…… 황제를 시해하려 한 범인을 찾아내진 못했지만.’
황제의 몸속에 비정상적인 혈전을 만든 흉수가 있을 터였다. 그동안 찾으려 나름 애를 썼다. 데미안 등에게 뒷조사를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너무나 감쪽같았다.
‘당분간 주의하는 수밖에.’
밝혀지지 않은 흉수의 존재에 대한 것은 일찌감치 황제에게 알려준 터였다. 그러니 그 일은 황제가 알아서 더 조심할 거다.
그러니 이제 이쪽은?
황제의 쏟아지는 잔소리를 피해서 무사히 탈출(?)하기만 하면 된다. 라키엘은 정시퇴근을 갈망하는 사원처럼 슬금슬금 궁둥이를 뒤로 뺐다. 탈출각을 쟀다. 하지만 황제는 만만한 상사가 아니었다.
“어딜 일어나려는 것이더냐. 아직 짐의 훈계가 끝나지 않았거늘.”
“……옙.”
“짐이 비록 그동안 누워 있었다고는 하나, 눈과 귀마저 막힌 것은 아니었도다. 어찌하여 너는 그토록 아우보다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더냐.”
“예?”
“네 아우, 2황자 말이다.”
“…….”
“짐이 이곳에 누워 있는 동안 그 녀석은 거의 매일처럼 이곳을 드나들며 짐을 문병하였지. 한데 그동안 너는 어찌하였더냐?”
“그야 낮에는 환자들을 진료하고…….”
“오후에는 왕녀에게 들이대고.”
“……하오나 밤에는!”
“짐을 간호하였노라고?”
“예, 폐하.”
“그래서, 이런 타박이 억울하더냐?”
“예, 폐하.”
“억울하다 한들 달리 뾰족한 수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폐하.”
라키엘은 쑴펑쑴펑 피어나는 탄식에 한숨 한 스푼을 얹었다. 반면, 그 모습을 보던 시종장과 근위대장은 몰래 미소를 머금었다. 평생 곁에서 황제를 보필한 그들이었다. 덕분에 황제의 본심을 누구보다도 눈치껏 잘 느낄 수 있었다.
시종장과 근위대장은 몰래 눈짓을 교환했다.
‘보이십니까, 로베르토 경? 폐하의 왼쪽 콧구멍이 미세하게 벌렁거리고 있으시군요.’
‘예, 저도 봤습니다. 분명 매우 흡족해하시는 것일 테지요.’
‘황태자 전하를 매우 자랑스러워하고 계신 듯하고 말입니다.’
‘필경 그러하실 겁니다.’
물론 라키엘도 그런 황제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사실은 조금 난감했다.
“…….”
이렇게 살갑게 투닥거리는 거. 이렇듯 훈훈하게 타박하는 거. 과연 자신이 받아도 되는 대접일까. 회의감이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쨌거나 나는 당신의 친아들이 아니니까.’
진짜 라키엘이 아니다, 자신은. 그저 이유도 모른 채 황태자 라키엘의 몸으로 들어온 이질적인 존재일 뿐이다, 자신은. 그렇게, 이 세상과 동떨어진 존재일 뿐이다, 자신은. 그러니까 이런 살가운 대접, 선뜻 받는 건 선을 넘는 거다.
“…….”
그는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쉬지 않고 이쪽을 꾸중하고 있는 황제. 그 준엄한 표정 속에 깃든 애정이 조금씩 엿보였다. 그래서 난처하고, 미안했다. 이쪽을 아들로 여기고 있을 그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이 났다.
하지만 진실을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라키엘은 한 발짝 선을 긋듯 물러났다.
“염려하시는 바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송구하오나,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어딜 가려는 것이더냐?”
“다른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들이 아닌데도 아들 취급을 받으면서 황제를 속이는 거. 그렇게 뻔뻔하도록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다간 스스로가 가증스럽게 느껴질 것 같았다. 그래서였다. 붙잡기 전에 일어났다. 얼른 예를 표하고 병실에서 빠져나왔다.
“후우.”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도망치듯 익숙한 진료실로 걸음을 옮겼다. 반가운 목소리가 이쪽을 반겼다.
“이제야 오시는군요. 환자를 기다리게 만드는 의사라니. 이거, 실례인 건 충분히 알고 계시겠지요?”
이쪽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타박하는 왕녀 아델린. 어쩐지 여기서나 저기서나 두루두루 받는 타박만 받는 게 오늘의 운세인가 보다.
“미안합니다. 다른 VVIP분의 마무리 진료를 하고 오느라.”
“다른 VVIP라니요?”
“있습니다, 엄청나게 중요한 분이.”
“설마 저보다요?”
“당연하지요?”
“어머나, 매정하셔라?”
“매정하다 매도할 것까지야. 설마 혹시, 왕녀께선 스스로를 굉장히 대단하다고 여기고 계셨는지?”
“…….”
아델린이 가자미눈으로 째릿. 그 모습에 쓴웃음만 흘러나왔다.
“어쨌건, 이제 시작합시다. 알죠? 이제 마지막 담석만 딱 하나가 남아 있는 거.”
“네. 마지막 담석이 제일 크다고도 하셨죠.”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각오는 황태자께서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야 뭐 항상 각오가 되어 있기는 한데…….”
“그럼요?”
“마지막 담석을 깨느라 힘들고 아프면 제가 좀 징징거릴 예정이라서 말입니다.”
“설마 그걸 받아줄 거란 기대를 하는 건 아니죠?”
“조금은요?”
“퍽이나.”
“와, 매정하셔라.”
“매정하다 매도하실 것까지야. 혹시, 황태자께선 스스로를 굉장히 대단하다고 여기고 계셨는지?”
“…….”
한 방 먹었다.
라키엘의 쓴웃음이 더욱 짙어지고 말았다.
“그럼 일단 시작합시다. 준비하시고. 쏘시고.”
“얍.”
“……긕↗!”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하자마자 전신을 쾅, 하고 때려오는 충격파.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다. 혼자라는 사실을 아까 새삼 되새겼으니까.
그러니까 목표에만 집중하면 된다. 왕녀를 치료하고. 대전쟁을 막아내고. 탱자탱자 잘 먹고 잘살면 되는 거다. 그러니까, 지금에 집중하자.
“……흡!”
연달아 몰려오는 충격파를 버텨내며 라키엘은 더욱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
한편, 같은 시각. 황도 마젠타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대로.
투두두두두……!
어느 기수가 거칠게 말을 몰고 있었다. 황도 마젠타를 향해 다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앙부아즈에서 출발한, 본국의 급보를 왕녀에게 알리기 위해 서두르는, 앙부아즈의 전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