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폭발적 성장 (1)
‘허허. 들켰다.’
라키엘은 그저 웃고 말았다.
이쪽을 망연자실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쟈빌론. 그의 표정을 보니 지금 상황을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다.
“성자 군의관…… 그대가…… 그대가 마젠타노의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였다고……?”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볼살. 충격을 받은 걸까. 눈꼬리마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마주 보고 있자니 참으로 극적인 표정이라 절로 뻘쭘(?)해질 지경이었다. 마치 막장 아침 드라마의 절단신공 현장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기분이랄까.
‘변장 마법이 풀렸구나.’
재빨리 시선을 움직였다. 손부터 살폈다. 리한 군의관으로 변장하고 있는 동안 나름 익숙해졌던 통통한 손등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 보이는 것은 병약하고 새하얗게 깡마른 손등이었다.
그게 알려주는 사실은 명확했다.
방금 쟈빌론에게 맞았던 일격. 원래는 이쪽이 단박에 기절하는 것이 당연했을 일격. 그 엄청났던 충격을 이쪽 대신 변장 마법이 받아낸 거다.
소중한 택배를 보호하는 뽁뽁이처럼 충격을 흡수하며 뽁, 터져서 사라진 거다.
그러니까 변장이 풀려 원래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나 버린 거겠지.
‘이젠 어떡하지? 일단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내 원래 신분을 이용해서 이 상황을 모면할 각이 있을까?’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마젠타노의 황태자라는 신분. 그게 지금 쟈빌론에게 통할 것인가.
답은 알 수 없다, 였다.
‘쟈빌론 이 인간, 워낙 미친놈이라서.’
잘 풀리면 다행인데. 이쪽의 신분에 쫄아서(?) 물러나 주면 참 좋겠는데. 불행하게도 순순히 그렇게 반응해 줄 거라는 기대가 별로 들지 않았다.
아니, 최악의 경우엔 인질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그럼 기껏 균형을 유지하던 앙부아즈의 내전은 망하는 거지. 반란군이 승리할 거야. 그럼에도 마젠타노 황실이 좀처럼 개입하지 못하는 최악의 사태가 펼쳐지겠지. 게다가 나는 황제의 눈 밖에 나 버릴 거고.’
제대로 민폐를 끼치는 셈이다. 황제에게 팽 당하게 될 판이다. 그건 절대로 사양하고 싶었다.
결론은 명확했다.
‘튀자.’
쟈빌론이 멘탈을 수습하기 전에 움직이자. 그 생각에 땅을 박차며 일어나려 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딩동!
[당신은 소드마스터의 힘이 실린 타격력을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기절하지 않고 훌륭하게 버텨 내었습니다.]
‘……음?’
난데없이 뜻밖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 급박한 와중에 뭔 소리인가 싶었다. 괜히 바쁠 때 걸려온 대출 안내 스팸전화처럼 방해만 되는 거 아닌가 싶었다.
한데 뒤이어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그 생각을 빵긋 바꾸어야 했다.
[통상적으로 일반인의 신체는 소드마스터가 가하는 타격력을 절대로 버텨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신체에 걸려 있던 변장 마법의 도움을 받아, 이 타격을 아무런 피해 없이 버텨내는 데에 성공하였습니다. 이 결과는 분명 행운의 영역이지만, 그럼에도 엄연한 당신의 경험적 자산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심장에 새겨진 아스라한 심법이 이러한 특별한 경험적 자산을 능동적으로 분석, 학습하였습니다.]
[분석과 학습 결과, 당신의 아스라한 심법이 막대한 외부의 타격을 흡수하여 신체적 피해를 무마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합니다.]
[아스라한 심법에 새로운 옵션 - ‘HP 변환’이 개방됩니다.]
‘뭐?’
HP 변환?
듣자마자 느낌이 빡 하고 왔다. 눈동자를 재빠르게 굴리며 옵션 내용을 확인했다.
