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정성과 신뢰 사이 (1)
착각했다.
내가 잘못 알았다. 아니,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그쯤은 당연히 생각했어야 했는데. 뻔한 사실을 떠올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당신, 설마…….”
왕녀 아델린은 말을 잇지 못했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라키엘의 안색이 너무나 창백했다. 식은땀 가득한 얼굴 아래, 입술마저도 파랗게 질려 있었다.
어째서?
왜?
보는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나 때문에.’
아니, 나 대신 충격파를 감당하느라고. 명치를 향해 발출했던 마나가 주었던 충격. 담석을 수차례 때리고 깨부수었던 충격. 그 충격의 여파를 모두 라키엘이, 황태자가 받아내고 감당한 거였다.
‘충격파가 사라진 게 아니었어.’
실은 그게 당연했다.
단순히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치기만 해도 그 충격이 주위에 번지는데. 그런데 뱃속으로 발출한 강력한 마나의 여파가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사라질까.
불가능하다, 그런 일은.
발생한 충격은 반드시 어딘가로 전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그 충격을 전부 황태자가 감당하느라, 사력을 다해서 버텨내느라 이런 모습이 된 거다.
“황태자 당신, 괜찮아요?”
아델린의 목소리가 절로 떨려 나왔다. 라키엘은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쓴웃음만 입술 끝에 희미하게 내걸었을 뿐.
‘이거…… 생각보다 엄청나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머릿속이 온통 윙윙 울렸다. 피부는 차갑고, 가슴은 쿵쿵 뛰었다. 어지러워서 토할 것만 같았다. 데미안과의 연습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왕녀의 마나…… 이렇게까지 엄청날 줄은 몰랐는데.’
아스라한 심법으로 왕녀의 마나를 끌어들였다. 담석을 정확하게 때리게 유도했다.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마나와 담석이 부딪치며 필연적으로 생성되는 충격파가 문제였다. 그걸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충격파가 번지면 담낭과 주위의 내장 조직이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간, 췌장, 십이지장, 복막까지. 다른 애꿎은 장기에 타격이 가면 곤란했다. 무조건 막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였다.
아스라한 심법으로 충격파를 끌어들였다. 흡수했다. 자신의 마나써클로 유도했다. 감당하고, 중화했다. 그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쿨룩, 콜록!”
한 번 흡수할 때마다.
한 대씩 감당해낼 때마다.
몽둥이로 가슴을 때리는 듯한 충격이 전해져 왔다. 강맹한 마나의 여파가 가슴을 통해 전신의 혈맥으로 번졌다. 후려쳤다. 온몸이 아프도록. 기절할 만큼이나.
“황태자님? 이봐요?”
왕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쳐다보았다. 다행히 멀쩡한 모습이었다. 만족스러웠다.
“다행…….”
힘겹게 웃었다.
왕녀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대체 왜? 어째서?”
이쪽이 한 짓(?)을 비로소 깨달은 걸까. 허물어지려는 이쪽을 붙잡고 그녀가 물어왔다. 대답으로 떠오르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내 환자니까.”
“……네?”
“진료를 받기로 결정한 이상…… 당신은 내 환자니까.”
그게 당연한 거다.
환자와 나.
둘 중에 하나가 아파야 한다면 그건 내가 되어야 한다. 환자는 자신의 아픔을 덜기 위해 날 찾아온 사람이니까. 응당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각오했다. 이렇게 하자고. 힘껏 버텨 보자고. 해낼 수 있다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독려하며. 무너지고 싶을 때는 독촉하고 채찍질하며. 그렇게 버텼다. 버텨냈다. 해냈다. 첫 담석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뿌듯했다.
“그러니까 난 좀…….”
쉬어야겠다.
더는 못 버티겠으니까. 너무 어지러워서 눈이라도 감고 싶으니까.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고 있으니까.
졸리다.
이제 더는.
“……황태자님?”
다리가 풀렸다.
중력이 온몸을 끌어당기는 감각. 내리깔리는 눈꺼풀 속에 짓눌리는 기분. 의식이 흐려졌다. 왕녀의 무어라 외치는 소리와 오장육부가 놀라며 꺼내는 아우성. 그 모든 감각이 삽시간에 멀어졌다.
눈앞이 어둠에 잠겼다. 이곳에서 나는 편안할까.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잠깐은 쉴 수 있게 되었다는 것.
