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감초가 힘을 숨김 (2)
“심봤다아아아아-!”
황야를 쩌렁쩌렁 흔드는 함성. 라키엘은 가라앉지 않은 흥분을 담고서 눈길을 내렸다. 그의 열렬한 시선이 향하는 곳. 방금 살금살금 파낸 지면 아래. 그곳에 감초의 뿌리가 살짝 드러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감초 뿌리였다. 하지만 라키엘에게는? 완전히 달랐다.
‘세상에 이런 녹색이 있었어?’
짙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짙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본 모든 초록색 중에 가장 선명하고 짙은, 눈이 멀 것 같은 초록색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아니겠지만, 심마니 모드를 켜고 있는 라키엘의 시각에는 확실히 그렇게 표시되고 있었다.
‘찾았다. 이거야.’
그는 흥분으로 주먹을 꽉 쥐며 시선을 들었다. 감초의 지면 위로 드러난 줄기 부분이 보였다. 놀랍게도 그곳은 여전히 쓰레기 잡초에 해당하는 회색이었다.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이거, 긴뿌리 감초가 확실해. 그런데 지면으로 드러난 줄기와 이파리에는 영양이나 약효 성분이 아예 없는 거였어. 그래서 회색으로 보인 거지. 어째서? 모든 영양이 뿌리에 몰빵되어 있었으니까.’
바로 그거다.
이 긴뿌리 감초가 힘(?)을 뿌리에 숨기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줄기만 봤을 때는 쓰레기 회색으로만 보였던 거다. 덕분에 이런 보물을 두 눈으로 보고도 모르고서 지나칠 뻔했던 거다.
“…….”
소오름.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을 뻔했는지를 생각하자, 팔뚝에 닭살이 10열 종대로 오소소 돋아났다. 하지만 감상에만 매달릴 시간은 없었다. 라키엘은 좌우를 돌아보았다.
“우리가 오늘 목표를 달성한 것 같다. 다들 주위를 경계하도록.”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지극히 희귀하다는 긴뿌리 감초를 찾았으니, 채집에 혼신의 정성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마침 온종일 동행한 오크 족장 브라쉬도 신중하게 쿵쿵쿵 뛰어왔다.
“설마 찾은 겁니까, 꾸익?”
“아무래도?”
“하지만 그냥 보기에는 다른 감초와 똑같은데 말입니다, 꾸익.”
“아냐. 달라. 이 향기가 느껴지지 않아?”
“킁킁. 모르겠는데 말입니다, 꾸익?”
“……어쨌건.”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다른 이들에게 약초 탐색 스킬이나 심마니 모드가 없다는 걸 잠깐 깜빡했다. 당연히 브라쉬에게는 눈앞의 긴뿌리 감초도 다른 것들과 똑같이 보이겠지.
“뿌리가 훨씬 깊이 뻗은 것 같아. 파보자고.”
“알겠습니다, 꾸익.”
브라쉬와 함께 직접 호미를 들었다. 뿌리 옆을 살금살금 깊이 파보았다. 역시나 보통의 감초 뿌리가 끝나야 할 깊이의 지점에도 계속 뿌리가 뻗어 있었다. 비로소 브라쉬의 눈빛이 떨렸다.
“이, 이게 바로 전설의…… 꾸익!”
족장이 흥분된 콧김을 풍풍 뿜어내더니 신중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채집 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꾸익.”
“채집 방식을? 어째서?”
“뿌리에 조금의 상처도 나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황태자여, 꾸익.”
“으음? 설마?”
“생각하시는 그 설마가 맞을 겁니다, 꾸익.”
“약간이라도 상처가 나면 그곳으로 뿌리의 영양이 다 빠져나간다거나, 뭐 그런 건가?”
“정답입니다, 꾸익.”
브라쉬가 튼실한 비닐하우스 수박보다 커다란 고개를 끄덕였다.
