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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132화 (132/468)

132화. 습관이라는 이름의 약점 (2)

“어?”

쟈빌론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보다 살짝 더 떨리는 눈동자가 힐끔 움직였다. 아래로 내리 베고 있던 자신의 검날을 향했다.

없다.

오러가 없어졌다.

검날에 찬란하게 맺혀 있던, 지금도 그래야 할 오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째서?

‘……왜?’

검을 내리치던 도중에 오러가 불 꺼지듯 사라지다니. 너무나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등극한 뒤로는 처음 있는 일이기도 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라키엘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빙고!’

쟈빌론의 뒤통수를 찰싹 때리고서. 내 손은 약손 스킬을 발동하고서. 그대로 바닥에 착지한 라키엘은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무리한 착지 때문에 시큰거리는 무릎 도가니의 통증을 참아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성공, 성공이다.’

방금 자신이 했던 짓.

내 손은 약손 스킬.

그걸로 쟈빌론의 두통을 치료(?)해 주었다. 그러면 쟈빌론이 오러를 잃을 것이라 예상했다.

언제부터? 처음 쟈빌론을 진맥해서 편두통을 알아냈을 때부터였다.

‘아마 쟈빌론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겠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을 거야.

자신에게 두통이 어떤 의미인지. 태어날 때부터 달고 살아야 했던 두통이 자신의 검술에서 어떤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건지.’

하지만 나는 안다.

놈에게 두통이 어떤 의미인지.

‘그건 바로, 루틴.’

라키엘의 눈이 번득였다. 루틴. 때론 별것 아닌 것처럼만 여겨지는, 일상의 습관. 하지만 때로는 생각보다 훨씬 거대한 부분을 차지하는 중요한 요소.

쟈빌론의 검술에서 두통이 그런 요소였다. 처음 진맥을 하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쟈빌론이 스스로 말한, 자신의 두통에 얽힌 사연을 들으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쟈빌론은 처음 검을 잡을 때부터 이미 두통을 앓고 있었으니까. 검을 휘두르는 모든 순간에 두통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마나하트를 처음 개방했을 때도, 단계별로 경지를 높여 갈 때도, 그 모든 순간에 두통을 참고 있었으니까.’

태어날 때부터 달고 살아야 했던 두통. 그래서 인생의 일부가 되어 버린 두통. 검술 훈련의 모든 순간에도 함께했던 두통. 그래서 언제나 악으로 깡으로 참아야 했던 통증.

그 통증이 루틴이 된 것이었다. 그걸 참으며 악을 쓰는 과정과 심리 상태 자체가 루틴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심지어,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는 순간에조차도 그랬을 거야.’

그래서였다.

두통과 그것을 참는 독기.

그 자체가 쟈빌론이 지닌 검술과 마나심법의 일부가 되었다. 고스란히 스며들어 구성요소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쟈빌론은 그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 두통은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었으니까. 남들이 숨을 의식하고 쉬지 않듯이, 태어날 때부터 앓았던 두통을 참으며 지내는 것은 그에게 항상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모르고 있었을 터다. 지금에야 뒤늦게 깨달았을 것이다. 그토록 지우고 싶어 했던 두통의 아픔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그렇겠지?’

라키엘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쟈빌론의 당혹감이 커졌다.

‘……이게, 무슨!’

그는 오러가 사라진 검을 그대로 내리쳤다. 하지만 그의 검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오러를 지니고 있었다면 상대의 방어를 가르고 육신을 찢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카아앙-!

데미안이 부러진 검을 비스듬히 들었다. 쟈빌론의 내리친 검과 데미안의 검이 격돌하며 강렬한 충격파가 일어났다. 데미안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손목이 부러질 것만 같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버틸 만했다.

“흡!”

그는 충격을 흘려 냈다. 검날을 옆으로 기울였다. 쟈빌론의 검이 쇠 긁는 소리를 내며 미끄러져 내려갔다.

어깨를 스치고 아래로 지나갔다. 그 순간, 데미안의 검이 위로 반원을 그리며 솟구쳤다.

원래의 온전한 검이었다면 거추장스러운 길이 때문에 구사하지 못했을 초근접 상황에서의 임기응변. 하지만 지금 데미안의 검은 잘려서 반쪽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가능했다.

스칵!

“……긋!”

반쪽짜리 검날 끄트머리가 짧은 반원의 궤적을 그리며 쟈빌론의 턱끝을 스쳤다. 소드마스터의 얼굴에 처음으로 생채기가 났다. 자존심에는 더욱 큰 상흔이 새겨졌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런 것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지금!’

더 몰아붙여야 한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당황했을 때. 약간이라도 흔들렸을 때. 기세를 몰아서 정신없이 몰아붙여야 한다. 그래야 실낱같은 생존의 희망이나마 이어 갈 수 있다.

‘그래야…… 전하도 도망칠 수 있을 테니까.’

카카카카카캉-!

폭풍 같은 연격!

