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28화 (128/468)

128화. 미친놈들의 추격전 (1)

“정말 오랜만입니다, 전하.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요.”

“오냐. 동감이다.”

안개가 잔뜩 낀 새벽이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를 귓가로 흘려보내며, 데미안을 마주 보며 라키엘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머리카락 곳곳에 들러붙은 거미줄을 떼어냈다.

“어오, 거미. 어오, 벌레.”

머리칼뿐만이 아니었다. 목덜미며 상의 곳곳이 엉망이었다.

거미줄은 기본이고, 전신이 흙먼지며 짓뭉개진 이끼에서 흘러나온 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비좁고 어두운 동굴을 포복으로 기어온 까닭이었다.

“한데, 언덕 중턱에 그런 동굴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데미안이 물어왔다.

라키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어쩌다가 우연히.”

“우연히, 말입니까?”

“어. 쟈빌론을 따라다니다가 병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탈영하기 좋은 개구멍을 발견했다나. 지들끼리 쑥덕거리다가 나랑 눈 마주치니까 급하게 입 다물더라고.”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병사들의 이야기는 개뿔, 사실은 소설 마검황을 읽은 덕분에 알고 있는 개구멍 동굴이었다.

‘쟈빌론이 이끄는 소설 속 앙부아즈가 제국을 상대로 벌인 대전쟁. 그 전쟁의 초기에 이곳 일대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거든.’

데미안이 그 전투에 제국의 용병으로 참전했다. 치열한 전투의 막바지 무렵, 용병대 전체가 정규군에게 버림받았다.

말 그대로 버리는 패로 쓰였다. 덕분에 데미안과 용병대장이 적진에 고립되어 낙오되었다.

‘그때 데미안과 용병대장이 언덕 중턱의 동굴을 우연히 발견하지.’

덕분에 안전하게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목숨을 부지하고서 전장에서 탈출할 수도 있었다.

그게 발루아 요새 앞쪽 평원에 봉긋하게 솟아 있는 세 언덕 중의 가장 왼쪽 둔덕이라 하였다.

그 장면이 생각난 덕분이었다.

개구멍 동굴을 써먹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계획을 짰다. 각을 재고, 쟈빌론에게 거짓말을 살포했다.

기도를 해야 한다는 둥, 안 그러면 치료의 효과가 사라질 거라는 둥, 잔뜩 겁을 주었다.

성공적이었다.

쟈빌론은 약간은 의심하는 듯하였지만, 결국엔 이쪽의 꾐에 넘어갔다.

순순히 언덕 꼭대기에 기도 장소를 마련해 주었고, 이쪽은 보름달이 휘영청 뜨자마자 개구멍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덕분에 방금, 데미안과 가르딘 경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가르딘 경?”

“……예, 전하?”

“나 안 반가워?”

“반갑습니다?”

“그런데 날 보는 표정이 왜 그래? 무슨 귀신 마주친 사람 같이.”

아닌 게 아니라, 가르딘 경은 안색이 새파래져 있었다. 음, 저거, 표정 분석기를 돌린다면 공포 10,000%가 뜨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그의 표정은 공포에 질린 사람의 표본 같았다.

“내가 무서워?”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르딘 경이 고개를 휘휙 저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아니면?”

한 걸음 다가갔다. 가르딘 경이 기겁하며 두 걸음 물러났다.

“흐, 흐윽, 거, 거미……!”

“…….”

“어깨에 돈벌레도 있습니다!”

“…….”

“우, 우으아악!”

“쉿.”

“……읍읍.”

“그래. 좀 조용히. 우리 지금 몰래 도망치는 중이거든?”

“죄, 죄송합니다.”

“벌레가 무서운 거였어?”

“…….”

가르딘 경이 민망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역시나 그런 거였나. 라키엘은 미간을 콕 찡그리며 옷을 툭툭 털어냈다.

“나도 이런 꼬락서니가 좋을까. 워낙 동굴이 습하고 비좁아서 말이지.”

“그, 그랬습니까?”

“어. 그래서 지네 안 나오나 싶었는데.”

“……헉.”

“나오면 잡으려고 그랬거든. 그게 얼마나 좋은 약인데.”

“…….”

“됐고. 계획이 잘 맞아서 다행이야. 이렇게 딱딱 들어맞게 접선할 수 있어서.”

진심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어제였던가.

쟈빌론이 잠깐 반란군 간부들과 회의를 가지던 시간이 있었다. 그때 잠시 혼자가 되었더랬다. 그 틈을 이용했다.

쪽지를 써서 꼬슴이에게 주었다. 오늘의 탈출과 접선 장소 등의 계획을 담은 쪽지였다. 그걸 가르딘 경에게 보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가르딘 경과 데미안은 이쪽이 원하는 시간에, 정확한 장소에 마중을 나와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꼼꼼하게도 꾸꾸까지 함께 챙겨왔다.

“꾸꺄!”

“그래, 반가워. 우리 오랜만이지?”

“꾸!”

무사히 만났으니 이제는 움직일 때였다.