“조상들께서 대대로 말씀하셨습니다. 긴뿌리 감초를 캘 때는 뿌리에 약간의 생채기라도 나면 모든 이로운 것이 흙으로 빠져나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다시 엄청난 시간을 기다려야 긴뿌리 감초를 캘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꾸익.”
“얼마나 기다려야 하길래?”
“흙으로 빠져나간 이로운 물질이 새 감초의 뿌리에 다 모이려면 족히 100년은 걸린다 하였습니다, 꾸익.”
“…….”
난리 났네.
호미를 잡고 있던 라키엘의 손아귀가 아주 살짝 파르르 떨렸다. 브라쉬의 저 말이 사실이라면, 오늘 호미 컨트롤이 아주 살짝만 삑사리(?)가 나더라도 망한다는 소리다.
‘아, 젠장.’
그냥은 안 되겠다. 게다가 뿌리의 깊이가 최소 10미터라니, 이건 호미 가지고 될 일이 아니다. 가히 토목공사의 범주에 들어가는 작업이랄까. 하지만 다행히 일행 중에 중장비에 버금가는 녀석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우루스!”
“누우!”
“여기, 이쪽을 좀 파줘.”
라키엘은 긴뿌리 감초에서 한참 떨어진 옆쪽을 가리켰다. 그의 생각은 간단했다.
‘제법 떨어진 지점에 10미터짜리 구덩이를 파고, 그 구덩이를 옆으로 넓혀가면서 감초 뿌리가 있는 쪽으로 접근하면 될 거야.’
그렇게 차근차근 감초 뿌리 옆면이 다 드러나면? 그때 비로소 옆쪽으로 살금살금 뾱, 빼내면 되지 않을까.
그때부터였다.
우루스가 황무지를 상대로 자신의 우람한 뿔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누우우우! 누우우!”
콰악! 콰적! 콰작!
거대한 한 쌍의 뿔 앞에선 단단한 지면이고 뭐고 소용없었다. 우루스는 아예 트랙터처럼 지면을 갈아엎었다. 이윽고 근위대와 특근대, 브라쉬가 삽을 들었다. 갈아엎어진 땅의 흙을 맹렬히 퍼냈다. 그때마다 라키엘의 구령과 일행의 기합성이 힘차게 울렸다.
“하나!”
“누우우우-!”
“둘!”
“으랴압!”
“하나아-!”
“누우!”
모두의 작업 과정이 기름칠을 잔뜩 먹인 톱니바퀴, 혹은 3억제기 밀고 바론에 장로용까지 먹은 팀의 스노우볼처럼 으샤으샤 돌아갔다. 라키엘의 가슴 가득 성공채집의 희망이 무럭무럭 익어갔다.
그렇기에 그와 일행 모두는 아무도 몰랐다. 자신들이 힘차게 진행하는 감초 뿌리 채집 공사 때문에 지하의 어떤 존재가 잠에서 깨어나 버렸음을. 일행의 공사가 일으킨 때아닌 층간소음(?) 때문에 굉장한 빡침에 휩싸여 버렸음 또한.
♣
……쉬이익.
이곳은 깊은 땅속 16미터 지점.
햇볕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암굴에서 거대한 근육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불만스럽게 고개를 쳐들며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불쾌하다고.
……시이잇.
두 갈래로 나뉜 혓바닥이 입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 위에서 두 줄기의 안광이 서서히 눈을 떴다. 이곳 북서부 황야의 가장 위험한 몬스터이자 먹이사슬의 정점, 23미터 길이의 구렁이 기간토피스였다.
……쿵! 쿠구구구……!
기간토피스가 눈을 뜨는 순간, 예의 시끄럽고 둔중한 소음이 암굴 위쪽에서 몰려왔다. 아까부터 줄곧 이랬다. 덕분에 오랜 잠이 깨고 말았다.
