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62화 (162/468)

162화. 인공호흡기가 필요할 때 (1)

“길랭-바레 증후군(Guillain-Barre syndrome)이야. 그리고 내겐, 이걸 고칠 방법이 있어.”

라키엘의 입가에 자신감 서린 미소가 맺혔다. 그는 기억의 서랍 속 내용을 살폈다.

길랭-바레 증후군.

이건 매우 희귀한, 신경에 발생한 염증이 근육의 마비를 불러오는 질환이었다. 한데 문제는 현대 의학으로도 염증의 정확한 최초 발생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라키엘은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

“뭐, 이 증후군의 증상은 지금까지 모두가 환자에게서 본 모습 그대로야. 본격적인 증상이 나타나기 1~3주쯤 전에 감기나 호흡기 질환, 장염 등의 위장 질환이 먼저 시작되지. 혹은 외상을 입거나 수술 후의 후유증에 의해 증상이 시작되기도 하고. 그 후엔 사지의 말초에서부터 서서히 마비가 진행돼. 아, 그리고-”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주 가끔씩은, 백만분의 1 정도 확률로는 독감 등의 백신을 맞고 나서 후유증으로도 증후군에 당첨될 수 있다나.”

“……백신, 이 뭡니까?”

“그런 게 있어.”

라키엘이 능청을 떨었다.

켈로드의 물음이 이어졌다.

“그럼 이게 왜 생긴 겁니까?”

“원인?”

“예.”

“몰라.”

“예에?”

“아무도 모른다고.”

“…….”

“그나마 추측되는 대로만 알려줘? 가장 유력한 가설로는 면역질환과 바이러스설이 있어. 캄필로박터, 마이코플라스마성 폐렴, 혹은 장염, 헤르페스4형 바이러스, 인플루엔자, 간염, HIV, 엡스타인-바 바이러스, 루푸스, 호지킨 림프종, 그리고…… 제일 엿 같은 코로나19도 있네.”

“…….”

“번외편으로는 백신도 잘못 맞으면 당첨이야. 예를 들자면 H1N1형 돼지독감 백신, 파상풍, 광견병, 뇌수막염, B형 간염까지. 어쨌건, 대강 그런 드러운 것들에 걸리거나 백신을 맞고 운이 나빠서 후유증 당첨으로 면역 체계가 꼬이는 경우가 있어. 그러면 꼬인 면역 체계가 착각을 일으키거든.”

“…….”

“일부 바이러스나 세균의 외피 분자 구조가 사람 신경세포 수초(myelin)의 구조랑 비슷해서, 살짝 맛이 간 면역계가 신경세포의 수초를 바이러스나 세균인 줄 알고 착각해서 공격을 하는 거지. 팀킬 말이야, 팀킬.”

“…….”

“뭐, 대략 그러해서 신경세포가 맛이 가고, 결과적으로 마비가 일어난다…… 그 정도쯤 되려나. 그런데 확실하게 결론이 난 정설은 아니고, 그냥 아직까지는 유력한 가설이야, 가설.”

“…….”

“그런데 왜 조금 전부터 말이 없어?”

“죄송합니다.”

“응?”

“무슨 말씀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응 괜찮아. 별로 기대 안 했어. 사실 방금도 엄청나게 많이 줄여서 설명한 거였지만.”

“…….”

졸업 예비의사, 켈로드는 말을 잃었다. 그의 굳은 눈길이 황태자를 향했다.

‘이 사람, 믿을 수 있을까.’

아니.

볼수록 미심쩍다. 방금 황태자가 줄줄 꺼내놓았던 이야기도 그랬다.

‘길랭-바레 증후군? 백신? 헤르페스4형 바이러스? 신경세포 수초? 분자 구조는 또 뭐지. 황태자는 대체…… 저런 말들을 어떻게 지어낸 걸까.’

전부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말들이었다. 그런 것들을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으니, 오히려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저 자신과 조원들을 현혹하기 위해 꺼내는 화려한 언변으로만 느껴졌다.

‘교수님도 주의하라고 당부하신 적이 있지. 원래 사기꾼, 사이비, 돌팔이들이 설명을 그럴듯하게, 복잡하게 하는 법이라고. 그런 자들을 조심하라고.’

지금도 그런 듯했다. 황태자의 주장과 진단이 신뢰가 가지 않았다. 자연 말대꾸를 하는 켈로드의 목소리도 착 가라앉았다.

“그럼, 결국은 전하께서도 원인을 잘 모른다는 말씀이신 거로군요.”

“대강은?”

“하면, 치료법을 알고 계신다는 말씀은…… 기만이었습니까?”

그의 물음이 날카로워졌다.

