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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183화 (183/468)

183화. 감초가 힘을 숨김 (1)

“자, 여기 맥문동탕 받으시고.”

“…….”

데미안 카이엔은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탕약을 내밀고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자신을 고용한 이이자, 자신을 최근접 호위로 두고 있는 제국의 후계자. 한데 이 사람은 어째서 지금,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는 탕약 그릇을 자신에게 건네고 있는 걸까.

“뭐해. 받어.”

“…….”

받았다.

황태자의 당부가 이어졌다.

“우린 이제부터 출발할 거니까, 넌 여기 남아서 아이한테 이걸 좀 먹여줘야겠다.”

“제가 말입니까?”

“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황태자. 또 당연하다는 듯이 이어지는 그의 말들.

“네가 제일 믿음직하니까. 그러니까 새벽부터 일어나서 정성껏 달인 탕약을 너한테 맡기는 거야. 행여라도 절대 쏟지 말고. 그걸 마셔야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버티면서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

“전하.”

“응?”

“제가 믿음직하다고 하시면서, 어째서 저만 여기에 남겨두고 다른 일을 하시려는 겁니까?”

“네가 믿음직하니까 남기는 거지. 멍청하게 탕약을 쏟진 않을 테니까.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빠르게 달려와서 위급 상황을 알려줄 수 있을 테니까.”

“제가 전하를 어떻게 찾습니까?”

“지평선을 훑어보면 될 거야.”

황당해서 꺼낸 물음에, 황태자가 싱긋 웃었다.

“여긴 지형의 고저차가 적어서 사방이 탁 트인 평원이니까. 나무라 봤자 키가 작은 관목이 드문드문 있는 게 다니까. 날 찾으려면 흙먼지가 어디서 피어나는지부터 찾아. 그곳에 높다란 붉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면, 거기가 내가 있는 곳이겠지.”

라키엘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제부터 그는 일행을 모조리 끌고 나가 황야를 이 잡듯이 수색할 계획이었다. 긴뿌리 감초를 찾기 위해서였다.

물론 여러 안전장치도 준비했다. 그중에 하나가 우루스였다.

“우루스를 타고 다닐 거다. 나머지 일행은 말을 탈 거고. 모두가 제법 빠르게 달릴 거야. 그러니 자연히 흙먼지가 피어나겠지. 게다가 우루스에게 붉은 깃발이 달린 높다란 장대를 들게 할 테니, 날 찾는 게 어렵지는 않을 거야.”

“…….”

데미안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대꾸도 하고 싶었다. 제가 믿음직해서 여기에 남겨둔다는 건 궤변인 것 같다고. 저는 당신의 곁을 지킬 때 비로소 가장 믿음직해져야 하는 존재가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혹시 황태자는…… 나에 대한 신뢰를 접은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앙부아즈에서도 효율적으로 곁을 지켜주지 못했으니까. 역혈의 심법을 어찌어찌 일깨우기 전까지는, 쟈빌론에게 처절하게 밀리며 제 역할을 못 했으니까. 물론 상대가 소드마스터이긴 했지만, 그건 변명이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

서운하고 야박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했다.

“하지만 저 말고도 아니스 양이 있지 않습니까?”

아니스는 웨어울프이자 수간호사다. 아이를 보살피고, 응급 상황을 캐치하여 일행에게 알리는 일에 더욱 적합하지 않은가.

한데 황태자에게선 뜻밖의 대꾸가 돌아왔다.

“아니스도 같이 남을 건데?”

“예?”

“생각을 해봐. 만약에 정말로 아이한테 응급상황이 생겨서 그걸 알려주러 네가 뛰어오면, 그 사이에 누가 아이를 돌봐야 할까?”

“…….”

“그래서 너와 아니스 둘을 남기는 거야. 그럼 아이를 잘 부탁한다. 아, 꾸꾸도 같이. 알지? 꾸꾸는 끼니 놓치는 거 싫어하니까 챙겨온 꿀물 잘 챙겨주고.”

라키엘은 그 말만 남기고는 방을 나섰다. 물론 그는 데미안의 생각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나한테 서운하다고 느끼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은 별궁에서의 일상적인 호위 상황이 아니기에, 수많은 불확실성과 변수가 존재하는 황야로 나가는 길이기에 더욱 그렇다.

‘행여나 황야의 몬스터가 습격하는 돌발적인 상황에서 녀석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 안 된다.

데미안이 위험해지면, 덕분에 녀석의 내면에 있는 존재가 각성해 버리면 모두가 망한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그러니까 녀석은, 온실의 화초로 남아 주어야 한다.

