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45화 (145/468)

145화. 구혼장 처리법 (2)

덜거덩, 다각다각.

어느새 어둑해진 거리를 굴러가는 마차. 나직한 덜컹거림 속에서 라키엘은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때마침 마차가 익숙한 장소를 지나는 중이었다.

‘……로이-하비교.’

황도 마젠타를 가로지르는 마제나 강.

그 강에 놓인 가장 큰 다리.

약 300년 전의 전설적인 영지설계사 로이드 프론테라가 건설한 현수교이며, 또한 자신과 2황자가 황태자위를 놓고 정정당당히(?) 겨룬 장소이기도 했다.

‘하필이면 2황자 녀석을 만나러 가는 길에 딱 여기를 지나가네.’

치미는 공교로움에 쓴웃음이 배어났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2황자와 참으로 오랜만에 마주하겠구나 싶었다.

‘대결을 한 뒤로는 처음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오가며 다른 이들을 통해 소식이나 가끔 들었지,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건 그날 이후로 오늘이 처음이다.

심지어 황제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있던 때에도 그랬다.

묘한 우연인지, 혹은 의도적인 회피였는지, 녀석은 이쪽이 자리를 비우고 있을 때에만 황제를 문병했다.

그러고는 행여나 이쪽과 마주칠까 후다닥 돌아가곤 했다.

‘뭐, 그동안 나도 정신없이 바빴으니까.’

돌이켜 보면 참 많은 일을 벌였다.

데미안을 검투장에서 구해 내고, 별궁 한의원을 오픈하고, 간호사를 모집하고, 자금 마련을 위해 크레모에 다녀오고, 앙부아즈에선 더 바쁘게 굴렀다.

그 와중에 2황자를 따로 찾아가 수다나 나눌 여유 따윈 없었다.

‘그리고…… 애초부터 서로를 살갑게 방문하고 교류하는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원래부터 그랬다.

소설 마검황의 내용이 떠올랐다.

라키엘과 2황자 테오도르는 배다른 형제였다. 라키엘과 테오도르, 둘 모두 태어나며 어머니를 잃었다.

공교롭게도 둘 모두 지독한 난산이었고, 연이은 두 번의 비극에 충격을 받은 황제는 황후의 자리를 공석으로 두게 되었다던가.

어쨌건 그렇게 라키엘과 테오도르는 각각 엄마 없이 자랐다. 하지만 그런 동질감이 둘을 이어주지는 못했다.

‘잠재적인 경쟁 관계였으니까.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태생적으로.’

게다가 이쪽은 진짜 라키엘이 아니다. 그저 라키엘인 척만 하고 지내는 가짜일 뿐. 엄밀하게 따지면 테오도르와는 정말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생판 남일 뿐이다.

한데 녀석을 태연하게 찾아가 친한 척을 하며, 위선을 떨며 지내는 건 싫었다.

껄끄러웠다. 스스로가 가증스러워질 것 같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데면데면한 것이 훨씬 나았다.

‘난 라키엘이 아니니까.’

2황자와 가족이 아니니까.

“…….”

그러고 보니 진짜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는 어떻게 됐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라키엘, 아니, 이한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궁금했다. 한편으로는 약간의 죄의식이 들기도 했다. 어쨌거나 녀석의 몸을 이쪽이 강탈한 셈이니까. 그것이 고의였든, 아니었든 간에 말이다.

그래서였다.

문득 궁금해졌다. 확인을 해 보고 싶어졌다. 마침 물어볼 곳도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 물었다.

‘어이.’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을 뿐, 대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듣고 있는 거 다 알거든. 대답 좀 하지?’

그러자 곧 반응이 왔다.

딩동!

[당신의 대화 시도 때문에 오장육부의 여가생활이 중단됩니다.]

[심장이 TV를 끕니다.]

[허파가 단전호흡을 그만둡니다.]

[대장이 괄약근 줄넘기를 멈추었습니다.]

[간장이 간장 공장 공장장을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위장이 밀리터리 위장크림을 세척합니다.]

[콩팥이 콩팥 밭에서 땀을 닦습니다.]

‘……니들 뭐하고 있던 거냐.’