“…….”
그거면 됐어.
만족스럽다.
♣
방금 했던 생각은 취소.
이건 만족스럽지 않다. 간신히 기절을 했는데, 이렇게나 노골적인 꿈과 마주하는 상황은 절대로, 만족스럽지 않다. 아니, 오히려 난감하기만 하다.
“…….”
나는 눈살을 찡그렸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추억 속 익숙한 광경이 보였다. 낡은 24평 주공아파트 현관. 그 너머로 보이는 낯익은 구조의 거실과 주방. 보는 순간 어디인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20대까지 살았던 집이다.
처음엔 부모님과 함께. 나중에 나 혼자 남아. 그렇게 살다가 나왔던 집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그 집에서 살았던 날들 중에서 가장 극적으로 참담한 기분을 느껴야 했던, 그런 순간이었다.
내가 전역을 했던 날이니까. 전역을 하고 집에 왔는데 맞이해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으니까. 엄마가 이미 세상을 떠나신 뒤였으니까. 그런데 왜 하필 나는 이 순간을 꿈으로 보게 된 걸까.
“……후우.”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꿈인데도 그 감각마저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현관 거울에 비쳐 보이는, 군복을 입은 20대 시절의 내 모습마저도 지나치게 실감이 나서 오히려 믿기지가 않았다.
‘왜 이런 꿈을 꾸는 거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보는 거실. 청소가 된 지 한참이 지나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소파. 그날 보았던 그대로의 광경 속에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문득, 과거의 이날에 머금었던 다짐을 새삼 떠올렸다.
‘그래. 나는…….’
억울하다고 생각했더랬다.
아버지를 뇌졸중으로 잃었다. 어머니를 암으로 보내드려야 했다. 삽시간에 혼자가 되어 버린 현실이 억울했다. 미웠다.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긴 거냐고. 어째서 나만 이런 식으로 혼자가 되어 버린 거냐고. 할 수만 있다면 누군가에게 따지고 싶었다.
그래서 이곳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던가. 그 끝에 남몰래 다짐을 했던가. 사람 살리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나 같은 일을 겪는 사람을 돕고 싶다고.
그때 처음으로, 막연하게나마 그런 생각을 잠깐 해보았던 것 같다. 그 후로도 돈이라는 현실의 벽 때문에 잠시간 방황을 했지만, 끝내는 그 다짐을 새삼 떠올리며 용기를 얻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 한의대를 들어갔다. 한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날의 다짐은 금방 색이 바랬던가.
“…….”
나는 비교적 금방 속물이 되었던 것 같다. 순수하게 사람을 살리겠다는 다짐? 나 같은 사람을 돕겠다는 각오? 금방 잊었다.
혼자 세상을 살아가며, 살아남으며, 어느 사이엔가 잊어버렸다. 현실과 타협했다. 남들처럼 돈을 버는 일에 집착했다. 그게 살아가는 방법이었으니까. 당연한 거라고 여기며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지금까지 줄곧, 속물의 얼굴로 숨 쉬며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죽기 싫으니까.’
보너스 수명을 얻겠다고. 병원을 차리고. 사람을 모으고. 남을 돕겠다는 생각? 그보단 내가 먼저 살겠다는 생각 하나. 오직 그것만을 붙잡고 살아가는 지금의 나.
‘그렇다고…… 나쁜 건 아니잖아?’
애써 합리화하며 웃었다.
낡은 거실을 둘러보았다. 지금 내가 바라는 건 한 가지다. 이런 꿈, 이쯤에서 대충 끝내고 다른 꿈이나 꾸었으면 싶다.
가슴이 아픈 건 싫으니까.
이제는.
좀.
괜찮아지고 싶다.
♣
“다행히 이젠 괜찮으십니다.”
고요한 침실에 가르딘 경의 목소리가 울렸다. 왕녀 아델린은 참고 있던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러한가? 정말로 황태자께서는 괜찮으신 건가?”
“예, 앙부아즈의 왕녀시여.”
가르딘 경이 청진기를 주섬주섬 챙겼다. 여전히 의식을 찾지 못한 황태자 라키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호흡도, 맥박도 모두 정상이십니다. 열도 없고 말입니다.”
“그럼 어째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거지?”