‘앞으로는 황도에서만 녀석을 근접호위로 데리고 다녀야겠어.’

이곳 같은 타지에서는 최대한 안전한 곳에 녀석을 짱박아(?) 둠이 나을 듯했다. 녀석이 지닌 잠재력과 능력을 생각하면 심히 아깝긴 하지만, 그거 좀 써먹겠다고 세상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으니까.

“어쨌건, 그럼 다들 출발.”

“누우우우우-!”

우루스의 워낭소리 충만한 포효와 함께 일행이 변경도시를 출발했다. 관문을 지나 황야로 나왔다. 그때부터였다. 우루스의 소발굽과 일행의 말발굽이 트롯(trot)과 켄터(canter)의 중간 속도로 땅을 박찼다.

다가닥, 다닥!

‘승차감, 아니, 승우감 좋고.’

라키엘은 안정적으로 달리는 우루스의 어깨 위에서 고개를 쭉 빼들었다. 그리고 지난밤에 얻은 새로운 스킬을 발동했다.

‘약초 탐색.’

딩동!

[약초 탐색 (Lv.1) 스킬이 발동됩니다.]

[<심마니 모드 HUD>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주위 10미터 이내의 약초를 자동으로 탐색하여 결과물을 시야에 표시합니다.]

[환자에게 유용한 약효를 지닌 약초는 형광성 연녹색으로 표시됩니다. 약초가 지닌 약효가 강력할수록 표시되는 색깔이 선명해집니다.]

[환자에게 유해한 독성을 지닌 독초는 형광성 붉은색으로 표시됩니다. 독초가 지닌 독성이 강력할수록 표시되는 색깔이 선명해집니다.]

[보물찾기 타임, On!]

메시지가 좌르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지이잉!

눈알이 살짝 뻐근해졌다. 시야가 살포시 변했다. 마치 눈동자에 증강현실 필터 렌즈를 끼운 것처럼, 지면에 드문드문 자라난 식물들에 외곽선이 새겨졌다.

‘오오오.’

라키엘의 눈이 사방을 훑었다. 결과는 과연 스킬 안내 그대로였다. 눈길이 닿는 곳, 그중에서 10미터 이내 범위의 식물들에 인공적인 색상이 덧씌워졌다.

‘대부분은 회색에 가깝구나.’

주변에 보이는 이름 모를 잡풀이 그러했다. 녹색이나 적색의 색상이 아주 희미하거나, 거의 회색에 가까웠다. 즉, 약도 아니고 독도 아닌 잡초인 셈이었다.

반면, 정말로 약효를 지닌 풀은?

“정지!”

라키엘이 한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곳, 바위틈에 선명한 녹색으로 표시되는 식물이 자라나 있었다. 라키엘은 절로 가슴이 쿵쿵쾅쾅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녹색이 엄청나게 선명한데. 설마 첫 빠따에 바로 긴뿌리 감초를 찾아낸 건 아니겠지?’

그는 얼른 우루스의 어깨에서 내려왔다. 조심스럽게 약초를 살폈다. 1미터 정도로 곧게 자라난 줄기와, 난형으로 7개씩 엇갈리며 자라난 이파리. 전형적인 감초였다.

‘파볼까.’

콩닥콩닥 탭댄스를 추려는 가슴을 억누르며 모두를 돌아보았다.

“이걸 파보도록. 뿌리가 상하지 않게 조심해서.”

“알겠습니다, 전하.”

근위대원들이 삽과 호미를 들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영광스러운 황가의 갑옷을 걸치고서, 몸빼바지 입은 시골 할머니 같은 자세로 감초 뿌리와 한참을 씨름했다. 덕분에 곧 감초가 뿌리째로 뽑혀 나왔다.

“……쯧, 그냥 평범한 감초였구나.”

라키엘은 쓰려지는 입맛을 다셨다. 족장 브라쉬의 말에 따르면 긴뿌리 감초는 땅속으로 최소한 10미터는 뻗어 있다고 했다. 반면, 이건 아니었다. 그냥 평범했다.

‘그럼 스킬로 표시되는 녹색의 진하기가 이 정도면…… 이곳 지방에선 평범한 감초라는 거겠지. 어쨌건 알겠다. 스킬 성능 확실하구만.’

비록 첫 채집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덕분에 스킬이 표시해주는 색깔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게 됐다.

‘그럼 긴뿌리 감초는 이것보다 훨씬 진한 녹색으로 표시되겠지.’

한번 기준을 잡았으니 됐다.