원인을 모르는데 치료할 수 있다니. 말이 안 된다. 헛소리다. 그는 다른 조원들을 슬쩍 돌아보았다. 눈길을 받은 조원들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황태자는 지금 말도 안 되는 허풍을 치고 있다고.

‘당연하지. 저런 이상한 지식은 어디서도 접해보지 못했으니까.’

어떤 문헌에서도 보지 못했다. 교수님들도, 학장님도 저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당연하다. 존재하지 않는 허황된 말들일 테니까.

그런 그의 노골적인 의심 덕분에 라키엘은?

“기만이라. 허허허.”

그저 웃어 버렸다.

“내가 허풍을 쳤다고 생각하는 거구만. 그렇지?”

“예.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그렇습니다.”

“너무 솔직하네.”

“환자의 미래가 걸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겠다?”

“예. 송구하지만 방금 언급해 주신 지식을 어디서 얻으셨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실는지요.”

“어려울 것도 없지.”

라키엘은 빙긋 웃었다. 태연하게 진실과 거짓을 촵촵 섞어서 척척 내놓았다.

“황궁 비고에 보관된 고대 문헌에서 봤어.”

“고대 문헌, 말입니까?”

“그래. 거기에 사라진 고대 초문명 국가의 수많은 지식이 담겨 있더군. 그중엔 이제는 잊힌 고대의 의술도 있었고.”

“그게 무슨…….”

“거기서 봤어.”

“…….”

“안 믿기면 직접 가서 확인해보든가.”

라키엘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덕분에 켈로드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황궁 비고에 직접 가서 확인해보라니. 거긴 황족도 들어가기 어렵다는 곳이었다. 한데 자신이 어떻게?

‘황태자, 이렇게 치사한 인간이었나?’

그는 자신이 품고 있던 인류애의 한 조각이 처참하게 뭉개지는 기분을 만끽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기분이 그렇든 말든 라키엘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은 훨씬 시급한 사안이 있으니까.

“어쨌건, 지금은 내 말의 신뢰성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야. 환자를 위한다면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준비해야 할 일이 따로 있어.”

라키엘은 모두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이쪽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눈빛들. 그러나 상관없다. 곧 알아서 바뀌게 될 테니까. 싫어도 이쪽에게 의지하게 될 테니까.

확신을 품고서 말했다.

“곧 환자의 호흡에 이상이 올 거다.”

“……예?”

켈로드가 미간을 찡그렸다.

“호흡에 이상이 온다니요? 전하. 환자는 현재 하지 마비 증상만을 겪고 있는…….”

“알아. 아직까지는 하지에만 마비가 왔지만, 조만간 호흡마비가 올 거야. 그게 제일 큰 고비가 될 거고.”

“그게 무슨…….”

“보통 길랭-바레 증후군을 앓는 환자의 약 40%에서 횡격막 신경 마비에 의한 급성호흡부전을 겪으니까. 더 심하면 사지마비나 자율신경 실조 등의 증상까지 겪을 수도 있고. 물론 나도 그런 일이 생기길 바라진 않지만, 안타깝게도 저 환자는 거기까지 증상이 진행될 가능성이 높아.”

“그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진맥을 했으니까.”

사실이었다.

아까 진맥을 하던 도중이었다. 평소처럼 오장육부가 환자의 오장육부와 상담을 했다. 그러다가 허파가 환자의 허파에게 중요한 제보를 들었다.

‘환자의 허파가 그랬다지. 요즘 들어서 자꾸만 횡격막이 찌릿찌릿 뻐근하다, 라고.’

그거, 암만 봐도 급성호흡부전에 의한 호흡마비 증상의 전조였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른 오장육부의 말을 들어보니, 거기서 더 심해질 여지도 살짝 엿보였다.

당장 대비를 함이 옳을 듯했다.

“그래서야. 기계 환기(Mechanical Ventilation)가 필요해.”

“예?”

“쉬운 말로는 인공호흡기. 그러니 일단 환자 좀 지켜보고 있어. 내가 인공호흡기 가져올 때까지.”

“…….”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진짜.

켈로드를 비롯한 조원들의 미간이 또 찡그려졌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러건 말건 복도 저편으로 휘적휘적 떠나 버렸다.

남겨진 조원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했다. 황태자는 답이 없는 것 같다고. 우리끼리라도 잘해보자고.

모두의 오가는 눈빛 속에 조별과제 폐급 멤버를 감지한, 서글프고 비장한 감정이 스몄다.

“후우.”

서글프고 비장해진다. 오늘, 이렇게 또 HP를 왕창 써먹으려 하자니 절로 영혼의 밑바닥까지 착잡해진다.

