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적과의 동고동락 (1)
“이젠 어떡하실 겁니까?”
숙소로 안내받아 들어오자마자 질책하듯 귓가를 푹 찔러오는 데미안의 목소리. 달팽이관이 아플 지경이었다. 안다. 이쪽도 안다. 지금 상황이 결코 좋지 못하다는 걸.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ㅈ됐다는 걸.
하지만 라키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안내받은 숙소 실내를 죽 둘러보았다. 애초에 약속했던 예우답게 야전 천막치고도 굉장히 넓고 화려했다. 다만, 보안이 철저하다고는 못하겠다.
‘쉿.’
입술을 모으며 검지를 갖다 댔다.
그런 이쪽의 모습에 데미안이 움찔.
마침 야전용 간이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와 잉크, 펜이 보였다. 데미안 녀석과 가르딘 경을 번갈아 보며 필기구를 가리켰다.
‘누가 우리 이야기를 엿들을지도 모르니까. 필담으로.’
끄덕.
이쪽의 뜻을 알아들은 걸까. 두 사람이 옹기종기 이쪽으로 모였다.
라키엘은 펜을 잡았다.
- 하. 나도 몰랐거든. 내가 성자 군의관으로 소문이 났으니까. 지난번 수혈 때문에 사람한테 손만 대면 아픈 곳을 팍팍 낫게 해준다고 명성이 자자해졌으니까. 그래서 반란군도 내 치료 능력을 탐내는 거라고 생각해서 온 건데. 어오. 씨.
거기까지 쓰고서 펜을 놓았다.
가르딘 경이 펜을 이어받았다.
- 하지만 전하. 보셨다시피 여기서는 전하께 부상병을 맡길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큰일입니다. 여기에도 전하의 보살핌을 기다리고 있을 부상병이 제법 있을 텐데요.
데미안도 재빨리 펜을 잡았다.
-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무리한 시도를 하기보다는 그냥 황도의 별궁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거라고 말입니다.
- 쓰읍. 이럴 줄 알았냐, 내가.
라키엘은 혀를 찼다.
그의 펜이 종이 위를 빠르게 누볐다.
- 아니 설마 저 인간이 날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위한 선전용 도구로 쓸 거란 생각을 내가 했겠냐고. 나도 억울하거든? 여기 부상병들 치료하면서 보너…… 보람 좀 느끼려고 한 거거든?
사실이다.
정말로 솔직한 진심이다.
그냥 여기 와서도 왕국군의 힐링 캠프에서와 비슷한 일상을 보낼 줄 알았다. 그저 가득 쌓인 부상병들을 치료하며 보너스 수명이나 싹쓸이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반란군 수장 쟈빌론, 그 인간이 진짜.’
이쪽의 혁명군 지지 선언이 필요하단다. 날짜와 장소를 정해 줄 테니 지시에 따라서 열변을 토해 주면 된단다. 그러니 이제 죽어가는 병사들의 썩은 살점을 헤집거나 핏물을 흠뻑 덮어쓰는 험한 일 따위는 안 해도 될 거란다.
마치 이쪽을 배려하듯.
그게 최상의 예우인 것처럼.
그렇듯 정중하게 웃으며 말하는 모양새가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던지. 맞지도 않은 뒤통수가 얼얼해서 담이 걸렸나 싶을 지경이었다.
뒤늦게 사태(?)를 깨달았다.
그래서였다.
황급히 대꾸, 아니, 항의를 했더랬다.
- 그래서 나도 그거 싫다고 했거든. 부상병들 돌보는 일은 하나도 안 힘들다고. 험하지도 않다고. 오히려 나는 그게 보람이 느껴진다고. 그러니까 정치적 선언 같은 거 말고 부상병들을 맡겨달라고. 나는 그걸 하러 온 거라고 말이다.
그것 또한 사실이었다.
쟈빌론의 폭탄선언을 듣자마자였다. 찍 눌러진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반사적으로 저런 항의를 했다. 아예 호소하듯 말하기도 했다.
