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44화 (144/468)

144화. 구혼장 처리법 (1)

구혼장이라니.

처음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이거 미친 거 아닌가. 진짜 이거 실화 맞나.

……그런데 맞았다.

‘진짜 실화네.’

다각, 다각.

늦은 저녁의 황도 시가지를 조용히 굴러가는 호화로운 마차. 그 안에서 라키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의 눈길은 앞에 늘어놓은 수십 통의 구혼장을 향해 있었다.

아까 황제에게서 이걸 받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엔 얼마나 황당하던지. 솔직히 황제가 고약한 종류의 꼬장이라도 부리는 건가 싶었다.

‘그 양반이야 항상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니까.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갈궈 보려고 혈안이니까.’

항상 후계자를 시험에 들게 만드는 남자. 그런 사람이 황제였다.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뜻밖의 구혼장 다발을 받은 이쪽의 반응을 떠보려는 건 아닌가 싶었다.

덕분에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구혼장이라. 알겠습니다.’

……라고 쿨하게(?) 대답했다. 구혼장 뭉치를 받았다. 그대로 대련을 마치고, 예를 표하며 물러났다. 한편으로는 오늘치 갈굼은 이걸로 끝이구나 싶어서 환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막상 마차를 타고서 별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구혼장을 확인해 보니 가슴이 철렁했다. 구혼장은 진짜였다. 황제의 테스트용 가짜 편지 따위가 아니었다. 고약한 꼬장 또한 아니었다.

그냥 아주, 정말로 명백한, 실화였다!

‘이건 확실해.’

라키엘의 시선이 제일 위에 있는 구혼장 봉투로 향했다. 봉투에 새겨진 왕가의 문양이 보였다. 그냥 단순한 문양이 아니었다. 마법으로 찍힌 인장이었다. 즉, 위조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나머지 모든 봉투가 그러했다. 수많은 디자인의 갖가지 문양들. 수많은 왕실과 대귀족 가문들. 그들이 열렬한 마음으로 정성껏 보낸 러브콜(?)이 수십 다발이나 쌓여 있는 이 광경이 살포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

믿기지가 않았다.

평생 모쏠로 살아온 내 삶에 이런 호재가? 처음엔 솔직히 약간 두근거리기도 했다. 이 세상의 타도해야 할 극소수 존잘 인싸남의 기분이 이런 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더 생각해 보니…… 이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전하, 그건 뭡니까?”

마차 건너편 자리에 앉은 데미안이 물어왔다. 이쪽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일까. 녀석의 눈빛도 덩달아 날카롭게 번득이고 있었다.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구혼장.”

“……예?”

“방금 폐하께 받아 온 구혼장이라고.”

“폐하께, 말입니까?”

“어. 최근에 각국 왕실과 유수의 대귀족가들로부터 앞다퉈서 날아왔다더라. 전부 나랑 결혼하고 싶대.”

“그거 좋은 일 아닙니까?”

“그럴 거 같냐.”

“예.”

“아쉽게도 그건 좀 아닌 듯.”

“……어째서입니까?”

데미안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가르딘 경이 한마디 슬쩍 끼어들었다.

“혹시 전하께서는 누구를 골라야 하는지 고민이 되시는 겁니까?”

나름 진지하면서도 살짝 신이 난 듯이 보이는 가르딘 경. 보자마자 어째서 저러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화려한 연애 스타일을 이미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지금 모처럼 이쪽에게 연애 코치를 해 보겠다며 의욕을 불태우는 거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만큼은 가르딘 경이 주소를 잘못 짚었다. 라키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 응 아니야.”

“……네?”

“그런 거 아니라고.”

“하면 대체 무엇을 고민하시는 건지…….”

“이거 전부 한 큐에 거절할 명분을 좀 고민하고 있어.”

“……예에에?”

가르딘 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데미안도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그렇겠지. 이해가 안 되겠지. 그런 둘을 향해 살짝 더 짙어진 쓴웃음을 보내 주었다.

“아마 지금 구혼장을 보낸 이들은 나, ‘라키엘’이 아닌 제국의 황제가 될 황태자에게 구혼장을 보낸 거겠지. 신분으로 보나, 미래의 전망으로 보나 내가 자타공인 대륙의 1등 신랑감일 테니까. 안 그렇겠어?”

“물론 그렇겠지요, 전하.”

냉큼 고개를 끄덕이는 가르딘 경. 그 모습에 다시금 피식, 쓴웃음이 나왔다.

“그래서야.”

“그래서…… 라니요?”

“내가 그토록 각광받는 신랑감인데, 어째서 예전에는 아무도 구혼장을 보내지 않다가 이번에 갑자기 와르르 몰려들듯이 보낸 걸까?”

“……아.”

비로소 이쪽의 뜻을 알아챈 걸까. 가르딘 경의 눈빛에 이채가 떠올랐다.