라키엘은 다시 우루스의 등에 올랐다. 일행과 함께 흙먼지를 마셔가며 황야를 내달렸다. 눈이 빠지도록 사방을 둘러보며 심마니 모드를 활용했다.

‘기준을 잡았고, 함유된 약효의 정도가 확실하게 표시가 된다는 것도 확인했어. 이러면 돼. 어쩌면 생각보다 일찍 찾을 수도 있겠어.’

거기에 우루스의 지치지 않는 체력도 제법 긍정적인 요소였다. 이대로 온종일 꾸준히 뛰어다니며 사방을 관측하면? 어쩌면 이른 시일 내에 긴뿌리 감초를 찾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새로 전입신고를 한 아라비아 유전처럼 쑴펑쑴펑 솟구쳤다.

“그러니까, 가즈아-!”

“누우우우우-!”

힘차게 달렸다.

열심히 달렸다.

점심 먹고 달렸다.

춘곤증 참으며 달렸다.

해가 기울도록 달렸다.

그런데…… 보이지가 않았다!

‘역시 하루 만에 찾는 건 무리인가.’

라키엘은 뻐근해진 눈알을 힘겹게 굴렸다. 여전히 심마니 모드는 쌩쌩 돌아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노을이 지는 황야 어디에도 긴뿌리 감초는 보이지 않았다. 가끔 녹색으로 표시되는 녀석이 보여서 반갑게 달려가 보면? 그냥 평범한(?) 감초였다.

‘이 동네 감초는 다들 약효가 강력해서, 그게 오히려 문제야.’

하나같이 다들 짙은 녹색으로 표시됐다. 특A급 감초였다. 그래서 오히려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이것보다 더 진한 녹색이 과연 존재할까 싶을 정도였으니까.

‘이러면 난감해지는데.’

라키엘은 피로감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오늘은 허탕이다.

‘곧 해가 질 테니 슬슬 돌아가야겠네.’

첫술에 배부르랴.

옛말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달랬다. 내일, 어쩌면 모레쯤엔 긴뿌리 감초가 기적처럼 보이지 않을까 희망회로를 열심히 태웠다.

한데 그러던 와중이었다.

“……으음?”

우루스의 발길을 도시 쪽으로 돌리려던 때였다. 바로 아래쪽 지면에 뭔가가 보였다. 바위틈에 평범하게 자라난 감초였다. 그런데 심마니 모드에 표시되는 색깔이 조금 이상했다. 회색이었다.

‘허. 쓰읍.’

처음으로 보는, 회색으로 표시되는 감초였다. 덕분에 라키엘의 눈빛도 회색으로 물들었다.

‘하필이면 하루 허탕치고 돌아가려는 마지막에 약효도 없는 회색 감초가 탐색이 되는 건 또 뭐냐.’

운이 나쁜 하루인 건가.

괜히 찜찜해졌다.

내일도 나쁜 운이 이어질 것만 같은 미신적인 불길함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무시하고 지나갔다. 한참을 멀어졌다. 그러다가 문득…….

‘……잠깐만.’

뭔가, 머릿속에서 섬광 같은 번득임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어깨가 흠칫 떨렸다. 벼락 치는 깨달음. 무의식중에 떠올린 가능성.

“우루스! 잠깐만 정지!”

다급히 우루스의 어깨에서 내려왔다. 바빠진 걸음을 돌렸다. 조금 전에 무시하며 지나왔던 감초를 향해서였다.

다시금 감초를 살펴보았다. 심마니 모드에는 여전한 회색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즉, 약효가 아예 없는 완벽한 쓰레기 잡초라는 뜻이다.

하지만…….

‘감초가 그게, 가능한가?’

어떠한 감초라도, 설령 하급이나 폐급이라고 해도 아주 약간의 약효는 지니는 법이다. 그게 당연한 이치다. 길가의 이름 모를 잡풀도 미약한 약효는 지니고 있으니까. 실제로 근처에 보이는 잡풀들도 회색에 가까울 뿐이지, 자세히 보면 아주 희미한 녹색 정도로는 표시되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 감초는 다르다.

완벽한 회색이다.

불가능한 색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손이 떨린다.

‘어쩌면…….’

라키엘은 회색으로 표시되는 감초 앞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지극히 신중한 손길로 뿌리 옆의 흙을 파내었다. 심마니 모드에 온통 회색으로만 보이는 줄기의 아래쪽. 뿌리의 색깔을 확인했다.

몇 초가 흐른 후, 그의 함성이 해 저무는 황야를 쩌렁쩌렁 뒤흔들었다.

“……심봤다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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