나는 부상병들이 너무 좋다고. 하루라도 그들을 돌보지 않으면 온몸에 가시가 돋아날 지경이라고. 밥도 안 넘어가고 잠도 못 이룬다고. 그러니 지금 당장이라도 부상병들을 몇 수레씩 싣고 오면 진심 행복해질 것 같다고. 맡겨만 달라고.
호소했다.
강력히 어필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쟈빌론은 그저 이쪽을 보며 빙긋,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었다.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눈도 깜빡하지 않고서 정중한 거절의 멘트를 톡 발사했다.
‘성자라 불리는 군의관, 리한이여. 그대의 뜻은 알겠소. 그 숭고한 마음도 잘 알겠소. 하지만 무릇 사람의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외다.’
‘……때라니요?’
‘할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 말이오. 예를 들자면…….’
‘설마.’
‘내 뜻을 알아채셨소? 눈치가 빨라서 좋구려. 이야기가 잘 통하는 듯하여 더욱 좋고 말이오.’
‘그러니까, 정치적인 지지 선언은 지금만 할 수 있지만, 부상병을 돌보는 일은 나중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뜻인 겁니까?’
‘정확하오.’
여전히 정중하게 웃던 쟈빌론. 하지만 웃음과 별개로 그의 태도는 단호박 그 자체였다. 이쪽의 요구는 들어줄 수 없단다. 지금은 공개적인 정치적 지지 선언이 최우선이란다.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라키엘은 펜을 열심히 움직였다.
- 어쨌건 이젠 인정해야겠네. 여기선 텄다, 텄어.
각이 안 보였다.
부상병을 맡겨달라고 어필하기엔 쟈빌론의 태도가 너무나 단호했다. 여기서 더 어깃장을 부리다간 쓸데없는 의심만 잔뜩 사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결론은 하나다.
- 손절하자.
“…….”
이쪽이 쓴 글귀에 데미안과 가르딘 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키엘은 재빨리 덧붙여 썼다.
- 이미 여기선 뭔가를 좋게 추진해 볼 가능성이 안 보이니까. 최대한 일찍 끊어내고 튀자고. 황도로.
- 동감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이쪽의 펜을 빼앗듯 낚아챈 데미안이 의문을 써 내려갔다.
- 어떻게 도망칠 생각입니까? 오면서 보니 이곳의 방비는 결코 허술하지 않던데 말입니다. 아니, 가장 어두운 밤의 시간을 빌려도 몰래 탈출하기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 어. 그건 나도 알아.
이곳은 엄연한 반란군의 야전 사령부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 지휘관들이 즐비하게 머무르는 중심부였다.
숨이 막힐 정도의 철통 보안과 방비는 기본이었다. 단지 초병이 많이 깔린 정도가 아니었다. 모든 경계 병력의 동선과 시야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거의 길목마다 CCTV가 20개쯤 깔린 듯한 경계 태세였다. 게다가 마법적 감지 장치와 함정도 제법 즐비해 보였다.
이걸 몰래 뚫고 나가는 건? 절대로 불가능하다. 데미안이 소드마스터가 되지 않는 한은 꿈도 못 꾼다.
하지만 희망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 나한테 생각이 있어.
- 방법이 있습니까?
- 어.
이쪽을 골똘히 쳐다보는 데미안. 녀석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 징징거려 봐야지.
“……예?”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던 걸까. 데미안이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반문했다. 하지만 라키엘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현재 시점에서 보이는 최선을 수행하리라 다짐할 뿐이었다.
다음 날부터였다. 라키엘의 징징거리기(?)가 실행되었다.
“……크으, 쿨룩! 쿨룩! 컥!”
“왜 그러시오, 리한?”
“죄, 죄송하지만…… 콜록! 쿠억, 켈록!”
