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다이어트는 네 운명 (1)
처음엔 괜찮았다. 괜찮을 줄 알았다. 그 유명한 로이-하비교에서 황태자인 형과 겨룬 후, 그 대결에서 패배한 이후에도 정말로 괜찮았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처음에는.
“…….”
2황자, 테오도르는 복잡한 눈길을 들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 눈빛을 볼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테오도르의 눈꺼풀에 피둥피둥하게 찐 살 때문에 눈빛이 가려졌기 때문이었다.
어쨌건 테오도르는 띵띵해진 입술 사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괜찮은……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처음 3일 동안은 평소와 똑같았다. 아침에는 일어나 검술 훈련을 하고, 오전 내내 제왕학을 비롯한 각종 수업을 받았다.
점심에는 산책을 하고, 오후에는 책을 읽었다. 저녁이 되면 각계 인사, 귀족들과 만남을 가졌다.
너무나 정석적이고 성실한 황자의 하루였다. 매 순간, 어떤 일정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열심히 훈련했고, 성심껏 공부했으며, 모든 만남에 진지했다.
그러다가 4일째 되는 날, 우연히 깨달았다. 세수를 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물기를 닦으며 거울을 보다가. 그러다가 불현듯 깨닫고야 말았다.
자신이 형에게 패배한 이후 3일 내내,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는 사실을.
“…….”
충격이었다.
비로소 실감이 났다. 나는 괜찮지 않았던 거구나. 그저, 괜찮은 척만 하고 지냈던 거구나.
그때부터였다. 지독한 상실감이 엄습해 왔다. 평소에 성실했기에, 어릴 적부터 한 번도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기에, 그토록 항상 노력하며 자라왔기에…… 성심껏 키워왔던 꿈의 크기와 열정의 깊이만큼 상실감도 거대했다.
모든 게 허무해졌다.
언젠가 이룰 수 있으리라던 꿈. 자신도 어쩌면 황제가 될 수 있으리라 품었던 희망. 거기에 걸었던 나날들의 노력과 간절함이 전부 허망해졌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지독한 패배감에 몸부림쳤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밤잠을 뒤척이다가 벌떡 일어나 2황자궁의 주방으로 달려간 것은. 잠옷 차림 그대로 주방에 놓인 과일이며 빵을 걸신들린 듯이 먹어치운 것은.
‘태어나서 먹은 모든 음식 중에 제일 맛있었어.’
토하기 직전까지 먹었다. 아니, 위장에 음식을 쑤셔 넣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날, 형에게 패배한 이후 처음으로 편하게 잠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아침을 맞이했을 때,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깨닫게 되었다.
검술 훈련? 하기 싫었다.
먹어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제왕학을 비롯한 각종 수업? 귀찮아졌다. 먹어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산책? 독서? 그걸 해서 뭣하나 싶었다. 각계 인사, 귀족과의 만남? 친교? 성가셔졌다. 의미 없게 느껴졌다. 그딴 것들보단 먹을 때가 훨씬 편안하고 행복했다.
그때부터였다.
아침에 일어나며 꿀 발린 빵을 찾았다. 과일이며 각종 크림이 발린 과자, 기름에 튀긴 음식, 또 간식, 다시 음식, 또다시 간식, 거기에 푸짐한 야식까지.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드는 때까지 지치지도 않고 음식을 씹어댔다. 위장을 채웠다. 아니, 위장을 비우지 않았다.
남들이 뭐라건 상관없었다. 행복했다. 그렇게 1년 조금 안 되는 시간을 보냈다. 물론, 지금도 자신은…….
“이래 보여도 저는 괜찮습니다, 형님.”
“…….”
“자고로 남자는 풍채가 좋아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이것도 나름 나쁘진 않습니다. 하하하.”
“…….”
2황자, 테오도르가 사람 좋게 웃었다. 그의 빵빵해진 볼살이 물풍선처럼 트월킹을 추며 흔들렸다. 그걸 보는 라키엘의 가슴도 철렁철렁 적색경보를 울려댔다.