데미안의 반쪽 검날이 쉼 없이 번득였다. 짧아진 검날이 유리할 수 있는 극단적인 초근접 거리를 유지하며. 더욱 품으로 파고들며. 거의 안길 듯이 돌진하며.

찌르고, 가르고, 베었다.

찍고, 치고, 후렸다.

걸고, 찢고, 잘랐다.

그 모든 연속 공격이 호흡 한 번을 내쉬기도 전에 모조리 이어졌다.

짐승이 사냥감의 약점을 집요하게 물어뜯듯이, 사생결단을 내기 위해 온몸을 내던지듯이, 그렇게 몰아쳤다.

하지만 그 모든 공격이 막혔다.

당연한 일이었다.

쟈빌론은 소드마스터니까. 물론 공격을 몰아친 데미안도 그걸 예상하고는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도망치십시오!’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이 틈에 도망치라고. 당신이라도 무사해야 한다고. 그게 내 임무라고. 눈빛으로 외쳤다. 아니, 외치려 했다.

도망치긴커녕 오히려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황태자의 모습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

야 이 미친 황태자야. 내가 시간을 끌어 주고 있잖아. 그런데 왜 도망을 치질 못하니, 왜. 조금 전에도 쓸데없이 돌아와서 싸움에 끼어들더니, 오늘 대체 왜 이러는 건데. 혹시 갑자기 자살 마려운 거야? 그런 거야?

데미안은 눈빛으로 욕설을 쏘아 보냈다.

하지만 라키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의 눈길은 데미안의 폭풍 같은 연격에 아주 잠깐 흔들리며 두 발짝 물러선 쟈빌론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찰나에 생겨난 빈틈. 계산하고 기다리며 노렸던 균열. 탈출의 희망이 그곳에 있노라 여긴 까닭이었다.

‘당연하지. 쟈빌론은 소드마스터니까. 그런데 오러만 잠깐 잃었다고 내가, 데미안이, 함께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까? 아니, 전혀.’

절대로 불가능하다.

당황은 잠시일 뿐. 당혹감도 아주 잠깐의 바람일 뿐. 찰나의 흔들림이 가라앉으면 쟈빌론은 금방 어마어마한 실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게 소드마스터니까. 놈은 지금 단순히 오러만 잃었을 뿐, 그 외의 검에 대한 이해도, 마나의 운용 능력, 검술 테크닉 등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테니까.

‘즉, 지금 쟈빌론은 주포를 잃은 탱크와 똑같은 거지. 포를 못 쏘게 되었다고 탱크가 무력한가? 아니. 기동성과 장갑은 여전하지. 게다가 기관총도 남아 있을 거고.’

그것만으로도 탱크는 숨을 곳 없는 개활지에서 마주친 보병에게 악몽 같은 존재로 군림할 수 있다. 지금 쟈빌론도 마찬가지다.

오러가 사라졌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데미안을 압도할 수 있다. 놈이 당황에서 벗어나는 순간, 데미안은 순식간에 짓뭉개질 것이다.

그건 사양하고 싶다.

그래서였다.

‘지금……!’

쟈빌론이 아주 잠깐 흔들린 지금.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돌진했다.

솔직히 무서웠다. 임기응변치고도 위험한 시도니까. 뒷목의 솜털이 모조리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오늘을 무사히 넘기려면 해야 한다. 각오를 다졌다. 더욱 힘껏 땅을 박찼다.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세 걸음 떨어진 거리. 쟈빌론을 향해 겨냥했다.

그리고 외쳤다.

‘방출!’

딩동!

[1번 슬롯의 방출 기능을 활성화합니다.]

[방출량을 설정해 주십시오.]

‘전부 다!’

써클 슬롯을 발동했다.

슬롯에 가득 담아 두었던 물질을 모조리 쏟아내겠노라 외쳤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써클 슬롯에 저장된 <유독성 매연> 15리터를 방출합니다.]

키이이이잉-!

써클이 힘차게 회전했다.

슬롯에 담겨 있던 물질, ‘유독성 매연’이 모조리 손끝으로 모였다.

아까 화재를 피해 달아나는 내내 격하게 이어 왔던 호흡, 그러는 와중에 조금씩 들이마셔야 했던 시커먼 유독성 연기였다.

그렇듯 알차게 차곡차곡 모아둔 일산화탄소와 유독가스 덩어리가 한순간에 방출되었다. 아니, 발사되었다.

쟈빌론의 얼굴을 향해.

투퍼어어엉-!

“……!”

쟈빌론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그 모습도 잠시, 폭발적으로 방출된 시커먼 유독가스가 그 모습을 뒤덮었다. 라키엘은 내심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그냥 매연이 아니다. 화재 때문에 생겨난 각종 유독가스 덩어리다. 그걸 기습적으로 얼굴에 덮어썼으니, 아주 조금이라도 반사적으로 들이마셨을 것이다.

그거면 된다.

충분하다.

순간적으로 현기증을 느끼거나, 호흡 곤란을 겪을 테니까. 도망칠 시간 정도는 충분히 될 테니까.

“왕녀님! 지금!”

