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79화 (179/468)

179화. 전사로 인정받는 법 (1)

‘이거 뭐지.’

라키엘은 미간을 콱 찡그리며 힘이 잔뜩 들어간 눈빛을 던졌다. 툴룬 상단 본부 건물 곳곳에 검정색 천이 내걸려 있었다. 향을 피우는 듯한 향기도 났다. 그걸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대체 왜, 상단 본부에서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는 건데.’

확실하다.

장례식이다.

전이었다면 몰랐겠지만, 이곳 세계에서 1년 넘게 지낸 짬(?)이 있다 보니 이제는 알아볼 수 있었다. 건물 곳곳에 두른 검정색 리본과 은은한 향냄새. 이건 건물 안에서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누구의?’

가슴속 가득 시커먼 암운이 겨울철 풀가동시킨 가습기처럼 모락모락 피어났다. 불길한 예상과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뇌피질에 원투 어퍼컷을 찰싹찰싹 때려댔다.

설마…….

‘상단장의 외손녀가 잘못된 건가?’

처음 소식을 들었던 때에도 이미 많이 아픈 상태라고 했다. 아픈지도 제법 되었노라 하였다. 한데 별궁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거의 보름이 걸렸으니, 그사이에 일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젠장.’

라키엘은 서둘러 마차에서 내렸다. 그 사이, 상단의 관계자들이 건물에서 분분히 나와 예를 표하였다.

“제국 황가의 합당한 후계자이신 황태자 전하를 뵈옵습니다.”

라키엘은 직급이 높아 보이는 이에게 물었다.

“그쪽이 이곳의 책임자인가?”

“……예? 예. 그렇습니다, 황태자 전하.”

“한데 여기서 누구의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는 거지?”

겉으로는 침착하게, 속으로는 불길함으로 쿵덕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제발 상단장 외손녀의 장례식이 아니면 좋겠다고, 제발 아이가 무사하길 바란다고 기원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 간절한 기원이 통한 것일까.

이내 돌아온 대답은…….

“저, 그것이…… 저희 툴룬 상단장의 장례식입니다.”

“……뎃?”

뭐?

뭐어?

라키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째서?”

아프다던 외손녀가 아닌 상단장이 죽었다니. 하도 청천벽력 같은 소리여서 놀라 되물었다. 한데 대답은 눈앞의 젊은 사내가 아닌, 또 다른 이가 돌려주었다.

“툴룬. 그는 외손녀의 안위를 너무나 걱정하고 염려한 나머지 괴로움을 못 이겨 식음을 전폐하다가 이틀 전에 쓰러졌습니다. 좌우의 이들이 다급히 부축하였지만, 어찌 손을 쓰기도 전에 불귀의 객이 되었고 말입니다, 꾸익.”

걸걸하고 묵직한 목소리가 고막을 쿡, 두드려 왔다. 돌아보니 엄청난…… 근육질 녹색 피부의 거구가 있었다.

‘오크?’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소설 마검황의 일러스트에 나오던 오크족의 인상착의(?)가 저랬으니까.

키는 2미터를 충분히 넘길 듯했다. 전신에 근육이 가득했다. 아니, 터질 듯 빵빵했다. 당장 동네 헬스장에 던져놓으면 트레이너 앞에서 고인물 훈수질을 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나름 거구를 자랑했던 쟈빌론도 저 옆에 세워두면 아담해 보이게 만들 듯한, 엄청난 체격이었다.

그토록 거대한 오크가 수박처럼 커다란 머리를 정중하게 숙였다.

“얼음바위 부족의 부족장, 브라쉬가 인간의 황태자를 뵙습니다, 꾸익.”

“……아, 그래.”

일단은 당황하지 않고 예를 받았다. 한편으로는 의문이 가득 피어났다. 툴룬 상단장이 급사했다는 것도 황당한데, 그 장례식장에 찾아와 있는 오크 부족장이라니.

그런 이쪽의 의문을 눈치챈 것일까.

족장 브라쉬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툴룬은 제 오랜 친우이자, 부족에게 인정받은 전사였습니다. 부족장 된 이로서 훌륭한 전사를 추모하기 위해 자리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꾸익.”

“…….”

돌겠네.

