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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97화 (97/468)

97화. 정성과 신뢰 사이 (2)

아침이 밝았다.

라키엘은 해가 뜰 무렵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기운도 제법 쌩쌩했다.

“황태자께선 이젠 좀 괜찮으신 건가요?”

“원래부터 괜찮았습니다?”

“퍽이나.”

딸각, 딸각.

왕녀 아델린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럴수록 라키엘의 샐러드를 뒤적이는 포크 움직임이 격렬해졌다. 하지만 아델린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기다란 식탁 너머 라키엘을 향해 두 눈을 반짝였다.

“어젠 기절하기 직전에 뭐라셨더라. 엄청나게 오글거렸던 거, 기억하세요?”

“아뇨. 기억 안 납니다?”

“그럴 리가. 제 눈을 똑똑히 보며 말씀하셨는데. 그러니까 뭐랬더라.”

“오늘 진료는 여기까지입니다?”

“진료를 받기로 한 이상…….”

“그만.”

“당신은 내…….”

“거기까지.”

“환자니까…….”

“아 씨.”

라키엘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아침부터 이러려고 오신 겁니까?”

“아뇨. 절대로요?”

“그럴 리가. 지금 절 똑똑히 보며 놀리고 계신데.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하더라.”

“호의로 가득한 문병?”

“퍽이나.”

와삭.

라키엘이 당근 조각을 씹으며 투덜거렸다.

“어쨌건 전 괜찮습니다. 어제 일은…… 치료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했던 부분이고요. 그러니 치료에 지장이 있을까 싶은 걱정은 접어두셔도 됩니다.”

사실이었다.

왕녀의 담석을 치료하기 위한 체외충격파 치료법. 그걸 시행하려면 자신이 충격을 흡수해야 한다는 것쯤은 각오하고 있었다. 실제로 데미안과 연습을 하면서 체험하기도 했다. 다만, 왕녀가 정권으로 발출하는 마나의 위력이 예상보다 강했을 뿐이었다.

‘역시 중급 익스퍼트의 격투가다운 위력이었지.’

검을 주로 쓰는 데미안이 맨손으로 발출하던 마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걸 유도해서 흡수하던 순간엔 뱃속이 왈칵 뒤집히는 느낌마저 들었던가.

명절날 3살 조카 손에 쥐어진 프라모델 피규어가 그런 심정일까 싶었다. 식도와 십이지장 융털돌기와 괄약근이 손에 손 잡고 인수분해됐다가 상냥하고 보람차게 재조립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한 치료법이었다.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

그 끝에 기절했다. 거기까진 좋았다. 문제는 환자 앞에서 못나고 미덥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라키엘이 가장 걱정하는 부분도 그 점이었다.

“어쨌건 치료는 지장 없이 계속될 겁니다. 일단 오늘 오전에는 제가 일반 환자들을 진료할 예정이니, 정오에 다시 와주시면 됩니다. 오후 시간은 담석 치료를 위해 통으로 비워둘 테니까 말입니다. 아, 시술의 안정성을 위해 최소 세 시간은 금식해주셔야 하겠고요.”

라키엘은 열심히 당부했다. 그렇게라도 왕녀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려놓고 싶었다.

일단 왕녀가 이쪽의 진료를 의심하면 안 된다. 이쪽의 실력에 의문을 느껴도 곤란하다. 이쪽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수월하게 진료를 이어나갈 수 있다.

‘그러니 오늘은 기절하지 말자. 절대로.’

그는 내심 각오를 다졌다.

그때였다.

“흐훗.”

왕녀 아델린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황태자께서는 제가 이곳의 치료법을 못 미덥다 여길까 걱정을 하시는가 보군요?”

“…….”

들켰나. 라키엘이 미간을 찡그리려던 무렵, 아델린이 뜻밖의 말을 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저는 고마운걸요.”

“……예?”

“어제 보았거든요. 황태자께서 절 치료하려 얼마나 애를 쓰셨는지. 혼자서 얼마나 많은 걸 감내하셨는지. 그러고도 아무 내색조차 하지 않던 모습까지도요.”

“…….”

“그래서랍니다. 황태자께서 제게 해주시는 치료를 믿습니다. 어제 그 순간 이후부터는 담석이라는 것도, 그걸 없애야 제가 죽지 않으리라는 것도 믿기로 했습니다.”

“어, 진짜로요?”

“네. 기꺼이.”

아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한 진심이었다.

“사실 처음엔 황태자께서 무슨 의도를 품은 건지, 혹여나 저를 농락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더랬지요. 제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믿겠습니다. 황도의 수많은 이들을 무상으로 기꺼이 치료하는 그 숭고한 마음도. 잠재적인 경쟁국의 왕족인 제게 선뜻 건네어 주신 그 이타적인 호의도 말입니다.”

“어, 음, 그럼, 왕녀께서 지금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절 찾아오신 건……?”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거든요. 감사하다고요.”

“……흠흠!”

라키엘은 짐짓 헛기침으로 화끈해진 얼굴을 가렸다. 이렇게 대놓고 얼굴에 금칠을 하다니. 솔직히 예상 못 했다. 좋은데 민망하고 뻘쭘했다.