“전하께서 앙부아즈에서 활약하신 일이 대륙 곳곳으로 퍼진 덕분이로군요. 맞습니까?”

“정답.”

바로 그거다.

라키엘은 구혼장 봉투 하나를 집어들며 말했다.

“전엔 모두가 나를 폐급으로 여기고 있었겠지. 병약한 황태자. 조만간 요절할 놈. 그러니 차기 황제가 될 가능성이 없다고들 여겼을 테고. 썩은 동아줄 취급을 한 거 아니겠어?”

실제로 다들 그랬을 터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실제로 별궁에서 들은 소문도 그랬다. 이쪽보다도 오히려 2황자에게 은밀한 구혼이 더 많이 빗발쳤다고도 했다.

‘당연하지. 내가 요절하면 2황자, 그 녀석이 황태자위를 물려받고 안정적으로 황위를 이을 테니까.’

하지만 2황자는 그 모든 구혼을 거절했다. 듣기로는 ‘자신보다 형님이 먼저여야 한다’고, ‘그게 올바른 순서이니까’라는 이유를 꺼냈다나 뭐라나.

“한데 이젠 그게 변해 버린 거야. 내가 앙부아즈에서 벌인 일 때문에.”

난데없이 전장 한가운데에서 정체를 드러내 버렸다. 심지어 소드마스터 쟈빌론을 때려잡아 버렸다. 계획에도, 예정에도 없던 일이었다.

어쨌건, 덕분에 이쪽의 건재함(?)이 대륙 방방곡곡에 널리널리 퍼져 버렸다. 이쪽을 향하던 의혹의 시선을 싸그리 날려 버렸음도 물론이었다.

“갑자기 내 주가가 졸지에 떡상…… 아니, 내가 원래 지니고 있던 1등 신랑감의 가치를 모두가 확 깨달은 거지. 남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고, 무조건 잡아야 한다고, 다들 경쟁적으로 구혼장을 보낸 걸 테고.”

즉, 지금 시점에서 이쪽은 대륙 최고의 로또남이 되었다. 모두가 이토록 열렬하게 구혼장을 보낼 법도 했다.

하지만…… 그게 문제다!

‘왜냐고? 난 황제가 될 생각이 없으니까!’

솔직한 진심이었다. 황제 같은 거, 되기 싫다. 수많은 일거리에 치여서 골치 아프게 사는 것도 사양이었다. 그냥, 황족의 지위만 누리면서 평생 탱자탱자 건물주스러운 만수르 라이프를 즐기고 싶었다.

‘그런데도 굳이 2황자와 황태자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건…… 혹시나 발생할 대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거였고.’

한데 이제는 쟈빌론이 몰락했으니 대전쟁의 위험도 사라졌다. 하니 몇 가지 문제만 더 해결하면? 슬슬 2황자 녀석에게 황위를 양보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이 구혼을 받으면 안 되지!’

라키엘은 굳게 다짐했다.

가르딘 경이 의아한 듯 물어왔다.

“한데 전하, 이상합니다. 모두가 전하의 능력과 전망을 이제야, 비로소 인정하게 된 상황이 아닙니까? 한데 어째서 구혼장을 거절하시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돼?”

“예. 그동안 인정받지 못하던 것 때문에 삐치신 건가 싶기도 하고.”

“쓰읍.”

“……죄송합니다.”

가르딘 경을 일거에 격침시켰다.

단언컨대, 삐친 건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구혼을 받을 수 없는 이유는 명백하다. 받으면 사기 결혼이 되니까.

‘저들은 내가 황제가 될 줄 알고 구혼을 한 건데, 나는 황제가 될 생각이 없단 말씀이지.’

말 그대로 구혼장을 보낸 이들은 가문의 미래와, 신부의 인생을 걸고 이쪽에게 배팅을 한 거다. 한데 이쪽이 상의도 없이 황제가 되기 싫다며 상장폐지(?)를 감행하면? 그럼 아내가 될 사람은 인생을 저당 잡혀 사기를 당하는 셈이 된다.

그건 싫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쓰으읍. 구혼장을 어떻게 모조리 거절하냔 말이지.’

문득, 아까 구혼장을 건네던 황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어렴풋이 보았다. 황제의 눈동자에 약간의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내심 이번 구혼장 폭격을 매우 즐거워하고 있는 거겠지.

한데 적절한 명분 없이 무작정 구혼장을 거절할 수 있을까.

‘아니, 절대로.’

불가능할 거다.

생각할수록 골치가 아파졌다. 마차가 별궁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랬다. 적당한 거절 구실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뾰족한 명분이 생각나지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좀 걸을까.’

모처럼, 몇 개월 만에 돌아온 별궁. 늦은 저녁의 정원이 고요한 밤공기로 스며들며 이쪽을 반겼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잠시 걸으며 머리를 식힐까 싶었다.