라키엘은 안전한 탈출 계획의 마지막 퍼즐을 장식하기 위해 움직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렸다. 데미안의 어깨를 붙잡았다. 뛰었다. 손을 흔들었다.

그런 이쪽의 신호를 본 걸까.

금방 응답이 왔다.

투두두두두-!

왕녀 아델린과 근위대 기병 10여 기가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미리 약속된 계획 그대로였다.

왕녀에게 죽은 군마와 자신을 던지게 하고. 쟈빌론에게 내 손 약손 스킬을 써서 오러를 없애고. 슬롯의 유독가스를 방출해서 시간을 벌고. 마침내 구조대(?)와 정확한 타이밍의 접선까지.

“설마, 이 상황을 전부 계획한 겁니까? 그 짧은 시간에?”

데미안은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경악했다. 나란히 달리는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이 인간이 지닌 잔머리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문득 피어난 아득한 의문에 휩싸였다.

라키엘이 힘겹게 웃으며 외쳤다.

“후, 후욱! 숨…… 차서 대답…… 할 힘도…… 없…… 후욱! 허억!”

왕녀 일행과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길어야 5초?

그만큼만 더 뛰면 된다. 왕녀의 말에 올라탈 수 있겠다. 라키엘은 희망을 품었다. 바로 뒤에서 섬뜩한 물음이 날아오기 전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해서, 그토록 숨 가쁘게 날 버리고 떠나시겠다고?”

“……!”

귓가에 들려오는 속삭임.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숨결. 속삭이는 듯, 혹은 짓씹는 듯, 나직하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쟈빌론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섬찟한 느낌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쐐애액-!

뭔가가 날아왔다. 너무나 빨랐다. 식별할 틈도 없었다. 관자놀이를 거세게 얻어맞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뻐걱!

“……!”

팔꿈치였다.

소드마스터의 힘을 실은 팔꿈치가 날아와 무방비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세상이 휙 돌아갔다. 아니, 고개가 돌아갔다.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뛰던 자세 그대로 무너졌다. 땅을 향해. 곤두박질치며.

“……전하!”

아득하게 먼 곳의 외침처럼 들리는 데미안의 목소리. 순식간에 끊어지려는 의식의 끈.

‘이러면…… 안 되는데.’

지금 기절하면 끝장인데.

진짜로 답이 없는데.

안 되는데.

가슴이 쿵, 쿵, 뛰었다. 절박한 위기감이 치밀었다. 한데 대응할 힘이 없었다. 암담했다. 절망적이었다.

그때였다.

- 황태자 전하? 이제부터 변장 마법을 시전하겠습니다. 다만, 그 전에 당부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불현듯, 익숙한 목소리가 기억의 서랍에서 흘러나왔다. 누구? 황궁의 궁정마법사 자네티스 경의 목소리 같은데. 아, 그럼 이건…….

‘황도를 떠나 앙부아즈로 올 때…….’

당시에 궁정마법사가 해주었던, 바로 그 당부다.

한데 왜 하필이면 지금 그 당부가 떠오르는 걸까. 의문과 상관없이 기억 속의 자네티스 경이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 제가 시전하여 드릴 변장 마법은 거의 어떠한 상황에서도 좀처럼 풀리지가 않을 것입니다. 하오나 단 하나의 경우만은 지극히 주의를 하셔야 합니다. 바로, 기절할 정도의 물리적 충격을 받는 상황입니다.

……아, 그래.

그렇게 말했었지.

- 기절할 정도의 충격을 받게 되면, 그 즉시 변장 마법이 해제될 것입니다. 덕분에 한 번 정도는 변장 마법이 충격을 흡수해 주며 기절하는 신세는 면하겠지만, 대신 정체가 탄로 나게 되겠지요. 그것이 득이 되든, 실이 되든 말입니다.

……맞다.

기억난다. 그런 말도 했었다.

기절할 정도의 타격이라. 듣고 보니 어쩐지 딱 지금 내 상황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그럼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변장 마법이 풀리는 걸까.

그런 생각을 멍하니 떠올리는 순간이었다.

츠즈즛……!

뒤통수에서 찌릿, 하고 감전되는 듯한 감각이 일어났다. 따끔한 자극이었다. 흐려지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극이 전신으로 번져갔다. 목덜미를 지나, 등줄기를 따라, 사지로 흐르고, 다시 정수리로 되돌아왔다.

그러고는 마침내.

……츠크팟!

섬광이 번득였다. 충격 때문에 변장 마법이 풀린 걸까. 혼절의 나락으로 떨어지던 의식이 솟구쳤다.

정신이 온전히 깨어났다. 기절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떴다.

“……어.”

고개를 들자마자 보인 것은, 이쪽을 보며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쟈빌론의 모습이었다.

왜 그런 걸까.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성자 군의관…… 그대가…… 그대가 마젠타노의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였다고……?”

이쪽을 향해 중얼거리는 쟈빌론. 그의 충격에 빠진 눈동자가 돈까스 망치로 라식 수술을 받은 듯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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