절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느껴졌다. 각자 쉬고(?) 있던 오장육부가 이쪽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너희들, 내가 원래 이 몸의 주인이 아닌 건 알고 있지?’

오장육부에게 물었다.

대답이 즉시 돌아왔다.

딩동!

[심장 : 당연하지. 우리가 이 몸 관리자인데 그걸 어떻게 모를까ㅋ]

……역시.

알고 있구나.

라키엘은 질문을 이어 갔다.

‘그럼 원래 이 몸의 주인이었던 사람 말이야. 진짜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그 사람 영혼이 어떻게 됐는지 혹시 알 수 있어?’

원래 라키엘의 영혼. 그의 행방을 알고 싶었다. 알고 나면? 솔직히…… 거기까진 모르겠다.

‘상황에 따라 도울 수도 있고. 혹시나 다시 이 몸을 되찾겠다며 난리를 피우면, 서로가 만족하도록 합의를 볼 수도 있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몸을 덜컥 돌려주기는 싫었다. 원래 죽었어야 할 몸을 살려주고 가꾼 건 이쪽이니까.

그러니 진짜 라키엘의 영혼과 충분히 대화나 협상을 하며 합의를 볼 생각이었다.

아니, 최소한 그럴 대비라도 조금은 해두고 싶었다. 그래야 조금은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어쨌건 그런 생각으로 오장육부에게 황태자 라키엘 영혼의 행방을 물었다. 한데 돌아오는 대답은…….

[심장 : 우리도 몰라~]

‘음?’

[심장 : 진짜야. 우리도 몰라. 어떻게 알겠냐. 하루아침에 그냥 주인이 휙 하고 바뀌어 버렸는데.]

‘나로?’

[심장 : 어ㅋ 너로. 우리가 뭐 어떻게 손 쓸 틈도 없었어. 너무 자연스러웠거든, 바뀌던 과정이.]

‘……조금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어?’

재차 물었다.

오장육부 녀석들의 싱긋 웃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 : 미안. 진짜 진짜 모름ㅎ]

‘……그래?’

[심장 : 어ㅎ]

“…….”

쓰읍.

괜한 기분 탓일까. 뭔가 알고 있으면서도 슬쩍 숨기는 느낌인데. 암만 봐도 좀 찜찜한데. 하지만 더 물어볼 시간은 없었다. 어느새 마차가 멈추어 섰기 때문이었다.

“전하, 도착했습니다.”

고막을 쿡 찔러 오는 데미안의 목소리. 퍼뜩 눈길을 들었다. 창밖으로 고색창연한 건물이 보였다.

처음으로 보는 건축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아마도 2황자궁이겠지.

“그래, 가자.”

마차에서 내렸다. 쌀쌀한 겨울바람을 헤치고 본궁 건물로 들어갔다. 늙은 시종장이 이쪽을 맞이했다.

“2황자궁의 살림을 도맡은 늙은이가 제국의 합당한 후계자이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늦은 저녁, 심지어 아무런 예고도 없는 방문이었다.

그런데도 시종장은 전혀 당황하지도, 흐트러지지도 않은 태도와 옷차림이었다. 설마 이런 시간까지 일을 하고 있었던 건가. 의문은 곧 풀렸다.

“여쭙기 송구하오나, 황태자 전하께서는 혹여 2황자님께 용무가 있으십니까?”

“으음.”

“이렇게 아뢰옵기 실로 송구하오나, 지금 2황자께서는 식사 중이십니다.”

“식사? 이 시간에?”

저녁을 먹기엔 좀 늦은 시간인데? 혹시 야식이라도 먹는 건가, 그 녀석이?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늙은 시종장의 점잖게 주름진 얼굴에 희미한 난처함이 서렸다.

“예, 황태자 전하. 최근 2황자께서 식사에 많은 시간을 들이고 계신지라…….”

“오래 먹는다고?”

“예, 전하.”

“흐음, 천천히 오래 식사를 하는 습관이 나쁘진 않지. 소화기관에 부담도 덜 될 테고. 사실 그거 몸에 좋은 거거든.”