‘이 사태를 뭐라고 해야 되냐.’
난감했다.
혼란스러웠다.
고작 잠깐 몇 달쯤 못 봤다고,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2황자가 이렇게 빵빵(?)해져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한편으로는 녀석의 상태를 깨달을 수 있었다. 방금 2황자에게서 대략 들은 설명 덕분이었다.
“나쁘진 않아? 온종일 먹고만 지내는 게?”
“예, 형님. 뭐랄까요. 마음이 아주 편안해집니다.”
“어, 추, 충분히 그래 보이네.”
“그렇지요?”
“…….”
그렇기는 개뿔.
딱 보니까 알겠다.
‘이놈 이거, 스트레스성 폭식증이구만.’
성실했던 만큼 실패하며 받은 좌절감이 어마어마했던 거다.
아마 그런 실패는 인생에서 처음이었겠지.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 실패라곤 모르는 인생을 살아왔을 테니까. 그렇게 주위의 기대만 잔뜩 받으며 자라왔을 테니까.
‘성실한 만큼 온실의 화초 멘탈인 거였어.’
결국, 단 한 번의 패배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아니, 이 경우엔 무너졌다기보단 지나치게 튼실해져 버렸다고 해야 할까.
어쨌건, 라키엘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아. 이러면 나가린데.’
그의 미간이 팍 찡그려졌다.
자신에게 날아온 수많은 구혼장을 짬 처리하려고 찾아온 터였다. 2황자의 협조를 받아서, 2황자궁에서 연회를 열 계획이었다.
연회에 구혼자들을 초청해서, 2황자와 레이디들 사이에 사랑의 짝대기를 이어주려 했다.
물론 성공할 자신도 있었다.
2황자의 스펙이 워낙 쩔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외모마저 엄청난 훈남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훈남은 개뿔! 당장 훈제 바비큐를 해도 50인분은 나오겠네 진짜!’
2황자의 훈훈한 외모에 기대를 걸고 추진하려던 계획이 근본부터 흔들리고 무너질 판이다. 아니, 이건 로키산맥 짬통 불곰이 계획의 뿌리에 싸커킥을 날리는 수준이다.
‘하. 인생 진짜.’
라키엘은 기나긴 한숨을 내뱉었다. 계획을 포기할까.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기는 싫었다.
“어이, 너.”
“예, 형님.”
“너 혹시, 다이어트 해볼 생각 없어?”
“……다이어트라뇨?”
피둥피둥해져서 단춧구멍이 된 눈을 끔벅거리는 2황자. 녀석의 기색을 보니 다이어트라는 말을 처음 접해보는 듯했다.
라키엘은 제안을 정정했다.
“감량 말이야. 살 빼볼 생각 없냐고.”
“살을…… 말입니까?”
“어.”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해야 한다. 무조건 이놈을 다시 날씬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이놈한테 구혼장을 짬시킬 수 있을 테니까!
의지를 불태우며 설득에 채찍질을 가했다.
“네가 지금 상태에 만족하고 있다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기가 조금 조심스러워지기는 하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하지만 형님, 저는 지금 상태에 만족합니다.”
“그래. 물론 만족하겠지. 나도 알아. 하지만 그 상태, 건강에 결코 좋지가 않아서 하는 소리야.”
“건강…… 말입니까?”
“어.”
확고하게 끄덕.
확신을 담은 눈초리로 설득했다.
“비만인 상태로 지내다간 갖가지 병에 걸릴 거야. 고지혈증이라거나 당뇨병 같은 것들 말이지. 게다가 지나치게 늘어난 체중 때문에 발목이나 무릎 관절도 안 좋아질 거고.”
“…….”
“그뿐일까. 고혈압은 물론이고 각종 내분비계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어. 지방간이 온다거나, 심장 혈관이 좁아지는 경우도 있고 말이지. 그 밖에도 말하자면 엄청 많아. 그만큼 비만이 위험한 거거든.”
