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19화 (119/468)

119화. 성자 탄생 (1)

“너, 지금 내 보너스 수명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살벌하게 싹 가라앉은 목소리.

라키엘은 서늘하게 내리깔린 눈길로 천막 안쪽을 훑어보았다. 안쪽의 광경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병사가 팔뚝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기절해 있었다. 아까 낮에 다리 수술을 받았던 병사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뭐, 뭐요? 내가 지금 치료 중인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오?”

샹드르가 눈을 피하지도 않고 대꾸해 왔다. 놈의 손에 들린 칼이 보였다. 병사의 팔 아래에 받쳐둔 양동이도 보였다. 양동이에는 이미 받아낸 피가 흥건했다.

그걸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사혈요법?’

문득 떠오르는 이름. 언젠가 근대 의학의 역사 서적을 통해 보았던 내용이 기억났다.

그리 오래된 역사도 아니었다.

고작 지금으로부터 2~300년쯤 전인 18세기. 당시만 해도 몸에서 더러워진 피를 뽑으면 사람이 건강해진다는 믿음이 파다했다. 심지어 의사들도 그런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고 했던가.

‘특히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의사였던 존 브라운이었나. 그 작자는 생명이 지속적인 신체의 자극에 의존한다는 류의 브루노니언 시스템(Brunonian System) 이론을 주장했지. 그래서 질환이 생겼을 때 더러워진 피를 몸에서 강제로 최대한 많이 뽑아낼수록 자극이 커지고, 그만큼 신체가 회복된다고 여겼다던가.’

……미친 이론이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그게 유행이었다고 했다. 심지어 나폴레옹의 군대에서 복무하다가 외과 의무관으로 승진한 프랑소아 빅터 브루세라는 자는 그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아예 거머리를 사혈요법에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그 의사는 모든 병이 위장관에서 비롯된다고 믿었지. 그래서 어떤 환자가 오더라도 일단 무조건 굶겼어. 금식을 시키면서 거머리를 온몸에 붙였지. 심한 경우에는 한 번에 50마리까지.’

그렇게 굶기면서 피를 쭉쭉, 빨아들이면 사람이 낫는다고 여겼다. 물론 수많은 환자가 그 잘못된 믿음 때문에 죽었다. 하지만 당시의 의사들은 반성하지 않았다. 사혈요법 끝에 환자가 죽어도 그 원인을 제대로 탐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은 최선을 다해서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을 시행했지만 환자가 견디지 못해서, 불운해서 죽은 거라고 치부했지.’

그렇게 브루세의 거머리 요법이 최신(?) 의술로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이 1820년에서 1845년까지의 무렵이었다. 최첨단의 21세기로부터 고작 200년 남짓한 과거였다!

말 그대로 나약한 자는 살아남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한데 그런 꼴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고도 오히려 당당한 반응을 보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왜 대답이 없으시오? 나도 군의관이오. 그러니까 한밤중에 피로를 무릅쓰고 부상병을 치료하고 있는 것이고. 한데 당신이 무슨 권리로 내 치료에 간섭을 한단 말이오?”

샹드르의 더욱 커진 목소리가 고막을 푹 찔러왔다. 라키엘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분노의 감정이 스멀스멀. 뒷골이 절로 뻐근해졌다.

그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샹드르를 추궁했다.

“피로를 무릅쓰고 부상병을 치료? 지금? 그 짓거리가?”

“……짓거리?”

“그래. 지금 그쪽, 뭐 하고 있던 거지?

“보면 모르오? 피를 뽑고 있었지 않소.”

“피를 왜.”

“그래야 건강해지니까!”

“…….”

“보시오. 지금 병사가 정신을 잃었지 않소? 더러운 피가 빠지니까 몸이 열심히 싸우고 있다는 증거요. 그러니 이걸 이겨내기만 하면 이 병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죽겠지.”

“……뭐요?”

샹드르가 눈썹을 찡그렸다. 라키엘의 서늘한 일침이 이어졌다.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지혈해. 그 병사 진짜로 죽기 전에.”

“지금 무슨 말을…….”

“비켜.”

더는 못 보겠다.

이따위 의미 없는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에도 병사의 팔뚝에서는 애꿎은 출혈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진짜 과다출혈로 죽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 수도 있다.

라키엘은 더는 참지 못했다.

‘이러다 생사람 잡겠어.’