라키엘은 싱긋 웃었다. 이 시간까지 시종장이 정복을 차려입고 있던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조금 전까지 2황자의 식사 시중을 들고 있었던 거겠지.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하면,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지. 예고도 없이 찾아온 방문객 주제에 식사 시간을 방해하는 건 실례일 테니까.”

“실로 송구하옵니다, 전하.”

“아냐. 괜찮아. 식사가 끝나면 내가 방문했다고 알려 주면 돼.”

“명을 받들겠습니다.”

시종장이 황송하게 허리를 접으며 물러났다.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은 응접실에서 기다리며 자신의 계획을 살포시 점검했다.

‘구혼장, 그걸 2황자 녀석에게 떠넘겨야 해.’

이른바 ‘구혼장 짬처리 작전.’

충분한 가능성이 보였다. 현실적인 실행각이 보였다. 2황자의 동의와, 구혼 상대의 호응만 있다면 성공시킬 자신도 있었다.

‘어차피 나는 황위에 오를 생각이 없으니까. 안정적인 황족 라이프를 즐길 기반만 마련되면 황위 같은 거, 2황자 녀석에게 떠넘길 거니까. 그러니까 황제의 반려자, 황후가 되고 싶어서 구혼장을 보낸 여자들을 2황자 녀석과 이어지게 해 주는 쪽이 맞아. 그게 옳은 길이고.’

확신이 들었다.

물론 꼬장꼬장한 난관이 없진 않을 터였다.

‘황제의 반응이 뜨겁긴 할 텐데…… 그건 뭐.’

충분히 무마할 자신이 있다. 아니, 오히려 역으로 황제의 의표를 찌를 계획도 빵빵하게 세워뒀다.

황제의 반응은 딱히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번 일로 황제에게 극찬을 들을 거니까.

그러니 2황자궁에서 연회를 개최하면 된다. 구혼장을 보낸 가문의 레이디들을 모조리 초청하면 된다. 그렇게 2황자의 실물을 보여 주면?

게임 끝이다.

무조건 성공한다.

레이디들의 눈동자가 하트로 변할 거다.

‘2황자 녀석. 나보다 키도 크고, 체격도 좋고, 비율은 쩔고, 훈남 얼굴에다가 운동도 잘하고, 성격도 성실해, 술 담배도 안 하고. 완전 최고거든.’

게다가 황족 수저까지 갖췄다.

요리 보고, 죠리 봐도 최강의 특급 핵존잘 신랑감이었다. 이 정도면 필승 카드다.

비유하자면, 지구최강 아이돌 산탄소년단 멤버급의 비주얼과 만수르급 재력, 미국 대통령 아들의 사회적 지위를 한 몸에 지닌 존재니까.

……라는 생각을 하던 와중이었다.

“이런, 제가 소식을 듣는 게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어쩐지 묵직한 목소리가 고막을 푹 찔러왔다. 고개를 들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허겁지겁 응접실로 들어오는 거구의 남자가 보였다. 아니, 거구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몸무게는 대강 봐도 150킬로그램은 되어 보였다. 걷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턱 아래엔 삼겹살을 능가하는 5겹으로 겹친 살집이 출렁였다. 배도, 옆구리도, 온몸이 당장 터질 것처럼 빵빵했다.

‘날 아나? 아니면 2황자궁에서 일하는 시종인가? 그런데 시종 중에 저렇게 뚱뚱한 사람이 있어?’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누구?”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2황자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웬 난데없는 초고도 비만남이 와서 미안한 듯이 진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오는 걸까. 의아했다.

한데 이쪽의 물음을 받은 비만남이 쑥스러운 듯이 볼살을 푸들거리며 웃었다.

“접니다.”

“……음?”

“저라구요.”

“……으음?”

“하하하…….”

“…….”

어색하게 웃는 비만남. 그 푸짐한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자니 비로소, 조금씩 익숙한 이목구비가 고생대 캄브리아기 지층에 뒤덮인 삼엽충 화석처럼 희미하게나마 엿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 이목구비는…….

“저, 테오도르입니다, 형님.”

“…….”

“오랜만에 뵙네요.”

“……거억.”

딸랑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지나치게 튼실빵빵(?)해진 2황자의 모습에, 라키엘은 신음성을 내뱉고 말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