[스킬 전용 옵션 ③ : HP 변환 - 옵션 발동 시 그동안 오장육부로부터 후원받아 비축한 HP를 당신의 실질적 생명력으로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에 사용할 HP의 양은 임의로 설정할 수 있으며, HP가 생명력으로 변환되는 비율은 아스라한 심법의 성장과 함께 효율적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현재 변환 비율 = HP 10 : 생명력 1), (현재 당신의 생명력 : 210 / 300)]
“…….”
미쳤다.
이건 진심으로 미쳤다.
라키엘은 옵션 내용을 읽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방금 얻은 이 옵션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앞으로 어떻게 쓰일 수 있을 것인지. 그게 지금 상황에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지까지.
전부.
모두.
그림이 그려졌다.
앞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어떤 대응을 하면 유리할 것인지. 자신이 지니게 된 옵션들.
선택의 폭에 들어와 있는 요소들. 그것들을 가장 효율적이고 능동적으로 조합할 방법까지.
모조리 다.
그려졌다.
흐리멍덩한 대략적인 그림이 아니었다.
그 어떤 청사진보다도 선명한, UHD를 넘어서 8K 화질의 따귀를 왕복으로 후려칠 만큼의 선명한 그림이고, 계획이었다.
‘그러니까…….’
더는 쟈빌론에게서 도망칠 필요가 없겠다.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서, 쟈빌론을 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묘한 확신이 생겨났다. 확신 속에서 자신감이 태어났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다음 순간, 쟈빌론의 이글거리듯 짓씹는 목소리가 살벌하게 들려왔을 때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것은.
이전과는 달리 어깨를 흠칫 움츠리지 않은 것은. 오히려 태연한 얼굴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대는, 어째서 날 속였지?”
고개를 들었다.
쟈빌론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그가 악귀 같은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단순한 노여움 정도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온몸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성자 군의관, 아니, 마젠타노의 황태자여. 그대는 왜? 어째서? 내게 그런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이지?”
“…….”
“말해 봐. 어째서 날 속였던 건지. 단지 날 농락하기 위해서였나? 그대에게 호의를 품고, 곁에 두어 친우로 삼으려던 내 모습을 조롱하기 위해서였던 것인가? 정녕, 그랬던 건가?”
“…….”
가만히 보니 쟈빌론의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설마 울먹이는 거?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는데, 지켜보자니 진짜였다. 적어도 이쪽을 허물없이 좋게 봐 주고 있었다는 건 사실이었던 듯했다.
그래서 배신감을 느끼는 거겠지. 친근하게 여겼던 마음의 온기만큼 화가 나고, 마침내 끔찍한 불길로 바뀌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저 장단에 맞장구를 쳐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라키엘은 태연하게 피식, 웃어 버렸다. 그리고 불난 집에 휘발유를 드럼통째로 쏟아붓듯 대꾸했다.
“호의는 개뿔. 일개 왕국의 반란군 수괴 따위가 뭐? 황태자인 나를 상대로 호의? 곁에 두고 친우로 삼아? 미친 거 아닌가.”
“……뭐?”
“이봐. 정신 차려. 아직도 내가 리한 군의관으로 보이나?”
“…….”
“내가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겠다고? 다리를 잘라서라도 평생 곁에 두겠다고? 내 참. 듣다 보니 어이가 없어서. 이봐요. 당신, 그거 정신병이야. 집착증이라고.”
“그건…….”
이쪽의 급발진(?)에 놀란 걸까. 혹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는 걸까. 쟈빌론이 그답지 않게 입만 간신히 뻥긋거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놈의 분노 게이지가 서서히 채워지는 게 확연히 보였다.
즉, 성공이다. 이 수법이 진짜로 먹혀들어 가고 있다. 조금 전에 그렸던 그림대로 차곡차곡 상황이 그려지고 있다.
그러니까 조금 더 부스터를 넣어 보자.
“변명은 됐고. 더 매달릴 거야?”