“…….”
“그런데도 계속 이렇게 지낼 거야?”
“예.”
……어째서!
하마터면 빼액 외칠 뻔했다. 2황자 녀석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정말로요.”
“…….”
“사실 저도 압니다. 이렇게 지내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다는 거 말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마음이 편안하거든요. 게다가 제가 이런 모습으로 지낸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해가 되는 것도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
“…….”
“그러니까 형님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굳이 무리해서 살을 빼는 건…… 모르겠습니다. 별로 그러고 싶지가 않네요.”
“…….”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본인이 싫다는데 어쩌겠는가. 억지로 시켜서 살을 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난리 났네.’
라키엘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나름 설득을 시도해봤는데, 의외로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난감했다. 무엇보다도, 2황자 녀석의 다이어트 의지가 1도 느껴지지 않는 점이 가장 곤혹스러웠다.
‘모름지기 다이어트에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의 의지, 의욕, 동기부여인데.’
그게 전혀 되지 않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지. 남이 등 떠밀어서 하는 다이어트는 한계가 있으니까.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건 무조건이다. 반박의 여지가 없는 팩트다. 설령 적당히 살을 빼는 데까지 성공한다고 해도? 결국엔 다시 요요를 맞이할 확률이 99.9%는 된다.
그러니 반드시, 스스로 살을 빼겠다는 모티베이션을 활활 불태워야 한다. 그래도 성공할까 말까 하는 게 다이어트라는 놈이니까.
‘쓰읍. 어떡하지.’
라키엘은 난감한 눈길로 2황자 녀석을 쳐다보았다. 답이 안 보였다.
그냥 비만도 아니고 고도 비만 수준에, 의지도 보이지 않는 이놈을 어떻게 빡쎄게 감량을 시킬까. 무슨 수로 의지를 붙태우게 만들까.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생각해라, 이한. 생각을 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대뇌피질로 종이접기를 했다. 뇌 주름 사이에 알차게 들어찬 기억의 알맹이를 좌르륵 검색했다.
그러자 서서히, 각이 보였다.
‘그래…… 생각해보면 이 녀석, 근본은 엄청 성실한 녀석이었지. 책임감도 유달리 강했고.’
소설 마검황에서 보인 모습들이 그랬다. 비록 우유부단한 면 때문에 몰락하긴 하지만, 2황자 테오도르는 기본적으로 성실한 모범생이었다. 그런 녀석의 성격을 떠올리자 실마리가 잡혔다.
‘……이거다.’
퍼즐의 조각이 보였다. 발상을 끌어모았다. 쌓고, 조립하고, 조합했다.
2황자가 스스로 감량 의지를 불태우게 만들 마법의 단어를 생성했다. 문장으로 철컥 장전했다. 본격적인 발사를 위해 혓바닥을 침으로 촵촵 적셨다.
“후우. 그렇구나. 내가 네 마음을 모르고서 너무 쉽게 이야기를 꺼냈구나.”
“괜찮습니다, 형님.”
……괜찮긴.
난 안 괜찮아, 인마.
그런데 이제 곧 너도 안 괜찮아질 거야.
라키엘은 음흉한 미소를 재빨리 접어 넣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후우. 내가 이 이야기를 하진 않을 수 없겠구나.”
“어떤…… 이야기를 말씀이신지요?”
“사실은 말이다.”
슬쩍 운을 떼며 조준. 일부러 한 템포 뜸을 들여 녀석의 관심을 끌어올리고. 아련하게 발사.
“실은 내가, 앞으로 1년도 못 살게 될 것 같구나.”
“……예에?”
놀란 듯 움찔하는 2황자 녀석.
그러나 라키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절반만 진실이라서, 그렇기에 진짜 진실과 거리가 백만 광년쯤 떨어진, 낯짝 두껍고 새빨간 거짓말을 회전초밥 접시 내밀듯이 착착, 혓바닥에 올려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