“이쪽으로.”

일행은 안개 자욱한 숲을 걸었다. 하지만 숲은 넓지 않았다. 얼마 걷지 않아서 나무가 드문드문해지는가 싶더니 숲이 끝났다.

일순간 시야가 확 트였다. 왕국군의 발루아 요새와 반란군의 주둔지 사이에 있는 평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서부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데미안의 물음에 긴장감이 서렸다. 사실 그는 이번 탈출에 회의적이었다.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위치가 좋지 않아. 탁 트인 개활지라서 낮이 되면 몸을 숨기며 이동하는 게 거의 불가능해질 거야. 강행돌파는 더더욱 불가능할 테고.’

황태자는 어쩔 생각인 걸까. 데미안은 라키엘을 돌아보았다.

라키엘이 빙긋 웃었다.

“어떻게 하긴. 타이밍 맞춰서 이동해야지.”

“타이밍이라니요?”

“반란군의 수색순찰 부대가 움직이고 교대하는 시간.”

“……설마.”

“어. 다 꿰고 있어.”

라키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쟈빌론의 곁에 꽉 붙들려 있었잖냐. 덕분에 알기 싫어도 저절로 알게 되더라. 각급 부대의 배치 현황, 구역별 경계 시간, 교대 시의 주의사항 등등등. 전부 쟈빌론의 숙소에 커다랗게 표시되어 있었으니까. 심지어 수시로 보고를 받기도 했으니까.”

“그걸 다 파악하신 겁니까?”

“어. 통째로 외웠어. 저들의 수색순찰 부대가 교대하는 과정에서 경계가 허술해질 타이밍도 전부.”

사실이었다.

탈출의 성패가 달린 정보였다. 목숨 걸고 노력하며 외웠다. 다행히 암기력이 썩 괜찮은 편이라, 별반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 시간이…… 별자리 볼 줄 알지?”

“예.”

“비단그물 자리가 어디 있는지 찾아볼래?”

“지평선에서 떠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지금. 가자.”

라키엘이 관목 덤불 속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데미안과 가르딘 경은 흠칫 놀랐다.

하지만 라키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몇 걸음을 휘휘 걸어나가더니 둘을 돌아보았다.

“타이밍 놓치면 안 된다니까? 따라와. 빨리.”

“…….”

아무래도 정말로 외운 듯하다.

가르딘 경과 데미안은 서로를 쳐다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황태자의 뒤를 따랐다. 다행히 안개가 제법 자욱한 편이라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평원 중앙의 바위 무더기가 있는 곳에서 라키엘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두 개의 바위가 겹쳐져 있는 커다란 틈새 아래로 들어갔다. 두 사람을 향해 손짓했다.

“들어와. 여기서 쉬어야겠다.”

“…….”

“얼른. 미적거리다간 들킨다?”

둘은 순순히 황태자의 말을 따랐다.

데미안이 물었다.

“전하. 여긴 안전한 겁니까?”

“어. 확실히.”

라키엘이 싱긋 웃으며 바위틈 편안한 구석에 궁둥짝을 깔고 앉았다.

“평원 중앙에 있는 곳이라서. 왕국군과 반란군 양쪽 모두가 감시하는 곳이거든.”

“그렇다면 더욱…….”

“안전하지. 양쪽 모두 제대로 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지점이잖아. 대놓고 순찰대를 보내기엔 빡쎈 곳이니까. 그러니까 우린 오늘 여기서 쉴 거야.”

라키엘은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이곳 평원의 동쪽에는 드높은 산맥과 왕국군의 발루아 요새가 있었다. 서쪽에는? 반란군의 군단이 통째로 주둔하고 있었다.

즉, 동쪽의 요새와 서쪽의 반란군 사이에 낀, 햄버거 빵 사이의 패티 신세(?)였다.

“동쪽이나 서쪽으로는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보아야지. 그래서야. 이대로 평원 중앙을 따라 북쪽으로 살금살금 이동할 거다. 그곳은 상대적으로 경계가 소홀한 편이니까.”

거기까지 말한 라키엘은 아예 대놓고 자리에 드러누웠다.

비로소 데미안과 가르딘 경은 황태자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듣고 보니 황태자의 말이 그럴듯했다.

‘하긴. 어차피 서쪽이든 동쪽이든 빠져나갈 길이 없으니까. 게다가 여기라면 왕국군도, 반란군의 병력도 대놓고 움직이진 않을 장소 같군. 상대의 견제가 신경 쓰여서 굳이 접근할 일도 없을 듯하고.’

‘예. 바위 덕분에 양쪽의 시선으로부터도 안전할 듯합니다.’

낮 동안 여기 짱박히면(?) 된다. 다시 어두워졌을 때 움직이면 된다. 비로소 두 사람은 안심했다.

그때부터였다.

일행은 바위틈에서 탱자탱자 휴식을 취했다. 빵과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뒹굴거렸다.

바위틈으로 엿보이는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감상했다.