데미안만 대동하고서 천천히 걸었다. 한데 여독을 풀기도 전에, 황제와의 대련으로 얻은 피로가 쌓이기도 전에 그렇게 걸은 게 조금 무리였을까. 혹은 밤바람이 생각보다 차가운 탓이었을까.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무책임한 야근 강요 행위를 규탄합니다.]

[심장 : 야! 여기 야근 소리 안 나게 해라!]

[허파 : 이젠 좀…… 쉬고 싶허억…… 파하…….]

[대장 : 형님들, 이 인간 잽싸게 방으로 튀어가게 하려면 괄약근을 푸는 게 빠를지, 괄약근을 리본 모양으로 묶는 게 빠를지 고민이 되지 말입니다?]

[간장 : 둘 다 해 보면 안 될까?]

[위장 : 그러다가 툭 끊어지면…… 어우야ㅋㅋ]

[콩팥 : 궁딩이로 지렸다-!]

“…….”

처음엔 그냥 투덜거리는 정도인 줄로만 알았다. 뭐라고 와글와글 떠들든 무시하려 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꾸르릉륵?

‘억?’

별안간, 아랫배가 꿀렁거렸다. 급격히 아파 왔다. 그러니까 이건…….

딩동!

[대장 : 어머나, 진짜로 풀어 버렸지 말입니다? 히히히.]

[대장이 당신의 하복부에 강력하고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당신의 하복부에서 파멸적 재난의 징후가 감지됩니다.]

……꿀러렁?

‘거억엉.’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마시며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이건…… 급x 신호였다! 그는 당황해서 속으로 외쳤다.

‘야 뭔데. 나한테 왜 이러는데!’

[심장 : 몰라서 물어?]

심장의 불만 가득한 반문이 날아왔다.

[심장 : 우리가 매일 몸뚱이 너한테 얼마나 많은 일을 해 주는데. 온종일 심장도 뛰게 해 줘. 숨도 쉬게 해 줘. 소화도 시켜 줘. 그러면 우리도 좀 저녁엔 정상적으로 쉬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님? 이럴 거면 최소한 야식이라도 좀 빵빵하게 챙겨 주든가.]

‘아니, 나도 그건 아는데. 그런데…….’

[심장 : 그런데 뭐.]

‘가끔은 나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거 아니겠냐?’

[심장 : 가끔이 아니라 거의 매일 같은데?]

‘어오, 좀! 나 지금은 진짜 심각하다고.’

라키엘은 사정조로 말했다. 안 그래도 때아닌 구혼장 폭격 때문에 골치가 아픈 터였다. 이걸 어떻게 거절할까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겨서라도 무마하고 싶…….

‘……어? 잠깐만.’

비통함(?)을 만끽하던 라키엘은 멈칫했다. 방금 심장에게 대꾸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의 끄트머리. 그 꼬리를 움켜쥐었다. 생각의 단서를 이어 갔다. 조각조각 떠오르는 파편을 연결했다.

그러자 조금씩, 큰 그림이 그려졌다.

‘이거, 잘하면…….’

되겠다.

가능성이 보인다.

구혼장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탱자탱자 백수 라이프의 기반도 깔끔하게 다져둘 수 있을 듯했다.

그러니까…….

‘대장! 멈춰!’

[대장 : 싫은데 말입니다……?]

‘안 멈추면 나 보름 동안 단식한다? 감당할 수 있겠어?’

[대장 : 헉.]

꾸르릉…….

대장의 기겁하는 소리와 함께 괄약근의 반란이 중단되었다. 극심하게 아프던 아랫배의 통증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됐다. 자신감(?)을 회복한 라키엘이 고개를 들었다. 뒤를 따르던 데미안을 향해 말했다.

“데미안. 아까 보낸 마차, 다시 준비시켜.”

“예?”

이쪽이 별안간 아랫배를 움켜쥐는 통에 의아해하고 있던 데미안이었다. 이쪽의 명령에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2황자궁으로 가야겠다.”

“지금 이 늦은 시간에…… 말입니까?”

“어.”

당장 가 봐야겠다.

방금 떠올린 큰 그림을 실현하려면, 밀려든 구혼장을 처리하려면 그곳만큼 적절한 곳이 없을 테니까.

‘생각해보면 그래. 지금 구혼장을 보낸 왕실, 가문들, 사실 엄밀하게 따지자면 나라는 사람이 아닌, 황제가 될 황태자에게 구혼장을 보낸 거니까. 그럼 나중에 실제로 황제가 될 놈에게 구혼장을 떠넘기면 되는 거잖아?’

바로 그거다.

서로가 윈윈.

모두가 만족할 수 있다.

라키엘은 즉석에서 떠올린 ‘2황자에게 구혼장 짬(?) 시키기’ 작전의 큰 그림을 위해 마차에 올랐다. 그를 태운 마차가 거침없이 2황자궁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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