‘난 그냥, 아침밥 먹는 시간부터 냅다 쳐들어오길래 뭔가 컴플레인이라도 하려는 건 줄 알았는데.’

항의하러 온 건가 싶었다. 혹은 앞으로의 치료에 대해 의문을 표하러 온 건가 싶었다. 하여 열심히 변명을 하고 어필하려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듯했다. 어쩌다 보니 나름 괜찮은(?) 오해를 받게 된 듯도 했다.

‘숭고한 마음과 이타적인 호의라……. 내가?’

절대로 아니다.

사실은 정반대다.

황도의 사람들을 치료하는 거? 어떻게든 보너스 수명을 박박 긁어모아서 살아남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에 불과하다. 왕녀를 여기까지 불러서 치료하는 거? 앞으로 벌어질 대전쟁과, 그로 생겨날 손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즉, 이 모든 치료행위가 오직 나 자신을 위한 개인적이고도 이기적인 투자에 불과하다. 한데 그런 행동들이 왕녀에겐 다르게 보인 듯했다.

‘뭐, 그렇게 봐준다면야. 굳이 오해를 정정해줄 필요는 없겠지.’

그래야 이득이 되니까.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결론을 내린 즉시 안면 가득 철판을 연말마다 갈아치우는 보도블록처럼 촥촥 깔았다.

“후우. 그러실 줄 알고 한사코 모른 척을 하려 했던 건데. 민망하군요.”

“……그건 아닌 거 같았는데.”

“흠흠! 어쨌건! 어제의 일은 치료를 위해 제가 당연히 감당해야 할 부분이었습니다. 이미 각오하고 있었지요. 솔직히 두렵고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환자를 위해야 한다는 마음이 더 강했기에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달까요.”

“…….”

“뭐, 대강 그렇습니다.”

“……묘하게 느끼해지신 거 같은데.”

“커흠흠!”

어쨌건, 왕녀가 이쪽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됐다는 것은 확실했다. 굉장한 소득이었다. 라키엘은 그 기세를 살렸다. 그날부터 본격적인 담석 깨기에 들어갔다. 매일 오후마다 체외충격파 치료를 감행했다.

“쏩니다?”

“오세요.”

아델린이 물었다.

라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직후.

투풋-!

왕녀의 주먹이 자신의 명치 오른쪽에 셀프샷을 날렸다. 강력한 마나가 발출되었다. 동시에 라키엘이 움직였다.

아스라한 심법으로 왕녀가 발출한 마나를 끌어당겼다. 유도했다. 습타 크래프트의 고스트가 뉴클리어를 유도하듯이. 혹은 백상아리가 정모를 벌이는 풀장에 신선한 혈액 한 뚝배기를 던지듯이.

한 점으로 유인했다.

담석을 때리게 했다.

파즉!

“……!”

그때마다 라키엘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하지만 이제 그는 전처럼 기절하지 않았다. 안색이 창백해지지도 않았다. 어느새 조금씩 적응한 덕분이었다.

‘읍! 웁! 급! 긱! 궵!’

나름의 버텨내는 요령이 생겼다.

한 차례의 충격파가 올 때마다 숨을 참았다. 복식호흡으로 배를 부풀리고 복압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역도선수나 헬스 마니아들이 사용하는 발살바(Valsalva) 호흡을 응용했다. 동시에 마나써클을 활짝 열었다.

그 자체가 그에게 특훈이 되었다.

딩동!

[당신은 아스라한 심법을 활용하여 외부의 강력한 마나 충격을 연달아 흡수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무식하게 충격을 버텨내는 것이 아닌, 충격을 흡수하고, 중화하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요령을 습득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당신의 아스라한 심법에 귀중한 경험적 자산이 되었습니다.]

[아스라한 심법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열심히 충격파를 참아내는 와중에 날아온 반가운 메시지. 라키엘은 재빨리 메시지를 읽었다.

[스킬명 : 아스라한 심법]

[단계 : 싱글 써클 Lv.4]

[주위의 마나를 흡수합니다. 흡수한 마나를 심장 둘레에 써클로 가공/증폭하여 운용합니다. 써클의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증폭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마나 증폭률 : %]

[다음 레벨업에 필요한 HP : 1,800]

[현재 보유 중인 HP : 2,500]

‘오옷!’

이보다 훌륭한 활력소가 있을까.

[아스라한 심법의 성장에 따라, 당신이 보유한 써클 슬롯도 함께 영향을 받습니다.]

[써클 슬롯의 저장공간이 확장됩니다.]

[1번 슬롯이 확장되었습니다.]

[1번 슬롯의 최대 용량 : 12리터 -> 13리터]

통증을 참느라 혼미해지려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덕분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하루하루가 지났다. 매일 오후마다 꼬박꼬박 하나씩, 총 15개의 담석을 깼다. 아스라한 심법은 싱글 써클 6레벨로 상승했다. 써클 슬롯의 용량도 무려 15리터로 확장되었다.