양쪽에 왕국군과 반란군의 살벌한 군단이 대치하고 있다는 점만 빼면, 나름의 피크닉 느낌마저 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오르기도 전에, 서쪽의 반란군 주둔지로부터 엄청난 성량의 외침이 들려온 까닭이었다.

“리한 군의과아아안-!”

“……!”

꾸벅꾸벅 낮잠이 들려던 무렵 갑작스럽게 고막을 푹 찌른 외침. 엄청난 목소리였다. 평원을 가득 채울 정도의 어마어마한 성량이었다.

마치 코끼리 수백 마리가 합창을 하는 것만 같았다. 혹은 이어폰 음량을 실수로 맥스까지 찍어놓고서 라디오를 틀어 버린 것만 같았다.

게다가 이건, 익숙한 목소리였다.

‘쟈빌론?’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잠이 확 달아났다. 쟈빌론의 압도적인 외침이 재차 날아왔다.

“그대가 근방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걸 알고 있소! 이쪽의 군마가 한 마리도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그대의 잘난 종자 둘과 걸어서 도망친다 한들 멀리 가진 못했을 테니까! 그런 걸음으로는 내 군단의 감시를 통과하지 못했을 테니까!”

“…….”

잘 아네.

살짝 소름이 돋았다. 한데 정말로 소름 돋게 만드는 외침은 따로 있었다.

“그러니 그대는 지금! 평원 어딘가에 숨어 있겠지! 내 믿음을 저버리고서! 쥐새끼처럼! 웅크린 채 내 말을 듣고 있을 거요! 그렇지 않소!”

“…….”

역시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라키엘은 팔뚝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쟈빌론의, 소드마스터 특유의 마나를 가득 담은 성난 외침이 이어졌다.

“그러니 말하오! 나는 그대를 진심으로 대하였소! 그런 내 마음을 먼저 저버린 것은 그대요!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대를 진심으로 대하고 싶소! 나오시오! 한 번은 용서해 주겠소! 내 절대 이번 일로 그대를 죽이진 않으리다! 약속하오!”

“…….”

약속이라.

용서라.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덩달아 긴장한 채 이쪽을 돌아보는 가르딘 경과 데미안의 시선이 느껴졌다.

문득, 소설 마검황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 속에서 쟈빌론이 입에 담곤 하던 약속과 용서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도 떠올랐다.

‘그래. 약속을 지키겠지. 날 죽이진 않겠지. 딱 목숨만 붙여두는 형태로 말이야.’

아마 두 다리를 자를 것이다. 자신의 두통 치료를 해줄 이쪽의 손만 남겨둘 것이다.

그렇게 다시는 도망치지 못하도록 묶어두겠지. 그게 바로 쟈빌론이 말하는 용서의 의미니까.

“…….”

다시금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 사이에도 쟈빌론의 악에 받친 외침은 이어지고 있었다.

“나오시오! 내가 용서의 마음을 품을 수 있게 도와주시오! 기회를 주겠소! 내가 셋을 외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어 주시오!”

“……전하?”

가르딘 경이 불안한 듯 물어왔다.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쟈빌론 저놈, 뻥카를 치고 있는 거다. 이쪽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는 거다. 그러니 저렇듯 엄포만 놓는 거겠지.

“셋!”

쟈빌론의 벼락같은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라키엘은 피식 웃으며 가르딘 경을 돌아보았다.

“걱정 마. 말만 저렇지, 실제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을 테니까.”

라키엘은 자신했다.

저렇듯 평원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외치고 있으니, 요새에 있는 왕국군도 저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아마 잔뜩 경계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겠지.

“……둘!”

“저놈이 군단을 움직이면 왕국군도 곧바로 대응할 거야. 원치 않던 전투를 치러야 할걸. 그러니 쟈빌론 저놈, 말은 저래도 함부로 못 움직여.”

라키엘은 확신했다. 그걸 노리고 잡은 위치가 여기였다. 새삼 든든했다.

“하나!”

쟈빌론의 외침에 독기가 서렸다. 하지만 걱정되지 않았다. 그 뒤로 침묵이 이어졌다. 역시나 싶었다.

‘뻥카였구만.’

예상이 맞았다. 라키엘은 빙그레 웃었다. 다음 순간, 평원 전체에 수천 발의 불화살이 떨어질 때까지는, 분명 그랬다.

……화르르륵!

가을철 노랗게 물든 평원의 갈대와 잡초가, 한낮의 햇살에 바싹 마른 풀더미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사방으로 불이 번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맹렬한 화마가 되어 평원 전체를 뒤덮어 갔다.

물론, 일행이 몸을 숨긴 이곳 근처도 예외가 아니었다!

“……저 미친놈이.”

그 순간 라키엘은 두 가지를 깨달아야 했다. 하나는 쟈빌론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막 나가는 미친놈이라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어쩌면 나는 오늘, 여기서, 저놈과 결판을 내어야 할지도.’

불현듯 떠오른 예감이 가슴을 쿵, 쿵, 선명하도록 뛰게 만들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