여전히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기껏 보름이나 시간을 들여서 변방까지 달려왔는데, 불과 이곳에 도착하기 이틀 전에 상단장이 죽어 버렸다니.

다른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재수 없는 농담하지 말라는 대답부터 나왔을 것 같았다. 혹시나 이런 내용으로 전개되는 소설이 있다면, 그 작가한테 개연성 좀 챙기고 상하차나 하라고 악플을 달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고약한 농담도, 성격 나쁜 작가의 망나니 전개도 아니다. 엄연한 현실이고 실화다. 다른 이도 아닌, 오크 부족장마저 이렇게 추모를 하러 장례식장에 와 있는 걸 보니 오히려 실감이 확 났다.

그런 덕분이었다.

“후우.”

계획이 박살 났다.

원래는 상단장의 외손녀를 치료하려 했다. 그러면 상단장이 희망을 느끼고, 기운을 차리고, 상단의 활동을 재개할 거라고 보았다. 하면 중단되어 있던 감초의 유통도 재개될 것이라 보기도 하였다.

한데 이제는 그 방법이 사상의 지평선 너머로 멀리멀리 사라졌다. 상단장이 죽었으니까. 생각할수록 절로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하지만 라키엘은 흔들리려는 멘탈을 꽉 붙잡았다. 냉정함을 유지했다. 덕분에 상황을 간결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 상단장이 죽었어. 황당하긴 한데 그건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인정하자. 어쩔 수 없는 거야. 다르게 생각해. 그나마 상단 자체는 아직 남아 있을 테니 상황이 암울하지만은 않아.’

상황을 파악하니 실낱같은 희망이 보였다.

상단장은 죽었지만, 상단은 남아 있다. 그게 중요하다. 라키엘은 오크 족장 브라쉬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차츰 플랜 B가 즉석에서 떠올랐다.

“그렇군. 알려줘서 고맙네. 한데, 한편으로 따로 묻고 싶은 일이 있는데. 잠시 여기서 기다려줄 수 있을까? 우선은 여기까지 온 의미를 되새기며 상단장을 추모하고 싶군.”

“알겠습니다. 인간의 황태자시여, 꾸익.”

족장이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순간, 라키엘은 족장의 부리부리한 눈동자에 아주 잠깐 떠오른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바로 살짝 놀라며 호감을 느끼는 기색이었다.

‘역시.’

할 이야기에 앞서 상단장부터 추모하겠다고 말하길 잘했다. 그것이 사회를 살아가는 예의라는 것이니까. 그런 건 한국이나 여기나 비슷할 테고.

라키엘은 상단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커다란 홀에 놓인 관이 보였다. 관뚜껑은 굳게 닫혀 있으되, 그 뒤로 놓인 초상화를 통해 상단장의 생전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제법 괄괄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를 향해 몇 초간 예를 갖추며 묵념했다. 속으로 기원했다. 이제부터 시도하려는 B플랜이 잘되도록 좀 도와달라고.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크 족장 브라쉬에게 돌아갔다.

“우선, 오랜 친우를 잃은 일은 유감이야. 그 고통을 내가 어찌 감히 위로할까 싶기도 하고. 다만 잠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하는데. 제의할 일이 있어서.”

“제의라고 하시면, 꾸익?”

“이번 장례식이 끝나면 거래를 다시 시작하고 싶군.”

“예, 꾸익?”

족장 브라쉬가 커다란 머리를 갸웃거렸다. 이쪽의 제의가 무슨 뜻인지 감을 못 잡은 걸까. 라키엘은 살짝 더 노골적으로 말했다.

“감초를 비롯한 약재의 거래 말이다.”

“약초 거래 말입니까, 꾸익?”

“그래.”

된다.

잘하면 제안이 통할 것 같다.

오크 족장의 반응을 보며 라키엘은 내심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살짝 엿보인 가능성을 더 확실하게 거머쥐기 위해 솔직하게 말했다.

“실은 나는 황도의 별궁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수많은 환자를 보살피며 그들에게 약을 달여주기도 하지. 한데 그러던 중 최근 곤경에 처하게 되었어. 이 지방의 약재 거래가 끊어지는 바람에.”

“거래를 통해 약재를 구하고 싶다는 뜻입니까, 꾸익?”