반란군으로 깃발을 바꾸고 맞이한 첫 아침. 라키엘은 쟈빌론을 만나자마자 죽어가는 사람처럼 격한 기침을 연발했다. 아스라한 심법을 열심히 돌려서 이마와 얼굴을 뜨끈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얼굴 곳곳에 열꽃이 피어났다. 마치 열병에라도 걸린 사람 같은 모양새였다. 그 모습을 본 쟈빌론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설마, 병이라도 걸린 것이오?”
“저, 정말…… 콜록! 쿠흡! 죄송…… 합니, 쿨러으억!”
힘껏 연기했다.
기침을 하면서는 일부러 입도 크게 확 벌렸다. 덕분에 밤새도록 열심히, 반복적으로 침을 바르며 바싹 말려 둔(?) 입술이 쫙 갈라졌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더욱 적절하게도 피까지 살포시 나와서 흘러주었다.
“케엑, 쿨룩! 콜록!”
“……리한 군의관.”
“예, 쿨룩! 컥! 실로 죄송하지만, 제가 당분간 요양을 좀 하여야…….”
“꾀병은 안 통하오.”
“…….”
“혹시 이제 와서 병을 핑계로 떠나겠다는 뜻을 밝히려는 것이오?”
“……어, 그것까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럼?”
“그냥 오늘 일을 하기가 좀 싫어서…… 어제저녁에 여기 도착한 터라 실제로도 아직 피로감이 상당히 남았기도 하고…….”
“그럼 오늘은 쉬시오. 내일 봅시다.”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쟈빌론이 빙긋 웃었다. 마치 이쪽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덧붙이기까지 했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시킬 일이 없소. 다만 열흘 뒤까지 그런 태도면 곤란해질 것이외다.”
“열흘 뒤라 하심은?”
“그날, 발루아 요새가 보이는 평원에서 그대에게 지지 선언을 부탁할 테니까.”
“…….”
“부디 그날은 몸 상태가 좋기를 바라오.”
쟈빌론은 은근히 뼈 있는 말을 남기고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라키엘은 불굴의 한국인이었다. 한 번 튕겼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았다. 열렬히 퇴사를 희망하는 소망을 담아, 다음 날에도 새로운 시도를 추진했다.
“저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침이 밝자마자 쟈빌론을 찾아갔다. 이번엔 전날처럼 과장된 기침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대신 매우 진지하고도 진중한, 한편으로는 심각한 표정을 한껏 내걸었다.
“실은 제게 연로한 어머니가 계십니다.”
“어머니가?”
“그렇습니다.”
쟈빌론의 물음에 재빨리 대답했다. 그 뒤로 준비한 대사를 발사했다. 아니, 발사하려는 순간이었다. 쟈빌론이 반 박자 빠르게 입을 열었다.
“설마 어머니께서 매우 거동이 불편하시고, 불치의 병에 걸리셔서 돌보아 드려야 하는데, 이럴 때 곁을 지켜드리지 못하는 것이 매우 마음에 걸리고, 사람의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이제 그만 고향의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말하려는 거요?”
“…….”
정답.
라키엘은 마네킹처럼 쩌저적 굳어 버렸다. 쟈빌론의 입꼬리가 묘하게 비틀렸다.
“거짓인 걸 알고 있소. 물러가시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또 실패.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도 그의 시도는 멈추지 않았다.
“쟈빌론 각하. 사실 제겐 여자친구가 있습니다.”
“여자친구? 애인 말이오?”
“예.”
“없어 보이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애써 강조하니까 진짜로 더 없어 보이는데.”
“…….”
“설마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못 이겨 잠깐이나마 얼굴을 보러 다녀오고 싶다…… 뭐, 그런 거요?”
“맞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시겠군.”
“아닙니다.”
“그런데 왜 고개를 끄덕인 것 같지?”
“…….”
“리한 군의관.”
“예, 각하.”
“그대의 마음은 알고 있소.”
이쪽을 지그시 쳐다보는 쟈빌론의 눈초리. 그 눈길 앞에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 뻔했다.
쟈빌론의 말이 이어졌다.
