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18화 (118/468)

118화. 등 뒤의 개소리 (3)

서컥.

사혈 도구가 섬뜩하게 빛났다. 병사의 멀쩡한 정맥을 잘랐다. 샹드르의 눈빛에 확신 가득한 아집이 서렸다.

‘좋았어.’

자고로 나쁜 것은 몸에서 최대한 덜어내어야 한다. 몸에 나쁜 기운이 깃들었다면 빼내야 한다. 그런데 몸에서 제일 뽑기 쉬운 것은?

‘바로 혈액이지.’

혈액이야말로 생명의 근원. 모든 생명을 온전하게 해주는 근본.

그렇기에 몸에 병이나 크게 다친 곳이 생기면, 혈액 또한 오염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실은 비단 그의 생각만이 아니었다. 대학에서 그렇게 배웠다. 그의 스승도, 스승의 스승도 똑같은 가르침을 이어받았다.

‘그러니 당연히 이런 치료법이야말로 올바른 진리지.’

몸에 생겨난 오염된 피를 빼주면 된다. 최대한 많은 피를 뽑아내어야 한다. 그러면 오염된 피가 빠져나온 만큼 몸에 빈자리가 생겨날 것이다.

하지만 생명이 무엇인가.

‘빈 곳이 있으면 빠르게 채워지는 법. 그게 생명인 법이야.’

오염된 혈액이 빠져나가면 생겨나는 빈자리. 그곳에 새로운 피가 채워질 것이다. 갓 탄생한 맑고, 깨끗하고, 순수한 피가 온몸의 병마를 말끔하게 씻어줄 것이다.

그러면 된다. 어떤 병이라도 낫게 된다. 큰 부상도 빠르게 털어낼 수 있으리라.

샹드르는 그러한 믿음을 철석같이 유지하며 바쁘게 움직였다. 방금 잘라낸 병사의 정맥 팔뚝 아래에 양동이를 갖다 댔다. 피를 받아낼 양동이였다.

한데 그러던 와중이었다.

“……으, 음?”

잠들어 있던 병사가 얼굴을 찡그렸다. 졸지에 칼질(?)을 당한 팔이 따끔했던 걸까.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눈매가 휘둥그레지는 건 금방이었다.

“어? 어어?”

병사는 깜짝 놀랐다.

그저 잘 자던 자신이었다. 다리의 칼 맞았던 자리가 봉합이 잘되었다고. 다행히 근육도 잘 붙었고, 절단 수술은 필요 없을 것 같다고. 앞으로 연고 잘 바르고 푹 쉬면 천천히 나을 거라고. ‘성자’라고 불리는 리한 군의관의 격려와 위로를 받았던 터였다.

그래서 안심했더랬다.

푹 자고 있었더랬다.

한데 팔이 따끔해서 깨어 보니,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어어, 이게 무슨……!”

당황한 병사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한데 억센 손아귀가 병사의 어깨를 지그시 잡아 눌렀다.

“쉿.”

“……!”

“나는 군의관 샹드르라고 하네. 치료 중이니 경거망동하지 말게.”

군의관이라니.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병사는 피가 줄줄 흐르는 자신의 팔뚝과 샹드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구, 군의관님……이시라구요?”

“그렇다네. 자네는 내 치료를 받는 중이고.”

“하지만, 저기, 군의관님?”

“음?”

“처음 보는 얼굴이신데…….”

“아까 낮에 파견을 왔다네. 왜? 뭐가 이상한가?”

“그…… 저는 아까 낮에 수술을 받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리한 군의관님께서, 이젠 그냥 쉬면 된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왜 갑자기 오밤중에 찾아오셔서 제 팔뚝에서 피를 빼고 계신 건지…….”

“그래서?”

“…….”

“감히 일개 병사 주제에, 군의관인 내 치료법에 의심을 품겠다는 건가?”

샹드르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병사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니, 그, 그런 말씀이 아니라…….”

“아니면?”

“이런 치료를 받을 거라는 이야기를 미리 듣지를 못해서…….”

“여기 캠프에 부상병이 자네밖에 없나?”

“……예?”

“다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일일이 이런저런 치료를 할 거라고 꼬박꼬박 알려 줘야 하나? 자네 같은 부상병한테?”

“그건…….”

“자네, 귀족인가?”

“아, 아닙니다.”

“아니야?”

“예, 군의관님.”