라키엘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그리고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겠지?’

그가 조원들을 버리고(?) 찾아온 곳은 빈 병실이었다. 문을 잠그니 은밀한 짓거리를 몰래 벌이기에 썩 괜찮아 보였다. 예를 들자면, 세상에 없는 환상종을 뽑는다든가 하는 그런 짓들 같은.

‘의사 면허 한 번 따기 더럽게 어렵네.’

설마하니 의료대학 졸업시험 통과를 위해 이런 짓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아까 조원들에게 말한 대로, 환자는 급성호흡부전의 뚜렷한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빠르면 이삼 일 안에 시작될 수도 있어.’

한데 인공호흡기가 없다면? 큰일이 난다. 손도 못 쓰고 환자의 죽음을 지켜봐야 할 수도 있다. 그건 싫었다. 졸업시험에 떨어지게 될 거고, 의사 면허도 따내지 못할 거다. 그러면 별궁 한의원을 정식 의료시설로 등록할 수 없고, 의사들을 고용하지도 못하게 될 테니…….

‘별궁 한의원을 종합병원으로 키우려는 내 계획도 바닥부터 흔들리는 거지. 그건 안 돼.’

그러니까 이건 투자다.

쭉쭉 융성하는 별궁 한의원. 자동으로 팍팍 쌓이게 될 보너스 수명. 그걸 통해서 십장생처럼 즐기게 될 만수르 라이프를 위한, 통 크고 현명한 투자일 뿐이다. 그럴 뿐이다. 그러니까 울지 말자.

‘……아이고 배야!’

라키엘은 살살 쓰려 오는 아랫배를 애써 달래며 시스템 창을 열었다. 환상종 선택 뽑기 메뉴를 선택했다.

딩동!

[당신은 환상종 선택 뽑기 항목을 선택하셨습니다.]

[당신은 소정의 HP를 투자하여 환상종을 뽑을 수 있습니다.]

[강력하고 개성 넘치는 환상종은 자신을 소환한 주인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며, 다양한 능력을 제공할 것입니다.]

[선택 뽑기 (3회차) 비용 = 2,700 HP]

[현재 보유 중인 HP : 2,900]

[환상종 선택 뽑기를 실행하시겠습니까?]

[YES / NO]

익숙한 선택창이 떠올랐다.

그는 망설임 없이 ‘YES’를 선택했다.

[환상종 선택 뽑기를 실행합니다.]

안내문과 함께 피 같은 HP 2,700이 뭉텅 깎여 사라졌다. 덕분에 안구에 차오르는 눈물 사이로 홀로그램 안내문이 떠올랐다.

파핫-!

[선택 뽑기에 앞서, 당신이 환상종에게 원하는 기능을 밝혀주세요.]

[선택 뽑기에서 제시되는 환상종 후보군은 당신이 원하는 기능에 맞추어 세팅될 것입니다.]

기다렸던 안내 문구가 떠오르는 순간, 라키엘은 미리 생각하고 있던 요구 사항을 꼼꼼하게 말했다.

‘위급한 호흡곤란 및 호흡정지의 경우, 혹은 대사성산증(metabolic acidosis)이나 호흡근(respiratory muscle)의 피로, PaO2 < 70mmHg의 저산소증, 혹은 PaCO2 > 50mmHg의 과탄산혈증의 경우에, 동맥내이산화탄소분압(PaCO2)과 동맥내산소분압(PaO2)을 능동적으로 계산해서 환자에게 필요한 흡입산소농도(FiO2)와 호기말양압(PEEP)을 세팅하여 호흡량과 공기압력을 능동적으로 보조하고 보장해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환상종으로.’

[…….]

‘어이?’

[……당신의 요구 사항이 너무 지랄맞습니다.]

‘…….’

[그리고 우리 시스템은 이걸 ‘진상’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

[당신이 환상종에게 원하는 기능을 ‘가급적 심플하게’ 밝혀주세요.]

‘쩝.’

알겠다.

라키엘은 쓴웃음을 참으며 다시 말했다.

‘호흡이 곤란한 환자의 호흡을 능동적, 자율적으로 도와주는 능력을 지닌 환상종을 원해.’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좀.]

‘…….’

왜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걸까.

[당신의 요구 사항이 등록되었습니다.]

딩동!

안내문이 광채로 휩싸였다. 광채가 회전하며 세 갈래의 카드로 변했다. 이윽고 각각의 카드에 간단한 소개 프로필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 내용들이란.

‘……뭐냐, 이건.’

세 장의 카드 속 내용을 확인한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대뇌피질이 PT 8번 온몸비틀기를 시전하는 듯한 난감함을 느껴야 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