기간토피스의 혀 놀림이 신경질스러워졌다. 역시나 층간소음은 구제불능의 해악이며 이 세상에서 조속히 퇴출되어야 할 만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기간토피스의 신경을 더욱 거슬리게 하는 점이 또 있었다.
……시잇.
인간들이 이곳에서 설치는 자체가 문제다. 여기엔 지난 97년 동안 애지중지 아껴온 긴뿌리 감초가 있으니까. 긴뿌리 감초는 지극히 예민하고 연약해서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으면 안 되니까.
그런데 인간들이 하필이면 여기서 땅에 구덩이를 파며 설친다는 것은? 확실하다. 긴뿌리 감초를 훔쳐 가려는 거다. 내게서. 감히. 주제도 모르고!
시이이이이잇-!
마침내 상황을 온전히 깨달은 기간토피스가 거대한 몸을 움직였다. 몸길이만 무려 23미터. 몸통의 가장 두꺼운 지점 둘레는 거의 2미터에 육박했다. 체중은 약 7톤에 달했다. 그러한 근육 덩어리가 작정하고 움직이자, 암굴로부터 지상으로 향하는 터널이 순식간에 뚫렸다.
콰작!
10년 만에 맛보는 바깥 공기가 신선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소한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인간 놈들을 쫓아내야 한다. 기간토피스의 거대한 머리가 유령처럼 스르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적외선 시각으로 어둠을 뚫고 목표를 포착했다.
“…….”
인간의 무리.
규모는 약 60.
거기에 비정상적으로 큰 미노타우로스 하나.
……맛있겠군.
기간토피스는 입맛을 다셨다. 마침 10년의 오랜 잠에서 깨어난 덕분인지, 제법 허기도 졌다. 침입자들을 향해 미끄러져 가는 기간토피스의 움직임이 더욱 은밀해지고, 빨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첫 번째 목표물을 습격했다.
침입자 무리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까다로워 보이는 타겟, 우루스였다.
쉬이잇-!
기간토피스가 우루스의 뒤를 덮쳤다. 때마침 우루스는 뿔로 구덩이 아래의 지면을 갈아엎느라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덕분에 옆구리가 완전히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기간토피스의 거대한 아가리가 우루스의 옆구리를 덥석 깨물었다.
콰작!
“……누우?”
우루스는 깜짝 놀랐다. 삽시간에 날카로운 통증이 엄습한 옆구리. 두꺼운 소가죽 덕분에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였다.
“누우오오!”
우루스가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기간토피스가 우루스의 옆구리를 깨문 채로 고개를 들었다. 우루스의 다리가 땅에서 떠올랐다. 즉, 우람한 미노타우로스의 왕이 통째로 허공에 들어 올려졌다!
“누오?”
우루스는 깜짝 놀랐다. 누군가에게 들어 올려지다니? 송아지 시절을 제외하고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더 놀랄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기간토피스가 우루스를 냅다 집어던졌기 때문이었다.
후우웅-!
“……!”
거대한 원심력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이내 자신을 맞이하는 것은 상공 수십 미터의 밤하늘. 그제야 우루스는 깨달았다. 자신이 일행으로부터 100미터 밖으로 내던져졌다는 사실을.
깨달음과 함께 추락의 순간이 엄습했다.
콰자작! 콰콰각!
“누욱……!”
무거운 체중만큼 커다란 타격이 전신을 때렸다. 어디가 위이고 어느 쪽이 아래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푸르륵!”
우루스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그 사이, 일행은 난리가 났다.
“무, 뭐야!”
“습격이다. 전하부터!”
우루스가 내던져지는 순간, 그 일을 저지른 기간토피스의 모습을 눈에 담는 순간, 근위대원과 특근대원들은 삽을 내던졌다. 각자의 검과 창을 들었다. 순식간에 대열을 이루며 황태자의 주위를 감쌌다.
