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78화 (178/468)

178화. 끊어진 거래 (2)

“짐이 한 가지 묻겠노라. 너는 짐이 편안하더냐?”

“……예?”

“너에겐 짐이 부탁만 하면 다 들어주는 존재로 느껴지더냐?”

“그건…….”

“아니겠지. 아니어야겠지. 그렇지 않더냐?”

“…….”

망했다.

이번 아빠 찬스는 망했다.

아직 부탁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저토록 까칠한 눈빛으로 꼬장꼬장하게 철벽을 치는 황제라니. 저 양반, 언제나 느끼는 건데 눈치 빠르기가 사기급이란 말이지.

‘뭐, 저러니까 제국 정치의 정점에서 수십 년이나 버틴 거겠지.’

아무래도 그럴 거다.

라키엘은 나직한 한숨을 삼키며 지금의 사태(?)를 인정했다. 자신이 안일했다. 역시 저 양반에게 아빠 찬스는 쉽게 쓸 카드가 아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전략 수정.’

그는 마음가짐을 바꾸었다. 크라노스크 지방 오크들에게 별궁 한의원과의 직거래를 명해달라고 부탁하려 했는데, 그걸 단순하게만 부탁했다간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폐하. 폐하께서는 제가 스스로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며 더욱 경험을 쌓고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시겠지요. 맞사옵니까?”

“물론이다.”

황제가 집무실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 톡 짚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도 잠시. 그가 엄격한 눈빛으로 물어왔다.

“한데, 그걸 잘 아는 너는, 무슨 일만 생기면 짐에게 부탁부터 하려고 쪼르르 달려오는 것이더냐?”

“그저 제가 지닌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려 함입니다.”

“자원?”

“그렇사옵니다, 폐하.”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는 더욱 뻔뻔하게. 황제 저 양반이 좋아할 법한 논리와 사고방식으로.

“폐하의 지원 또한 엄연히 제가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이자 자원이 아니겠사옵니까?”

“손쉽게 끌어다 쓸 카드로 보이지는 않는다만.”

“제가 지닌 가장 유용한 카드이기도 하지요.”

“노골적이로구나.”

“솔직하다는 뜻도 되옵니다.”

“그래? 하면, 보다 솔직해지는 것은 어떻겠느냐.”

황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너는 감초가 필요하여 짐을 찾아온 것이 아니더냐.”

“…….”

역시.

다 알고 있구나.

라키엘은 새삼 황제의 정보력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그는 놀라는 기색을 드러내진 않았다. 오히려 더욱 능글맞은 미소를 입가에 장착했다.

“부정하지 않겠사옵니다, 폐하.”

“그래?”

“예, 폐하. 저는 감초가 필요합니다. 하여 폐하의 지원이 필요하옵니다.”

“크라노스크 지방의 오크들에게 별궁과의 거래를 명해달라는 것이겠지.”

“이미 짐작하고 계셨군요.”

“충분히.”

황제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별궁의 시종이 종일 바빴더구나. 황도의 약재상이란 약재상은 다 뒤집으며 다녔다고도 하고. 온종일 그 난리를 피웠는데 짐이 어찌 너의 일을 모를까.”

“마치 직접 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황도에서 짐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곳은 없느니라.”

……물론, 너도 포함해서 말이다.

황제 아스테리온은 뒷말을 삼켰다. 한편으로는 내심 그동안 받았던 보고를 떠올렸다. 그것은 황태자가 혼자서 허공을 매만지거나, 허공을 보며 혼잣말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엔 그저 아들에게 꼴사나운 습관이 생겼겠거니 싶었다. 한데 계속 보고를 받다 보니 아니었다.

‘때로는…… 자신의 심장이나 간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고도 하였지.’

심지어 제 뱃속의 내장과 대화를 나누며 환자의 상태를 보고받는 것 같다고도 하였다.

처음에는 잘못된 보고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계속해서 그런 보고가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고민에 휩싸여야 했다. 그 끝에 결론을 얻었다.

‘어쩌면 이 아이가, 기이한 기연을 통하여 자신의 심장 등의 장기로부터 의술을 습득하고 있는 것도 같고.’

……솔직히 믿기지가 않는다.

미친 인간이나 해볼 법한 생각이다.

한데 아들에 관한 보고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러한 추측이 더욱 확신으로 굳어간다. 믿기 어려운데 믿을 수밖에 없어진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어찌 그런 기이한 일이 가능할까.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황제는 마냥 혼란에만 빠져 있지는 않았다. 지금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아들이 무언가 신비로운 기연을 얻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기연을 통해 나날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 성장하고 있다는 점이 백 배, 천 배는 중요하다.

