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61화 (161/468)

161화. 원인 불명의 마비 (2)

“환자가 겪는 하지 마비의 원인은 바로…….”

꿀꺽.

켈로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곁의 다른 예비 의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의 시선이 라키엘의 입으로 모였다. 그 순간, 라키엘의 입꼬리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희미하게 맺혔다.

“공짜로는 안 알려줄 거야.”

“……예?”

“못 들었어? 그냥은 알려주기 싫다고.”

“…….”

켈로드의 표정이 굳었다.

“그냥은 못 알려주시겠다니, 전하께서는 설마 저희를 희롱하려는 것이십니까?”

“희롱?”

“예.”

켈로드가 강직한 눈빛을 던져 왔다.

“전하께서는 원인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저 환자가 겪는 마비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짐작가는 곳이 있노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것을 밝힐 순간이 되니 다른 말씀을 하며 발뺌을 하려는 것이십니까?”

“흠, 발뺌이라.”

라키엘은 능청을 떨며 되물었다.

“내가 왜 정답을 아무런 대가 없이 알려줘야 하지?”

“하지만 전하.”

“환자의 미래가 걸린 일이라고?”

“예.”

“너희한테는 안 알려줄 거지만, 치료는 내가 알아서 해줄 건데?”

“그렇지만…….”

“아, 조별 과제라서? 설마, 다 같이 책임과 결과를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건가?”

“그렇습니다, 전하.”

켈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키엘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럼 더 이상한데?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닌가?”

“……예?”

“맞잖아. 생각해봐. 다 함께 책임을 지고 결과를 공유하는 조별 과제인 건데, 어째서 내가 일방적으로 대가 없이 너희한테 정답을 알려줘야 하는 거냐고.”

“…….”

“솔직히 말해봐. 조별 과제 안 해봤지? 이건 불공평한 거 아닌가? 나만 자료 준비하고, 정리하고, 발표까지 싹 다 하는 거랑 뭐가 달라.”

“…….”

켈로드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듣다 보니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싶었다. 만일, 상대가 황태자가 아니었다면 진즉 대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힘껏 참았다.

신분이 다르니까.

상대는 권력자니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려 나름의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 전하께서는, 저희와 따로, 독자적으로 졸업시험을 진행하시겠다는 겁니까?”

“일단은? 너희가 지닌 수준이 얼마나 되는지를 좀 봐서.”

“……알겠습니다.”

켈로드는 내심 이를 갈았다.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상대의 실력에 의문을 지닌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권력과 지위를 남용하며 우리 사이에 낀 주제에.’

사실 그는 황태자가 싫었다. 이렇게 편법을 쓰며 자신들 사이에 끼어들기 전에도 그랬다. 황도 곳곳에 파다한, 황태자의 별궁 한의원에 대한 소문 때문이었다.

‘별궁 한의원? 사람 몸을 가시로 찔러서 아픈 곳을 치료한다고? 게다가 뭐? 말린 풀뭉치를 살갗 위에 올려두고 태워? 그런 걸로 병이 사라져?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건 사이비다. 돌팔이나 쓸 치료법이다. 절대로 제대로 된 의술이라 부를 수 없다. 한데도 환자가 모이는 건, 그저 별궁 한의원이 공짜이기 때문이다. 갈 곳 없는 환자들이 황태자의 권위와 공짜라는 유혹에 굴복한 결과일 것이다.

‘게다가 풍문으로 도는 소식 중에는 더 황당한 일도 있었지…….’

켈로드는 기억을 더듬었다.

황태자가 궁정마법사의 전격마법을 맞았다고 했다. 그 전격마법을 아이의 목덜미에 꽂은 가시를 통해 주입했노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이의 발작이 멎었다고도 했다.

‘거짓말.’

아마 황태자가 과장된 소문을 퍼뜨렸을 것이다. 저 정도 권력과 지위를 지닌 자라면 별달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당신의 명성은 모두가 왜곡된 모래 위의 성에 불과해. 물론 그것까진 괜찮았어. 황족의 조금 괴상하고 특이한 취미생활 정도로 이해해 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당신이 여기까지 들어와서 우리와 나란히 시험을 치르고, 졸업자격과 의사 면허를 따내는 건 아니지. 그건 선을 넘는 것 아닌가?’

물론 사이비 의술이나 사용하는 황태자의 실력 따위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정식 면허를 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용서가 안 됐다.

“…….”

으드득.

켈로드는 남몰래 이를 갈았다. 그를 보며 라키엘은 내심 빙긋 웃었다.

‘이야. 이 친구 깡다구 보소.’

그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자신 앞에서 은근히, 아니, 대놓고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반감을 보이는 켈로드. 볼수록 대단했다. 켈로드가 품은 반감의 이유가 짐작이 되기에 더욱 기꺼웠다.

‘이 친구는 볼수록 더 마음에 드네.’