“전에 밝혔던 대로 부상병을 보살피고 싶겠지. 그렇게 본분을 다하고 싶겠지. 이해하오. 하지만 지금은 그 일을 맡길 수 없음 또한 이해해 주시오.”
“……어째서입니까.”
“지금은 그대가 노출되면 곤란하니까.”
“설마.”
“또 이쪽의 뜻을 알아채셨군. 역시 이야기가 빨라서 좋아.”
쟈빌론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를 향해 물었다.
“7일 후에 제가 해 드려야 할 정치적 지지 선언. 그 전에 존재가 노출되면 지지 선언의 효력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정확히 맞히셨소.”
쟈빌론의 미소가 더욱 만족스러워졌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대의 지지 선언은 혁명군에게 있어 반전의 계기가 될 거요. 역전의 발판이 될 거요. 그만큼 충격적이어야 하오.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던 일이어야 하오. 그렇기에 지지 선언을 하기 전에 그대의 혁명군 가담 사실이 미리 외부에 퍼지면 곤란해지오. 충격이 줄어드니까.”
“…….”
무슨 뜻인지 알겠다. 나름 스포(?)를 방지하겠다는 거겠지. 동시에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그럼 어째서 지금 당장 지지 선언을 시키지 않으시는 겁니까.”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으니까.”
“때라니요?”
“리한, 그대가 조금이라도 진심으로 나를 지지해 주는 마음을 품는 때 말이오.”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예상 못 했던 대답이었다. 쟈빌론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오. 그대의 지지 선언에 아주 조금이라도, 진심이 배어나면 좋겠소. 아니, 꼭 그래야 하오.”
“어째서입니까.”
“그리하여야 비로소 민중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을 테니까. 모두의 자발적 동참을 이끌어 낼 정도로 감동을 안길 수 있을 테니까. 비로소 앙부아즈를 위대한 왕국으로 거듭나게 할 혁명의 초석을 놓을 수 있을 테니까.”
“…….”
“그저 시키니까 하는 지지 선언? 할 수는 있겠지. 얼마든지 가능하겠지.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오. 그렇게 해서는 감동을 줄 수가 없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소. 아니, 단순한 표면적 지지 선언만 필요했다면 나는 진즉 다른 수를 썼을 거요.”
“어떤…… 수단 말입니까?”
“약물이나 마법으로 그대를 세뇌했겠지.”
“…….”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좋은 결과를 낼 수가 없소. 단기적으로 민중의 이목을 끌 수는 있겠지만, 지지 선언이 진실되지 않았다는 티가 금방 날 거요. 세뇌란 그런 거니까. 결국엔 티가 날 수밖에 없으니까. 뒷말이 나오고, 뒤탈이 생기고, 최악의 경우엔 혁명군의 가치와 정신을 부정당하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겠지. 나는 그런 결과를 바라지 않소.”
“그럼…….”
“그래서외다. 나는 열흘의 시간 동안 그대가 혁명군의 숨결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내 이상과 목표에 조금이라도 공감해주길 바랐소. 지지 선언에 그러한 진심이 조금이라도 들어갔으면 하고 바랐소. 한데 지금 보니 그러했던 내 생각과 바람이 조금은 안일했던 것이 아닌가, 후회가 드오.”
“후회, 말입니까.”
“으음.”
쟈빌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불길하다.
쌔하다.
그런데 어째서 쌔한 예감은 항상 그림처럼 딱 들어맞는 걸까.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쟈빌론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특유의 사람을 빤히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으로, 눈꺼풀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하여 좋은 대안이 떠올랐소. 리한 군의관?”
“예.”
“내 주치의가 되어 주시오.”
“예에?”
“그냥 숙소에만 머물러서는, 이렇듯 아침에 잠깐씩만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는 내 이상과 목표를 제대로 느끼고 공감할 겨를이 없겠지. 그러니 앞으로 내 주치의가 되어, 24시간 내 곁에 머물러 주시오.”
“…….”
“어떻소?”
……어떻긴 x발놈아.
라키엘은 울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