겨우 20살 남짓한, 앞날이 창창한 병사였다. 마침 적절한 치료를 잘 받고서 멀쩡히 회복기에 들어서던 환자였다. 한데 그런 목숨이 눈앞에서 어이없게 꺼져가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는 성큼 걸음을 내밀었다. 샹드르를 밀쳐냈다. 놈의 의료도구함에 있는 두툼한 천 조각을 집어 들었다. 병사의 팔뚝을 꽉 눌렀다. 천 조각이 금방 검붉게 물들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오!”

흥분한 샹드르가 옆에서 소리쳤다.

“한창 순조롭게 치료가 진행되는 중이었소. 그런데 왜 이러는 거요? 이래도 되는 거요? 아무리 성과가 좋은 캠프의 군의관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무례하지 않소!”

“…….”

“이런 식으로 경쟁자를 억누르려는 거요? 무례하고 또 무례하오. 비겁하고 불공평하오. 대체 당신이 무슨 권리로 남의 치료를 마음대로 중단시키는 건지 그 이유를 반드시 들어야겠소!”

“…….”

“왜 대답이 없으시오? 이제 와서 항의를 들으니 할 말이 없어진 거요? 그렇다면 당장 비키시오! 이대로 치료를 애매하게 중단할 수는 없소. 이제 막 환자가 중대한 고비에 접어들려는 순간인데!”

“중대한 고비? 치료? 멀쩡한 사람을 죽이려던 게 아니라?”

“그게 무슨 소리요!”

“무슨 소리긴. 정곡을 찌르는 소리지. 지금 이 병사의 상태를 봐. 이게 회복이 되고 있는 사람 같나?”

“그야 당연히…….”

“죽어가고 있어. 과다출혈로. 그쪽이 제멋대로 멀쩡한 피를 뽑아낸 덕분에.”

“…….”

그제야 샹드르의 입이 닫혔다. 라키엘의 신랄한 지적이 이어졌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해 볼까. 그쪽, 내가 여기 올 때까지 뭐 하고 있었지? 난 봤는데. 이 병사의 뺨을 후려치고 있었지. 안 그래?”

“그건…….”

“일어나라고. 눈 좀 떠보라고. 당황해선 허둥거리며. 다 들리던데.”

“…….”

“말은 아니라고 우겨도 그쪽도 느끼고 있었겠지. 이 병사가 잘못되고 있다는 거. 그런데 그걸 인정 못 해? 눈앞에서 환자가 죽어가고 있는 걸, 그 원인이 잘못된 치료법 때문이라는 걸, 끝까지 인정을 못 하겠어?”

라키엘의 말끝에 울분이 서렸다. 말을 하다 보니 진심으로 더 화가 났다. 단지 보너스 수명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 샹드르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쪽 같은 놈들이 항상 문제야. 환자의 상태를 잘못 진단할 수도 있어. 잘못된 치료법을 선택할 수도 있어. 거기까진 이해해. 사람이니까. 의사도 인간이니까.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왜,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인정하지를 못하지? 왜 끝까지 발뺌을 하지?”

“…….”

“인정하면 자신이 못난 사람이 될까 봐? 잘난 명성에 흠집이 생기니까? 혹은, 책임을 덮어쓰게 될까 봐? 아니면, 어차피 죽은 환자는 항의를 못 하게 되니까? 정말로 그런 건가?”

“이보시오, 말이 너무…….”

“심하다고? 웃기는 소리. 지금 댁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 내가 하는 말은 폭언 축에도 끼지 못해. 아니, 폭언보다는 처벌을 받아도 감지덕지할 거야. 생각 같아선 당장에라도 자격을 박탈하고 감옥에 집어넣고 싶으니까. 그러니 충고 한마디만 하지.”

“그…….”

“이 자리에서 맞아 죽기 싫으면 입 닥치고 있어.”

“…….”

샹드르는 입을 다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쏘아보는 상대의 눈동자에 진심이 실려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농담이 아니야.’

정말로 죽일 듯한 눈빛이었다.

게다가 저런 눈빛으로 꺼내는 말마다 틀린 곳이 없었다. 너무나 정확하게 정곡을 찔러오고 있었다. 전부 다 사실이었다. 실제로 병사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으니까. 가슴이 철렁했으니까.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런 기분은 그사이에 이곳에 도착한 다른 군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

그들 대부분이 사혈요법의 신봉자였다. 환자의 몸에서 피를 최대한 열심히 뽑아내는 것이 최선의 회복법이라고 확신하는 이들이었다. 당연히 수많은 이들에게 그 치료법을 실행했고, 그만큼 많은 환자를 과다출혈로 죽였다.