자신이 익혀온 배움, 의술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 의술을 함부로 침해하고 더럽히려는 자에 대한 순수한 분노 또한 느껴졌다. 물론, 지금은 그 분노의 대상이 이쪽이라는 점이 좀 난감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 친구를 평가할 좋은 기회는 되겠군.’

그는 흥미로운 눈길로 켈로드를 비롯한 조원들을 살폈다. 그들은 병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마 자신들끼리라도 환자를 진단하고, 진료할 생각인 듯했다.

‘그럼 실력부터 좀 볼까.’

일단 태도 점수는 매우 합격.

다음은 실력을 평가할 차례.

라키엘은 진료실 한쪽의 의자에 앉았다.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서, 훗날 별궁 한의원에 스카웃(?)할 인재를 물색하는 마음으로, 시험 감독관의 자세로 빙의하며 조원들의 진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흐음.’

켈로드와 조원들은 환자의 이전 병력 등을 문진했다. 혹시 지병이 있느냐, 최근 충격을 받거나 심하게 넘어진 적이 있는지, 혹은 머리를 다친 적은 없는지 등등. 하지만 환자의 대답은 아니오, 였다.

뒤이어 조원들은 수제 청진기로 환자를 진찰하고, 열을 재어보기도 했다.

‘그런다고 뭐가 나오지는 않을 텐데.’

라키엘은 환자의 마비 원인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들의 방식으로는 원인을 진단하지 못하리란 사실 또한 잘 알았다. 그렇기에 지금 봐야 할 것은, 조원들의 태도였다.

‘……호오.’

가늘게 뜬 눈으로 조원들을 관찰하던 라키엘은 내심 감탄했다.

‘그런데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해? 생각보다 더 괜찮은데?’

아마도 막막할 거다. 절망적이기도 할 거다. 환자를 문진해도, 진찰해도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으니 정말로 답답할 거다. 게다가 상황 또한 저들을 도와주지 않고 있었다.

‘이건 그냥 환자를 진료하는 게 아니라, 졸업이 걸린 시험이니까.’

몇 년 동안 이곳에서 구르며 배운 것들을 평가받는, 가장 중요한 시험이었다. 한데 이런 시험에서 답안지에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기분을 느낀다면, 그 사람의 멘탈은 어떻게 될까.

‘당황스럽겠지. 흔들릴 거고.’

분명 저들도 그럴 것이다.

한데 놀랍게도, 켈로드와 조원들은 아무도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표정도, 눈빛도, 목소리도 시종일관 침착하기만 했다.

라키엘은 저들이 저럴 수 있는 비결을 알 것 같았다.

‘환자 때문이겠지, 아마도.’

의료인은 저래야 한다.

아무리 난치병, 불치병인 환자를 마주하게 되더라도 그렇다. 설령 가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과 맞닥뜨려도 그렇다.

최소한, 절대로, 환자 앞에서 의료인의 멘탈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불안하고 확신 없는 모습을 보여도 안 된다. 아무리 후달려도, 환자 앞에서는 끝까지 태연하고 침착해야 한다. 설령 마음속에 지옥도가 펼쳐지는 상황이라도 그렇다. 그것이 의료인의 숙명이다.

‘의료인의 불안해하는 모습은…… 그대로 환자에게 옮아가니까.’

그냥 옮아가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 수십 배는 증폭되어 옮아간다.

그러면 환자는 무너진다. 자신을 돌봐주는 의료인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느껴 버리는 순간, 환자는 더는 믿고 의지할 곳을 잃어버리고서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져 버리고 만다.

그러니 절대로, 의료인은 환자 앞에선 흔들리면 안 된다. 아주 단순하지만 지키기가 어려운 수칙이었다.

한데 지금 켈로드와 조원들은?

그걸 해내고 있었다!

‘이거, 계속 탐나는데?’

라키엘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멘탈적으로는 합격이다. 실력은? 어차피 학장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한 마비 환자이니, 지금 상황에서 더 무엇을 기대할까.

‘이만하면 볼 건 다 봤군.’

라키엘은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났다. 이제는 슬슬 자신이 나설 때가 됐다. 우선은 자신이 짐작한 환자의 마비 원인을 확인하는 것부터. 그는 조원들을 슬며시 비집고 환자에게 다가갔다.

“잠깐 내가 좀 볼까.”

“……아, 예, 전하.”

켈로드와 조원들이 떨떠름한 얼굴로 한발 물러섰다. 라키엘은 환자의 침상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환자에게 싱긋, 미소부터 보냈다.

“반갑습니다, 미구엘 씨.”

“저, 전하를 뵙습니다.”

환자가 긴장한 기색으로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라키엘은 그를 제지했다.

“그냥 누워 계세요. 그리고 지금은 황태자가 아니라 의료인으로서 당신을 진단하고 치료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

“뭐, 부담을 갖지 말라고 당부를 해도 그게 쉽지는 않겠지요. 그러니 일단 이야기부터 좀 들어보죠. 마비 증상이 오기 전에 한동안 장염을 앓았다고요?”

“예…… 예, 전하.”

“그 후에는 발끝이 따끔거리고 저리는 증상이 나타나다가, 서서히 발가락부터 마비가 번졌고요?”