“그럼 어떤 치료라도 감사히 받아. 평소 같았다면 자네처럼 내세울 가문도 없는 일개 부상병은 나 같은 사람한테 치료받을 꿈도 못 꿀 테니까. 운이 좋은 줄 알라고. 알았어?”

“…….”

“알았어?”

“알겠습니다…….”

병사가 고개를 숙였다. 사실 대단히 찜찜하고 켕겼다. 샹드르라고 이름을 밝힌 군의관의 위압적인 말투도, 안하무인인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낮에 자신을 치료해준 리한 군의관이나 가르딘 경과는 너무나 다른 태도였다.

‘그분들은 나 같은 일개 병사들한테도 똑같이 친절하셨는데.’

리한 군의관과 가르딘 경은 달랐다. 어떤 부위를 어떻게 다쳤는지 꼼꼼히 이야기를 들으려 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려 했다. 하여 앞으로 어떤 치료를 할 거고,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할지를 자세히 설명해 주곤 했다.

한데 눈앞의 이 샹드르라는 군의관은?

‘무슨 은혜라도 베푸는 듯이 굴고 있잖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드러낼 순 없었다. 말 그대로 자신은 그저 일개 병사일 뿐이니까. 군의관에 비하면 한참이나 낮은 계급이니까. 그저 입을 다물고 복종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이런 치료, 괜찮나…….’

병사는 자신의 팔뚝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줄줄 흘러나오는 피가 아래쪽에 받친 양동이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와 담긴 피를 보는 기분이 이상했다.

손끝이 저려 왔다. 발가락이 찌릿찌릿해졌다. 입술이 점점 차갑게 느껴졌다. 순간, 천막 내부를 밝힌 기름 램프 불빛이 두 개로 겹쳐 보였다.

‘……어?’

내가 왜 이러지.

왜 갑자기 어지러운 거지.

속이 뒤집힐 것 같아.

‘토하고 싶어.’

병사는 급격한 현기증을 느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샹드르에게 말했다.

“저, 저기…… 군의관님?”

“그래. 몸이 좀 가뿐해지는 기분이 드나?”

“아, 아뇨. 그게…… 좀 어지러워져서…….”

“어지러워져?”

“예…….”

“쯧. 오염된 피를 빼냈는데 그럴 리가.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쯧쯧! 조금만 더 참아 보게. 다 자네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닌가.”

“그래도…….”

“어허.”

“군의관님…… 저…… 진짜로…….”

이제는 군의관의 얼굴이 마구 일그러져 보였다. 혹시 인상을 쓰는 걸까. 아니었다. 그냥 진짜로 온 세상이 다 일렁거렸다. 이쪽을 향해 뭐라고 하는 군의관의 입이 다섯 개로 겹쳐 보였다.

흔들렸다. 촛불도. 천막 내부도. 침상과 바닥에 놓인 양동이도. 그 안에 고여 가는 핏물도. 전부.

“……끄윽.”

풀썩.

결국, 더 견디지 못한 병사가 옆으로 스르륵 무너지며 혼절하고 말았다.

“어? 이봐? 이보게?”

당황한 샹드르의 목소리가 천막을 채웠다.

“…….”

당황스럽다. 푹 자다가 깬 라키엘이 처음 떠올린 생각이었다.

‘방금 내가 무슨 꿈을 꾼 거지.’

꿈에 아버지가 나오셨다.

당장 일어나라고.

눈을 뜨라고.

아버지가 근엄하게 호통을 치셨던가.

‘이건 무슨 야인시대도 아니고.’

라키엘은 황당한 심정으로 웃어 버렸다. 야전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시 잘까 싶었지만, 이미 잠이 죄다 달아나 버린 터였다.

‘밤하늘이나 보고 올까.’

의미 없이 뒤척거릴 바엔 차라리 걷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곳 세계의 밤하늘은 정말로 아름다우니까. 하늘을 가득 채운 은하수와 별빛은 한국에선 볼 수 없던 광경이니까.

그는 천막을 빠져나왔다. 시원한 밤공기를 마셨다. 한편으로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여기 군의관들, 생각보다 훨씬 쓰레기였어.’

아까 낮에 파견을 왔다는 자들.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인간들이었다. 부상병을 귀족과 아닌 자로 구분해야 한다니. 그래야 주머니가 두둑해지고 든든한 후원을 받을 거라니.

설령 그런 생각을 한다고 쳐도, 그걸 대놓고 입 밖으로 당당하게 말하는 점이 쇼킹 그 자체였다.