“……뭐요?”
“여기서 더 추해질 거냐고.”
“그게 무슨…….”
“좋은 말로 할 때 물러나. 괜히 급도 안 되면서 친한 척하지 말고. 아는 척도 하지 말고. 행여나 어디 가서 나와 이야기라도 나눠 봤다는 자랑 같은 것도 가급적 자제하고.”
“…….”
“그러니까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진심으로 생각해 줘서 하는 소리야.”
“…….”
쟈빌론의 이글거리던 표정이 서서히 싸늘해졌다. 눈빛도 섬뜩할 정도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당연한 일이다.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으라는 당부 뒤에 따라붙는 조언은 언제나 사람을 빡치게 하는 신묘함을 발휘하니까.
즉, 쟈빌론은 이쪽의 의도적인 도발에 풍성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딱 바라던 바였다.
이놈은 애초에 통제가 안 되는 놈이니까. 어차피 이미 서로 선을 넘어 버린 상태니까. 이쪽도, 놈도 물러날 곳이 사라진 상황이니까.
이럴 땐 차라리 예측 가능한 반응을 이끌어 내는 편이 좋다.
“그대는 정말이지…….”
이윽고 돌아오는 쟈빌론의 대답도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소름이 좍 돋을 정도였다.
“어리석소. 안타깝소. 우리의 결말이 이렇지는 않길 바랐는데.”
스르릉!
그가 검을 늘어뜨렸다. 동시에 살벌한 위세가 그의 전신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쪽을 보는 눈동자에는 이제 노골적인 살기가 배어 있었다.
그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물었다.
“……이래서, 뒤를 감당할 수 있겠어?”
“물론.”
저벅, 저벅.
그가 한 걸음씩 다가왔다. 지극히 차분해서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말투를 입꼬리에 걸었다.
“왕국군 요새에서 이 거리에 있는 그대의 얼굴을 구분할 이가 있을까? 아니. 없을 듯한데.”
“…….”
“왕녀 아델린? 왕국군 근위대? 전멸시키면 목격자도 없어질 테고.”
“…….”
“그러니 그대가 맞이할 운명은 달라지지 않을 거요. 설령 그대의 정체가 마젠타노의 황태자라 하여도 그 사실은 변치 않을 테지.”
“내 다리를 자르려고?”
“물론.”
“…….”
“제국이 그대를 찾으려 혈안이 되겠지.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소.”
“어떤 자신?”
“그대를 내 곁에 끝까지 감추어 둘 자신. 그러다 일이 틀어질 때면 이 왕국을 넘어서 제국까지 무너뜨릴 자신.”
적어도 쟈빌론의 저 말은 허세가 아니다. 다른 이는 몰라도 나는 안다. 놈은 소설 마검황에서 저 말을 진짜로 실천해 버리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겠지.
“당신, 미쳤군. 미쳤어. 정말로 그런 짓을 벌일 생각인가?”
짐짓 두 걸음을 물러났다. 약간은 질린 얼굴로 쟈빌론에게 대꾸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연기력이 놈에게 먹혀들기를 바랐다.
그리고 쟈빌론은 꼼짝없이 걸려들었다.
“왜? 못 할 거라고 생각하나?”
이쪽이 나약한 모습을 비치자마자 놈의 기세가 더욱 사나워졌다.
노골적으로 흉험한 눈빛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치 사냥감의 약점을 찾아낸 맹수 같은 눈동자. 이쪽을 명백한 사냥감으로 지목한 몸짓.
놈의 검 끝이 조금 더 땅을 향해 늘어졌다. 전신의 근육이 살짝 이완되는 게 보였다. 그
것은 명백한 공격 임박의 징조였다. 예감이고 확신이었다.
확신은 곧 현실이 되었다.
쟈빌론의 검이 섬광처럼 번득였다.
쐐애액-!
“……!”