“예, 그렇습니다, 전하.”

“머리나 목, 등이나 허리에 심한 충격을 받은 적도 없었다고 했죠?”

“물론입니다, 전하. 넘어지거나 다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환자, 미구엘이 말끝을 흐리며 자신의 발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움직이지 않게 된 두 다리. 처음엔 그냥 피곤해서 그런가 싶었다. 발가락이 잘 안 움직여질 때까지는, 정말로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점점 마비가 심해졌다.

처음엔 발가락부터 둔해지고 피부 밑으로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지더니, 다음엔 발 전체와 발목을 지나 종아리까지 증상이 번졌다. 급기야 이제는 두 다리 전체와 골반 언저리까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겁이 났다. 이곳의 의사들마저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기에 더욱 두려웠다. 이대로 가다간 평생을 앉은뱅이로 살아가야 하는 건 아닌지. 자다가도 악몽에 시달리며 몇 번이고 깨어나는 요즘이었다.

“하면, 마비가 시작된 건 정확히 얼마쯤 전이였죠?”

“그게…… 대략 엿새쯤 됐습니다, 전하.”

“흐음.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진맥을 해보죠. 잠깐 손목을 좀.”

라키엘은 환자가 머뭇거리며 내미는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환자가 움찔했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진맥 스킬을 발동했다.

‘진맥.’

딩동!

[진맥을 시작합니다.]

[스캔 중.]

[3…… 2…… 1……]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의 <종합검진표>를 확인해주세요.]

드디어 결과가 나왔다.

라키엘의 시선이 아래로 움직였다. 그곳에 검진표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부를 수 있는, ‘종합소견’ 항목이 있었다.

[종합 소견 : 기본적으로는 대체로 건강한 신체입니다. 그러나 일부 염증에 의한 운동 신경세포의 수초(myelin)가 벗겨진 상태인, ‘급성 염증성 탈수초성 다발성 신경병증(Acute Inflammatory Demyelinating Polyneuropathy, AIDP)이 감지됩니다.]

……역시.

‘빙고.’

예상이 맞았다. 라키엘은 미소를 삼키며 켈로드와 조원들을 돌아보았다.

“잠깐 밖에서 이야기를 좀 할까.”

모두를 복도로 불러냈다.

켈로드가 굳은 얼굴로 물어왔다.

“전하께서는 뭔가 진단을 하셨습니까?”

“왜? 궁금해?”

“…….”

“물론 궁금하겠지. 그런데 어째서 궁금한 걸까.”

“궁금한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환자의 회복이 걸린 일입니다.”

“그래?”

“예, 그렇습니다.”

“그럼 내가 하나 묻지. 여기서 내가 이 환자가 겪는 마비의 원인을 정확하게 밝혀내면, 이후에 치료를 마쳐도 그 모든 공을 내게 돌릴 수 있겠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켈로드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라키엘의 미소가 의미심장해졌다.

“너희는 모두 진단에 실패했으니까. 그러니 내가 원인을 밝혀내고 치료를 완료하면, 그 모든 공적을 내게 양보하고 졸업시험의 실패를 인정하겠느냐는 말이지.”

“그럼 설마, 전하만 시험을 통과하고, 저희는…….”

“어. 모두 탈락. 졸업 실패.”

“…….”

“그래도 괜찮겠어?”

“…….”

아무도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켈로드와 조원들은 망설였다. 서로를 돌아보며 잠시 눈길을 나누었다. 이내 모두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전하.”

켈로드가 모두를 대표해서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전하의 제안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정말로?”

“예, 전하.”

“그러면 이 환자의 회복 여부와 상관없이 졸업을 위해 1년을 다시 기다려야 할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물론입니다.”

“어째서?”

“저희 모두가, 이곳에서 그렇게 배웠으니까 말입니다.”

켈로드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선택을 철회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졸업 여부보다도 환자의 회복이 더욱 중요하다는 대답이었다.

덕분에 라키엘은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거지.’

바로 이런 놈들을 원했다, 자신은. 그래서 일부러 모진 테스트를 해본 거였는데. 조원 전체가 이렇게나 마음에 드는 대답을 꺼낼 줄이야.

“좋아. 전원 별궁 한의원행 확정.”

“예?”

“각설하고, 어쨌건. 앞으로의 치료를 위해 환자의 마비 원인을 알려주자면-”

라키엘은 숨을 골랐다. 켈로드와 조원들이 쫑긋 귀를 기울였다. 그 모습에 라키엘은 자신의 기억 속 지식의 서랍을 열었다. 진맥 결과, 지금 환자가 앓고 있는 마비의 원인은 확실하니까.

국제 질병분류 기호로는 G61.0.

대한민국의 산정특례 코드로는 V126.

정식 명칭은 바로…….

“길랭-바레 증후군(Guillain-Barre syndrome)이야. 그리고 내겐, 이걸 고칠 방법이 있어.”

그의 입가에 자신감 서린 미소가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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