그러니 지금은?

‘담금질이 필요한 때일 터.’

황제는 내심 결론을 내렸다. 미지의 기연을 얻었을 자신의 큰아들. 녀석이 다시금 무언가 일을 벌이려 들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은? 녀석이 더욱 단단해지고 질겨지도록 단련될 기회를 선물하여야 할 터. 그것이 후계를 위하여 제왕이 취해야 할 길일 터.

결심한 황제는 입을 열었다.

“크라노스크 지방의 오크에게 별궁과의 거래를 명해달라는 너의 요청은 거절한다.”

“예?”

휘둥그레지는 아들의 눈매.

미안하다. 이로써 아들이 한바탕 겪어야 할 어려움을 생각하면 절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설렜다. 자신의 아들은 이제부터 마주할 어려움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까. 또 어떤 성과를 이룩할까.

‘더 크거라. 그리하여야 비로소 너의 어깨 위에서 제국의 신민들이 보다 평안해질 것이니.’

황제는 명검을 두드리는 대장장이의 마음으로 말하였다.

“못 들었느냐? 너의 요청을 거절한다 하였노라.”

“이유가 무엇이옵니까?”

“없다.”

“……예?”

“네가 짐을 찾아왔다고 해서, 짐이 너의 요청을 굳이 들어주어야 한다는 법이 있느냐?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더냐?”

“…….”

“다만, 거절의 대가로 짐은 너에게 한 가지만은 허락하려 한다.”

“무엇을 허락하심이시옵니까?”

“크라노스크 지방으로의 여정을 허락하노라.”

“…….”

“이만하면 짐의 뜻을 알아들었으리라 여기겠다.”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알겠다. 황제의 의도를 너무나 잘 알겠다.

‘자기한테 와서 부탁하지 말고 크라노스크 지방에 직접 가서 일을 해결하라는 거로군.’

이쯤이면 뻔하다.

이유 또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놈의 담금질. 어오.’

후계자를 단련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황제. 저 양반의 종특(?)이 또 유감없이 발휘된 거겠지. 덕분에 라키엘은 가슴 깊이 차오르는 시린 현타를 느꼈다.

‘이놈의 아빠 찬스는 쓸 때마다 성공을 못하냐.’

생각해 보니 성공한 적이…… 아이스 갈근탕 제조를 위해 황궁비고 출입을 했던 때를 빼곤 거의 없었던 거 같다. 이 정도 성공률이면 어디 가서 써먹지도 못할 타율이다.

‘인생 진짜.’

황태자면 뭐하나.

황제 지원도 못 받는데.

라키엘은 출발 드림팀을 외치려는 멘탈을 부여잡으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오크족과의 거래를 부탁하려던 마음을 싹 접었다. 대신, 여기까지 온 김에 물어보고 확인할 일을 떠올렸다.

“폐하의 뜻을 알겠사옵니다. 하온데 제가 달리 여쭈어볼 일이 있사옵니다.”

“또 무엇이 궁금하더냐?”

“예, 그것이…….”

말을 꺼내기 전에 좌우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듣고 있겠지. 그런 이쪽의 기색을 황제도 알아차린 것일까.

“들어도 무방한 짐의 그림자만 있으니 고하거라.”

……그렇다면 기꺼이.

“알겠사옵니다, 폐하. 일전에 제가 알려 드리었던, 폐하께 혈전이 생기는 독을 먹인 흉수에 대한 일은 어찌 되어가는지요.”

“그 일이라면, 흐음, 추적 중이니라.”

“아직 가닥이 잡히지 않았사옵니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렇다.”

황제의 고갯짓이 무거워졌다.

문득, 자신이 쓰러졌던 때가 떠올랐다. 처음엔 그저 단순한 뇌졸중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한창 회복에 매진하던 무렵이었던가. 당시 라키엘이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주었더랬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독을 먹인 것이란다. 그것 때문에 혈전이 생긴 것이었노라 하였다. 그때부터였다. 아들의 조언에 따라 흉수에 대해 은밀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몇 가지 단서를 포착하는 수확도 있었다.

한데 거기까지였다. 더 남은 흔적이나 단서가 없었다.

“좀처럼 꼬리가 잡히질 않는구나. 하지만 언젠가는 그 간악한 몸통을 붙잡아 수레바퀴에 매달고 갈가리 찢어놓을 것이니 너는 너무 심려치 말거라.”

“알겠사옵니다, 폐하.”

라키엘은 조금 안심했다. 확인차 물어본 건데, 황제가 여전히 정체 모를 흉수들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다. 그러면 됐다.