‘쯧. 도움도 안 되는 놈들은 생각하지도 말자.’

그러니 앞으로도 그냥 무시하자. 대강 파견 기간만 때우게 하고 보내 버리자.

‘어차피 나야 보너스 수명만 빵빵하게 얻으면 되니까.’

그게 자신의 할 일이다.

이곳에 온 이유다.

보너스 수명을 떠올리는 라키엘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앙부아즈로 온 지 2개월째. 그동안 얻은 보너스 수명이 제법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 : 283일]

‘후후후. 흐흐후후후.’

처음 앙부아즈의 내전 발발 소식을 들었을 땐 170일 남짓 남았던 자신의 예상 기대수명이었다. 한데 이곳에 와서 2개월 남짓한 동안에 저만큼 팍팍 늘었다. 볼수록 흐뭇했다. 또 봐도 더 므흣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이렇게 지낸다면?

‘기대수명이 1년은 넘게 쌓이겠지.’

그러면 덜 초조해하며 살 수 있으리라. 시한부 인생이라는 압박도 제법 덜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동안은…… 좀 그랬으니까.’

기대수명이 200일 넘게 쌓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항상 백몇십 일, 때론 100일 이하로 떨어진 채로 지내야 했다.

고작 몇 개월 뒤에 자신이 죽을 거라는 압박감. 덕분에 쫓기듯 살아야 하는 초조함. 스트레스와 공포. 더는 겪기 싫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압박감에 시달리며 살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한의원 꾸릴 때 그랬지. 코로나 때문에 엄청 어려워졌을 때. 수입은 뚝 끊겼는데, 가만히 있어도 임대료와 대출 이자는 줄줄 빠져나가고 말이야.’

말 그대로 통장의 돈이 줄줄 새어나갔다. 앞으로 몇 개월을 버틸 수 있을까. 지금 남은 돈이 얼마니까. 앞으로 얼마가 들어올 것 같고. 다음 달 임대료와 이자는 얼마가 나갈 테니까. 대강 언제까진 버틸 수 있겠구나.

하루에도 몇 번씩 그렇게 피 마르는 계산을 하며 지냈던 나날이었다. 달마다 줄어드는 통장 잔고가 마치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영업자의 엄혹한 일상이었다.

이곳에 와서도 그랬다. 매일 가만히 있어도 하루씩 줄어드는 기대수명. 그걸 계산하며 앞으로의 일을 궁리하는 매일매일이 대한민국의 자영업자 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졌다.

‘후후…… 후후후!’

매일처럼 쑥쑥 쌓여가는 보너스 수명. 그걸 이렇게 볼 때마다 얼마나 흐뭇한지. 밤 산책을 즐기는 라키엘의 걸음이 한없이 가벼워졌다.

한데 그러던 와중이었다.

“……이보게? 어? 어어?”

적막한 캠프 어디선가 웬 말소리가 들려왔다. 당혹감에 물든 목소리였다. 그 소리에 라키엘은 탭댄스를 밟던 걸음을 멈추었다.

‘뭐지?’

귀를 기울였다. 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들려왔다.

“정신 차리게. 이봐? 응?”

철썩, 철썩!

한결 당황한 목소리.

뺨을 치는 듯한 소리까지.

그 소리들이 부상병들의 회복 전용 천막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갓 수술을 마치고 절대안정을 취해야 할 병사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1인 전용 회복 천막들이 있는 곳이었다.

“…….”

이상한데.

라키엘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동안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어이! 눈 좀 떠보라니깐? 감히, 내 말을 안 들을 건가?”

철썩! 철썩!

“일개 병사 주제에!”

철썩! 철써덕!

“…….”

낯설지 않은 목소리다.

누구?

기억이 났다.

아까 낮에 개소리를 지껄이던 놈. 그러다가 주먹질에 맞고 기절했던 놈. 이름이 샹드르라고 했던가.

‘그런데 왜 그놈 목소리가 이쪽에서 들리지?’

뭔가 쌔한 기분이 들었다. 라키엘의 걸음이 빨라졌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천막을 찾아냈다. 천막 입구를 확 걷었다. 그리고 목격했다.

“…….”

팔뚝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안색으로 기절한 병사. 그런 병사의 뺨을 다급하게 후려치고 있던 샹드르.

놈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놈과 눈이 마주쳤다.

“어?”

놈의 눈이 커졌다.

라키엘의 눈빛이 살벌하게 식었다.

“……너, 지금 내 보너스 수명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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