“아마도 짧은 시간에 급격히 무리를 하신 탓이겠지요. 몸이 자연스럽게 휴식을 원하며 깊은 숙면에 빠지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대로 푹 주무시게 놔두는 게 최선이겠지요. 별일은 없을 겁니다.”
가르딘 경이 희미하게 웃었다.
사실은 누구보다도 놀랐던 그였다. 별궁의 입원 환자들을 돌보던 중이었던가. 황태자 전하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던 때는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던지.
“원래부터 체질이 건강한 분은 아니십니다. 실은 매우…… 허약한 체질을 타고난 분이시지요.”
“그런가. 내가 큰 폐를 끼쳤군.”
“아닙니다, 앙부아즈의 왕녀시여. 실은 전하께서 제게 미리 당부하신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당부? 그대에게?”
“예, 왕녀시여.”
가르딘 경이 전날의 기억을 되짚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왕녀님을 치료해드리는 일이 전하 당신께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 되리라고. 어쩌면 기절할 정도로 힘겨울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너무 놀라지는 말라고 제게 미리 당부를 하셨지요.”
“……그렇다고 그대가 놀라지 않은 건 아닌 듯한데.”
“왜 아니 놀라겠습니까.”
가르딘 경이 자리에 앉았다. 아델린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실은 전하께서는 종종 이러십니다.”
“종종? 이러하신다고?”
“예, 왕녀시여. 언제나 전하 당신보다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분이셔서 말입니다.”
“…….”
오늘처럼.
아까처럼.
그런 건가.
아델린은 문득 생각했다. 자신의 명치를 향해 발출했던 강맹한 마나. 그럼에도 타격이 느껴지지 않던 뱃속의 신기한 감각. 사실은 그것이 황태자의 희생 덕분이었음을.
‘진료를 받기로 결정한 이상…… 당신은 내 환자니까.’
“…….”
황태자의 말이 떠올랐다. 가르딘 경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항상 걱정입니다. 저는 황태자 전하의 유일한 주치의니까 말입니다. 제가 돌보아드려야 하는데. 그게 당연한 일인데. 제가 챙겨드려야 할 분이, 되레 남들을 돌보느라 이토록 힘겨워하시는 걸 볼 때마다 저는…… 후우.”
“…….”
아델린은 보았다.
가르딘 경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덤덤한 듯 말하면서도 가슴이 아픈 탓이리라. 한데도 주군을 쉽사리 말리지 못하는 까닭이리라. 그만큼 황태자의 마음이 진심이라서 그런 걸까.
“…….”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황태자는 그런 사람인 듯하다. 한 사람이라도 대가 없이 챙기려는 마음. 환자를 위해서라면 희생도 기꺼이 감내하는 용기. 그 일념으로 움직이는, 그런 사람이었던 듯하다.
그렇기에 아까 보았듯 수많은 환자를 대가 없이 돌보는 것이겠지. 그러니까 날 여기로 부르고, 내게 자각 못 하던 병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그걸 고쳐주겠다고 나선 것이겠지.
‘그 모든 행동이…… 진심이었던 거야.’
그렇지 않다면 오늘 같은 희생을 하였을 리가 없다.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부끄러웠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을 믿지 못했던 자신이. 의심하고 미워했던 옹졸한 자신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
아델린은 조용히 손을 뻗었다. 잠든 라키엘의 손등을 조심스레 토닥였다. 그녀의 라키엘을 향한 눈빛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어쩌면 그런 덕분이었을 것이다.
딩동!
[환자를 향한 당신의 헌신적 행동이 한 사람의 마음속에 감동을 불러왔습니다.]
[사실 이러한 당신의 헌신은 개인적인 이기적 목표를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환자에게 닿은, 당신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마음만은 진심이었습니다. 이러한 헌신과 진심은 앞으로도 수많은 긍정적 변화를 불러올 것입니다.]
[환자 : 아델린과 당신 사이에 최고 단계의 의료적 신뢰도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제 환자 : 아델린은 당신의 진료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를 것입니다. 그녀는 당신의 어떠한 의료 행위에도 의심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의심으로 가득하던 환자의 마음을 완벽하게 얻어내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이에 오장육부가 당신을 진심으로 성원합니다.]
[오장육부가 1,5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당신이 보유한 HP : 2,500]
잠든 라키엘의 의식 속으로. 스스로를 자책하는 그의 눈꺼풀 앞으로. 고요 속의 훈훈한 메시지가 조용히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