노동 모드에서 호위 모드로. 실로 황태자의 호위 자격에 어울리는, 경이로운 속도의 태세 전환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만약, 지금의 상황이 인간 실력자의 습격이었다면 그 대응은 충분한 찬사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대는 몸길이가 23미터에 달하는 괴수 사이즈의 구렁이였다.
시이잇-!
우루스를 내던진 기간토피스가 일행을 향해 돌진했다. 선두의 근위조장이 외쳤다.
“저지!”
그의 구령에 전열을 맡은 근위대가 검을 치켜들었다. 전원이 소드 익스퍼트 중급 이상의 실력자로 이루어진 근위대원들의 검이 희미하게 검기를 머금었다. 그러나…….
콰앙-!
기간토피스의 꼬리치기 한 방에 대열이 무너졌다. 넘어지고, 날려가고, 검이 부러졌다. 후열 특근대원들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라키엘도 마찬가지였다.
‘저게 뭐야? 웬…… 용가리?’
라키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침내 긴뿌리 감초를 찾았나 싶었는데. 발굴(?)을 잘하나 싶었는데. 난데없이 갑자기 나타난 용가리, 아니, 20미터급의 거대 구렁이가 일행을 습격하다니. 이건 꿈에도 예상 못 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우루스가 한 방에 날아갔어. 이거, 실화?’
아무리 봐도 실화가 맞았다.
그래서 오금이 저렸다.
근위대와 특근대가 저 거대한 뱀을 막을 수 있을까?
‘아니.’
빠른 결론이 나왔다.
라키엘이 재빨리 외쳤다.
“다들! 흩어져! 부상자 챙기고!”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몰살이다. 최대한 흩어져서 구렁이의 신경을 분산시켜야 모두가 살 확률이 올라간다. 싸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저런 거랑 어떻게 싸워!’
말이 20미터급이지, 어지간한 7~8층 빌딩 높이였다. 저런 놈과 싸운다니? 자신이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고 거대해져도 못 비비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빨간 해바라기씨를 먹어봐야 8미터 남짓한 키가 되니까. 그건 그냥 비율상, 지금 상태에서 6미터짜리 구렁이와 무제한급 맨몸 격투를 벌이겠다는 거랑 똑같은 미친 짓이니까.
‘게다가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잖아.’
자신 때문에 여기까지 함께 온 수행원들이었다. 한데 여기서 다치거나 죽으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그건 싫었다.
“젠장. 퇴각! 퇴각! 세르지오는 우회해서 우루스 깨워서 데려오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근위대와 특근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애를 썼다. 거대한 구렁이는 더욱 사납게 날뛰었다. 그래서 문득,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이고, 내 긴뿌리 감초!’
아까웠다.
차마 수행원들을 희생시킬 수가 없어서 퇴각은 하는데, 어렵사리 찾아낸 긴뿌리 감초를 내버려 두고 도망쳐야 하는 현실에 눈물이 왈칵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달래야 했다.
이번에는 진짜 답이 안 보이니까. 우루스마저 무력화된 상황이라면 진짜 위험한 거니까. 어쩔 수가 없는 거다. 이게 최선인 거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이고오!’
겉으로는 냉철한 표정으로.
속으로는 대성통곡을 하며.
라키엘은 일행의 퇴각을 독려했다. 이 상황은 이것밖에 답이 없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그림자 하나가 기간토피스의 후방에서 나타나 도약할 때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파앗.
온종일 일행의 뒤를 남몰래 따라다녔던 흑발의 사내가 땅을 박찼다. 드높이 도약했다. 검을 끌어당겼다. 바람결에 휘날리는 머릿결. 그 사이로 드러나는 얼굴. 데미안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이윽고 그의 검도 번득였다.
콰아앙-!
기간토피스의 뒤통수에서 맹렬한 검격이 폭발하는 순간, 모두가 흠칫했다. 퇴각을 독려하던 라키엘도 그 모습을 목격하고는 멈칫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아, 잘하면 오늘 뱀술 담그겠구나,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