하지만 지금껏 반성해본 적이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 환자가 버텨내지 못한 탓이라고. 자신은 잘못이 없노라고. 그렇게만 여겨왔다.

한데 방금 저 뚱땡이 군의관의 말을 들으니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동안의 자신이 틀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반발심도 들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자신이 틀렸을 리가 없다고.

“…….”

두 가지 상반된 생각 사이에서 군의관들은 침묵에 잠겼다. 과연 저자는 어떻게 할까. 우리의 사혈요법을 신랄하게 비판해놓고선 어떤 수로 저 병사를 살릴까.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는 심정으로. 또 한편으로는 낭패한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샹드르와 군의관들은 라키엘의 대응을 관찰했다.

“데미안? 가르딘 경? 마침 잘 왔어.”

소란을 듣고 달려온 두 사람의 모습에 라키엘의 표정이 풀렸다. 그가 빠르게 지시했다.

“데미안은 담요를 가져와. 최대한 두툼한 걸로. 여기 이 병사 몸을 덮어줘. 그리고 두 다리를 좀 들어주고.”

“다리를 말입니까?”

“몸에 남은 피가 최대한 주요 장기와 머리 쪽에 머무를 수 있게.”

“알겠습니다.”

데미안이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라키엘의 시선이 가르딘 경을 향했다.

“정맥이 잘렸어. 봉합하자.”

“알겠습니다.”

가르딘 경이 봉합 도구를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라키엘은 병사의 팔뚝에 지혈대를 감았다. 한편으로는 병사의 상태를 면밀히 진단했다.

‘진맥.’

딩동!

[진맥을 시작합니다.]

[스캔 중.]

[3…… 2…… 1……]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의 <종합검진표>를 확인해주세요.]

이내 주르륵 떠오르는 검진 결과. 라키엘의 눈길이 결과표 가장 아래를 향했다. 그곳에 병사의 상태를 알려주는 종합소견이 떠올라 있었다.

[종합소견 : 현재 과다출혈(Excessive Bleeding) 상태입니다. 체내 혈액량의 약 30%가 손실되었으며, 대뇌의 산소 공급량 저하로 의식을 잃은 상태입니다. 위험 수준의 혈압저하, 사지냉감, 말초순환부전, 쇼크 증상이 감지됩니다. 최대한 신속한 수혈 조치가 필요합니다.]

‘……난리 났네.’

라키엘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병사의 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그런데도 당장 손을 쓸 뾰족한 수가 없다는 점이 더욱 암담했다.

‘수혈이 필요해.’

그런데 수혈을 할 방법이 없었다. 병사의 혈관을 찌를 적절한 주삿바늘도, 혈액을 옮겨줄 튜브도, 수혈을 하는 동안 혈액이 굳는 것을 막아줄 항응고제도. 그 어떤 것도 없으니까.

‘이대로 지혈만 하고 치료를 끝내야 하나? 살아나길 그저 빌어야 하나?’

현실적으로는 그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기 싫었다.

이대로 둔다면?

상태가 좋아질 것 같지가 않았다. 이미 위험한 상황이니까. 결국엔 십중팔구 죽게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두고 싶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 했다. 자신의 보너스 수명을 위해서든. 병사의 생존을 위해서든.

‘잘못된 치료법만 신봉하는 개잡놈의 고집 때문에 죽으면 그건 개죽음이 되는 거잖아.’

그게 제일 싫었다.

어떻게든 살려내고 싶었다.

라키엘은 맹렬히 고민했다.

반드시 수혈이 필요한 상황. 바늘도, 튜브도 없는 상황. 그래서 혈관 대 혈관의 직접 수혈마저도 불가능한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라. 제발. 생각해.’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한데 자신도 모르게 과하게 깨문 탓일까. 아랫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그는 무의식중에 흠칫했다.

그리고 떠올렸다.

‘……있다.’

불현듯 머릿속에 번쩍 떠오른 생각. 발상. 혹은 기적의 치료법. 오직 자신만이 실행할 수 있는 방법.

그걸 떠올린 순간.

턱!

라키엘이 수술칼을 집어 들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손등 정맥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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