그런 덕분이었을 것이다.

체외충격파가 주는 충격을 버텨내는 일이 한결 익숙해졌다. 마치 맷집 단련을 하듯이 써클이 튼튼해졌다. 써클 슬롯이 단단해졌다. 복근도 조금은 질겨졌다. 인내심도 늘어갔다. 덕분에 전처럼 쉽게 기절하지는 않게 되었다.

“대신 이렇게 헛구역질만 하는 걸로 거뜬히, 남자답게 참아낼 수 있게 되었지요. 오애애애액-”

“…….”

“걱정 마시지요. 그저 헛구역질일 뿐입니…… 오애액-”

“…….”

“아니 왕녀께선 왜 계속 그런 눈으로…… 오애애액-”

“……그 헛구역질, 저쪽으로 가서 해주시면 안 될까 싶어서 말이지요.”

“하지만…… 우읍, 담석이 잘 깨졌는지 확인을 좀 해봐야…….”

“그 오애액, 한 번만 더 하면 명치를 콱.”

“…….”

“들어갔죠? 헛구역질.”

“옙.”

“후후후.”

“…….”

라키엘은 목구멍에 하이킥을 날려대는 헛구역질을 가까스로 밀어 넣었다. 자신보다 머리 반 개는 키가 큰 왕녀였다. 어릴 때부터 격투를 연마한 덕분인지 피지컬마저도 탄탄했다. 그런 왕녀가 앞에서 으르렁거리니, 절로 공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오, 내가 한국에서의 몸 정도만 됐어도!’

배는 조금 나왔었지만 그래도 멸치는 아니었는데. 라키엘은 비분강개의 심정을 삼키며 웃었다.

“자꾸 그렇게 위협하시면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으면요?”

“강대국 황가의 권력을 무자비하게 휘둘러 버릴까 합니다만.”

“……치사하게.”

“뭐 어쨌건. 열다섯 번째 담석도 잘 깨졌군요. 과정이 순조로우니까 이대로 며칠만 더 치료를 하면 남은 담석도 전부 처리할 수 있을 듯하고요.”

“그런가요? 벌써?”

“예.”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녀님께서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신 덕분입니다. 발출하시는 충격파가 워낙 묵직하고 강력해서.”

“담석이 잘 깨진다는 거죠?”

“예. 제 생명력도 종종 같이 깨질 것 같은 위협이 느껴지지만 말입니다.”

“또, 또. 그렇게 양심 찌르신다.”

“사실이잖아요?”

“……쓰읍. 미안해지게.”

“차라리 고마워하시죠.”

“고마워하라는 말씀은, 어쩐지 보답을 하라는 뜻으로도 들리는데요?”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럼 황태자께선 제 어떤 보답으로 비로소 만족을 하실까요?”

“으음, 예를 들자면-”

“들자면?”

“우리 마젠타노를 상대로 전쟁만 안 일으켜주면 좋겠습니다. 평생 동안.”

나름의 진심을 담아서 아델린에게 말했다. 그 말에 그녀가 멈칫했다.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상당히 노골적인데 뭔가 묘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과 마주하니 절로 어깨가 움츠러졌다.

“왜, 왜요?”

왜 저렇게 빤히 쳐다보는 걸까. 설마 이쪽이 방금 꺼낸 말이 어딘가 선을 넘은 걸까. 아델린은 이쪽의 물음에 대답을 하진 않았다. 대신 더욱 아리송한 말만 꺼냈다.

“글쎄요. 갑자기 너무 뜻밖의 말씀을 하셔서.”

“…….”

뭐가 뜻밖이란 걸까.

“게다가 황태자님 같은 분은 뭐랄까…… 신기할 정도로 처음이라서.”

“…….”

대체 무슨 뜻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아리송한 말을 마친 그녀가 이쪽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는 것이었다.

“어쨌건 오늘의 진료는 여기까지라는 거군요.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그럼 내일 뵙죠.”

“아, 예…….”

사람 마음 같은 거.

여자 마음 같은 거.

정말로 모르겠다.

난 그냥 바라는 걸 솔직하게 슬쩍 밝혔을 뿐인데. 왜 저런 눈빛으로 사람을 쳐다보며 묘한 미소를 머금는 걸까. 어째서 진료실에서 뒤돌아 나가면서도 은근슬쩍 두 번이나 이쪽을 돌아보는 걸까.

아리송했다. 그래서였다. 그저 멋쩍게 웃어 주었다. 물론 이쪽도, 그녀도 이때까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치료를 위해 매일 이쪽의 진료실을 드나드는 왕녀 아델린. 그녀에게 오후 진료 시간을 통으로 할애하고 있는 이쪽. 그런 우리 둘을 두고서, 별궁의 모든 사람들이 묘한 이야기를 숙덕거리고 있음을. 그 숙덕거림이 소문이 되고, 풍문이 되어 황도 전체로 번져가고 있음을.

그 이야기가 마침내 뇌졸중 재활치료를 받던 황제의 귀에까지 닿게 될 것임 또한. 이때까지만 해도, 정말로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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