“그래. 굳이 내가 직접 사들이지 못해도 좋아. 내가 듣기로는 툴룬 상단장이 이곳 부족과의 거래를 트기 위해 몇 년이나 공을 들였다고 하더군. 그러니 그가 남긴 상단 조직을 통해 중단되어 있는 거래를 재개해주기만 하면 돼. 어떤가.”

물었다.

당연히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말 그대로 툴룬 상단장은 죽었지만, 그의 상단 조직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유통망도 살아 있을 테니까. 그러면 된다. 그의 상단을 통해 감초를 사들이면 만사 오케이다.

한데 돌아오는 대답은…….

“거절합니다, 꾸익.”

“…….”

생각지도 못한 단호한 거절이 카운터로 명치에 팍 꽂혔다. 어째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내 이어지는 족장 브라쉬의 말을 듣고서야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부족은 오직 인정받은 전사와만 거래를 합니다, 꾸익.”

“전사? 인정을 받은?”

“그렇습니다. 인간의 황태자시여, 꾸익.”

족장이 콧김을 풍, 강렬하게 뿜어내며 말했다.

“인간의 황태자께서 오해하시는 부분이 있는 듯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우리 부족은 툴룬이 운영하는 상단과 거래를 하던 것이 아닙니다, 꾸익.”

“그럼? 잠깐, 설마.”

라키엘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족장을 퉁명스러운 대답을 듣다 보니 문득, 짚이는 바가 있었다.

“상단이 아닌, 툴룬 상단장 개인과 거래를 튼 거였다는 뜻인가?”

“바로 그렇습니다, 꾸익.”

족장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는 오크입니다. 용맹한 전사인 우리 부족은 오직 전사로 인정받은 이와 교류하고 거래를 합니다. 툴룬은 전사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상단에는 전사가 없습니다. 우리는 약골과 거래하지 않습니다, 꾸익.”

“…….”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다.

‘정리를 해보자면, 남은 상단의 조직이나 유통망이 멀쩡하건 말건 지금은 무용지물이라는 거구만.’

이유는 딱 하나.

인정받은 전사가 없어서.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하고 명확하다. 저들에게 ‘전사’로 인정을 받으면 된다는 뜻이다. 그러면 상단을 거치지 않아도 직거래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더 편리하게 안정적으로 약초 공금을 받게 되는 셈이다.

‘가능할까.’

라키엘은 잠시 머리를 굴렸다. 생각해보니 가능할 것도 같았다. 문득, 아까 장례식장에서 본 툴룬 상단장의 초상화 덕분이었다.

‘노인이었어. 조금 괄괄해 보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확실한 늙은이였지.’

한데 그런 늙은이가 인정받은 전사였단다. 그게 무슨 뜻이겠는가.

‘저들이 말하는 전사가 단순히 싸움을 잘한다거나 하는 의미만은 아닐 거라는 뜻이지. 오히려 일종의 명예직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툴룬 상단장 같은 노인이 당당히 전사로 인정받을 수 있었겠지.’

예를 들자면 그런 거다.

업체에 건물 한 동쯤 세워주고 명예이사 자리를 얻는다든가. 대한민국을 월드컵 4강에 올려준 공로로 명예국민이 된다든가.

아마 노인인 툴룬 상단장도 그러한 모종의 공로를 통해 전사라는 명예직을 얻었으리라. 그가 6년 넘게 공을 들였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명예직을 따내려고 공로를 세운 과정이었겠지.

‘바로 그거지. 그거 맞네. 딱 봐도 그렇네.’

라키엘은 내심 싱긋 웃었다.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자신감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오크족이 수여하는 전사라는 호칭이 명예직 같은 것이라면, 충분히 따낼 자신이 있다.

돈도 권력도 넘쳐나니까. 오크족이 원하는 무엇이든 뚝딱 제공해주기만 하면 될 테니까.

“그럼…….”

저들이 원하는 조건은 뭘까.

“그대들에게 전사로 인정을 받으려면 뭘 해주면 되지?”

라키엘이 은근하게 물었다. 오크 족장 브라쉬가 진짜 별거 아니라는 듯이 전신의 근육을 불끈거리며 대답했다.

“3대 700, 꾸익.”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