아무런 예비동작도 없는 하단 베기. 소드마스터다운 깔끔한 선제공격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당황하지 않았다. 예상하고 일부러 이끌어 낸 상황이었다.
오히려 웃었다. 재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쟈빌론에게 의도적인 폭언을 퍼붓는 틈에 몰래 꺼내 들고 있던 물건을 앞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하며 마나를 주입했다.
츠즈즈즈…… 지이잉-!
방패, 만년설이 마나에 반응하며 전개되었다. 반투명한 한기의 방벽이 전면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라키엘은 속으로 외쳤다.
‘격침불가!’
딩동!
[아스라한 심법 스킬 옵션 ② : 격침불가를 발동합니다.]
[격침불가가 발동되었습니다. 이제부터 5분 동안, 마나써클의 굳건한 내구력이 당신의 신경계를 보호합니다. 옵션 발동이 끝나는 시점까지 당신은 어떠한 충격을 받아도 절대로 기절하거나 의식을 잃지 않고서 버텨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격침불가 효과 종료까지 남은 시간 : 4분 59초]
콰드득!
전신의 신경계가 바위처럼 단단해지는 느낌이 왔다.
앙부아즈로 오기 전이었던가. 왕녀 아델린의 담석을 치료했던 나날이 문득 떠올랐다.
그녀의 담석을 없애주기 위해 무려 500번의 충격파를 맞아가며 버텨야 했던 나날이었다.
그 끝에 얻은 격침불가 옵션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5분 동안은 기절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할 수 있어!’
아까는 변장 마법 덕분에 쟈빌론의 공격에도 기절하지 않고 버텨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격침불가 옵션에 의지하리라.
라키엘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쇄도해 오는 충격에 대비했다.
전경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만년설 한기 방패에 체중을 실었다. 굳건해졌다. 그 순간, 쟈빌론의 하단 베기가 만년설을 강타했다.
터컹-!
“……!”
순간 온세상이 하얗게 번쩍.
시야 가득 별이 보였다.
생각보다 엄청난 충격이 의식을 후려쳐 왔다. 전신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하지만 기절하지 않았다. 맹렬한 피격의 순간 격침불가의 옵션이 신경계를 보호해 주었다. 의식을 기절의 구렁텅이로부터 건져 냈다.
물론 타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커억.’
숨이 턱 막혔다.
동시에 눈앞에 시뻘건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현재 당신의 생명력 : 130 / 300]
단 일격.
고작 한 번의 공격을 막아내며 생명력이 쑴펑 깎였다. 그러나 라키엘은 오히려 빙긋 웃었다. 또 다른 옵션을 곧바로 발동했다.
‘HP 변환!’
딩동!
[아스라한 심법 스킬 옵션 ③ : HP 변환을 발동합니다.]
[현재 변환 비율 = HP 10 : 생명력 1]
[변환에 사용될 HP의 양을 설정하여 주십시오.]
[현재 당신이 보유 중인 HP : 7,400]
‘1,700!’
외쳤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1,700 HP가 변환됩니다.]
[170 생명력이 보충됩니다.]
[현재 당신의 생명력 : 300 / 300]
화아악!
온몸에 파스를 붙이는 듯한 시원한 감각. 신체 말단의 모공 하나까지 빠짐없이 탄산을 들이붓는 듯한 후련함.
어질어질하던 느낌이 한 방에 날아갔다. 후들거리던 다리가 순식간에 진정되었다. 흔들리던 눈빛도 삽시간에 맑아졌다.
“역시.”
계산대로다. 그렸던 그림이 맞았다. 오늘, 어쩌면 정말로, 놈을 잡을 수도 있겠다. 확신했다. 고개를 들었다. 이쪽을 후려친 쟈빌론. 놈을 향해 상큼하게 방긋, 웃었다.
“또 기절 못 시켰네? 소드마스터라고 해서 걱정했는데, 막상 맞아보니까 별거 아니네?”
“……!”
쟈빌론의 검 끝이 흠칫하며 흔들렸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