‘그래야 안 당하니까. 사실 나도 그 흉수의 정체가 짐작도 가지 않으니까.’

하여 불안했다.

황제를 시해한 흉수라니. 소설 마검황에서는 언급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더 생각을 해보면, 은근 섬뜩한 지점이 있었다.

‘바로 소설 마검황에서도 황제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는 거지. 소설에선 단순한 뇌졸중으로만 묘사가 됐는데, 사실은 그게 흉수의 짓이었다면?’

그런데 소설에선 그게 표현이 안 된 거라면? 작가가 떡밥으로 써먹으려다가 그냥 폐기한, 일종의 맥거핀이라면?

‘사실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어쩌면 소설 속에도 흉수가 있었는데, 그게 드러나지 않았던 걸지도 몰라.’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황제의 목숨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절대로 방심할 수가 없다. 주기적으로 황제의 경각심을 자극해 줘야 한다. 그래야 안 당할 테니까.

‘어쨌건, 오늘의 목표는 절반만 성공이구만.’

황제의 경각심 자극은 성공.

아빠 찬스는 실패.

‘후우.’

라키엘은 황제 앞에서 물러났다. 아빠 찬스가 실패한 이상,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명확해졌다. 그는 별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시종장을 불렀다.

“마차와 호위대, 여장을 준비해. 총 수행 인원은 30인 정도로. 목적지는 크라노스크 지방이다.”

이제는, 그곳의 상단장 외손녀를 치료하기 위해 직접 움직일 때였다.

출발은 금방이었다.

황제의 허락을 받아낸 마당에 어영부영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모든 출발 준비가 다음 날 정오가 되기 전에 완료되었다. 곧바로 출발했다.

“……라지만, 전하?”

“응?”

“저는 내버려두고 가시는 겁니까?”

마차에 막 오르려는데 울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가르딘 경이 비 오는 날 전봇대 아래에 있는 강아지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내버려 둔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제일 중요한 일을 맡겨 두는 건데.”

“……예?”

“내가 없는 동안은 경이 여길 책임져야지, 별궁 한의원을.”

“그건 그렇긴 한데…….”

“그러니까 경이 부원장이라고.”

“예에?”

“공식적으로 임명하는 거다.”

“…….”

가르딘 경은 입을 다물었다. 공식적으로? 별궁 한의원의 부원장직을 맡긴다고? 처음엔 황태자가 농담하는 건 줄 알았다. 한데 듣다 보니 아니었다.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은 경이 이곳의 책임자다. 공식적인 부원장으로서 별궁 한의원 업무에 관련된 모든 인사권을 비롯한 권한을 지니는 거야.”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먼 길 떠나는 마당에 이런 말을 농담으로 할까.”

피식, 라키엘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경이 가장 믿음직하니까. 그러니 한시도 한의원 관리에 소홀하지 말도록. 이만.”

그 말을 끝으로 라키엘은 마차에 올랐다. 데미안과 특근대, 근위대, 수간호사 아니스, 우루스 등의 수행인원을 이끌고서 별궁을 출발했다.

그때까지도 가르딘 경은 쩌저적 굳은 채였다.

“…….”

내가…… 가장 믿음직하다고…….

벌써 저만치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는 가르딘 경의 가슴에 저도 모를 감격이 벅차올랐다.

그 후로도 마차는 계속해서 굴러갔다. 수행단의 말발굽과 우루스의 소발굽도 쉼 없이 땅을 박찼다. 북서쪽으로 꾸준히 이동했다. 마차 창밖을 스치는 풍경이 매일 조금씩 바뀌었다. 어느덧 계절은 완연한 봄인데, 바깥의 풍경은 시간을 역행시킨 것처럼 나날이 황량해졌다.

꽃이 사라지고, 무성하던 수풀이 드문드문해졌다. 포근한 봄바람이 메마르고 시린 칼바람으로 변해갔다. 어느새 나무라곤 좀처럼 찾아볼 수 없을 한랭한 황무지가 끝없이 펼쳐졌다.

크라노스크 지방에 도착했다.

그 후에도 일행은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크라노스크 지방의 중심 도시, 크라노스로 입성했다. 그곳이 툴룬 상단의 근거지였다. 크라노스 시에 도착하자마자 상단 본부로 직행했다.

한데 뜻밖에도 상단 본부에서는……

‘이거, 뭐지?’

마침내 도착한 목적지.

장거리 여행으로 찌뿌둥해진 몸을 풀며 마차에서 내리던 라키엘은 상단 본부 건물에서 벌어지고 있는 뜻밖의 행사에 미간을 콱 찡그려야 했다.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저 행사의 정체는…….

‘대체 왜, 상단 본부에서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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