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197화 (197/468)

197화. 정신이 번쩍 (1)

“…….”

미쳤다.

이건 진심으로 미쳤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다.

‘이게 말이 돼?’

라키엘은 경악으로 벌어진 눈꺼풀을 16비트 자진모리장단으로 파르르 떨며 눈길을 들었다. 눈앞을 가득 채운 메시지를 꼼꼼하게 훑었다.

[침술 스킬 전용 옵션 ② : 정신이 번쩍 - 당신은 특정한 조건을 갖춘 좀비에게 시침을 하여, 좀비의 신체에 새겨진 흑마술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 시술을 받는 좀비는 생전의 기억을 모두 보존한 채로 이성과 지성을 발휘하는 존재로 거듭날 것입니다.]

[옵션 발동 조건 1. 흑마술에 의해 제조된 좀비일 것. / 2. 사망 시점으로부터 49일이 지나지 않은 좀비일 것.]

“…….”

좀비를 지성을 지닌 존재로 거듭나게 할 수 있단다. 몸만 좀비지, 그냥 아예 살아 있던 때로 부활시키는 것과 다름없다는 소리다.

‘이건 무슨 드래x볼도 아니고.’

문득, 어릴 때 봤던 만화책이 떠올랐다. 구슬을 모아서 죽을 사람을 살리는 내용이 있던가. 그런데 자신이 침술로 그런 짓(?)을 비슷하게나마 저지를 수 있게 됐다니. 일단 잘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데 옵션을 사용하기 위한 대가가…… 너무 엄청났다.

[주의사항 : 이 옵션은 하늘의 섭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사술이므로, 시전자의 예상 기대수명 100일을 바치는 대가를 필요로 합니다.]

……꿀꺽.

라키엘의 목울대가 트월킹을 추며 흔들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내 목숨을 100일이나 바쳐야 한단다.

그 안내문을 보자마자 제일 먼저 떠오른 감정은, 격렬한 거부감이었다.

‘내가 미쳤어?’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찡그려졌다. 사람을 완전히 살리는 일도 아니고, 그저 좀비의 이성을 일깨우는 일에 이쪽의 기대수명을 100일이나 바쳐야 한단다. 생각만 해도 사촌이 강남 한강 뷰 아파트 30채를 사들였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큼이나 아랫배가 살살 아파왔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모은 보너스 수명인데!’

상상의 끝자락에 발가락만 콕 찍먹(?)해봐도 억울했다. 처음 이 몸에 들어왔던 때가 떠올랐다. 기대수명이 100일도 안 남았던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지금까지 버티고, 악다구니를 쓰며 살아왔다. 설명을 하자면 A4 용지 100장이 있어도 모자랄 장대하고 버라이어티한 개고생을 헤쳐왔다. 그 끝에 마침내 예상 기대수명 1,200일을 돌파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얼마나 뿌듯했던가.

요즘은 자다가도 문득 깨어나서 일부러 시스템창을 열어 보곤 했다. 3년 넘게 쌓인 기대수명을 볼 때마다 빈속인데 배가 불렀다. 마치 통장에 10억쯤 꽂혀 있는 잔고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걸 100일이나 뭉텅 잘라줘야 한단다. 고작 좀비의 기억과 이성을 살리기 위해서!

“…….”

진짜 싫은데.

라키엘은 무의식중에 한 발 물러섰다.

그러는 사이에, 검정색 K맛 가시 시침을 받으며 잠깐 제정신(?)이 돌아오려던 상단장 좀비의 상태가 다시 나빠졌다.

“……쿠워어억! 구워억!”

흐릿하게나마 생겨나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이내 희뿌연 흰자위만 남았다. 사람다운 표정이 사라지고, 온통 흉포한 흉성만이 남아서 번들거렸다.

그 모습을 보자니 다시금 맹렬한 고민이 전두엽을 들쑤셔 왔다.

“하아.”

미치겠다.

감정으로만 따지면 진짜로 안 내킨다. 피와 살보다 더 소중한 보너스 수명을 내어주는 게 너무나 싫다.

반면, 이성적으로 계산하자면?

‘이 옵션, 사용해야 해.’

애초에 자신이 제일 먼저 엿본 가능성이었다. 흑마법사가 좀비의 신체에 심어둔 흑마술의 마나. 그걸 역으로 이용해서 신경계를 활성화시킬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최소한 아주 약간의 기억이나 단서를 얻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시도했다.

한데, 너무 심하게 성공하고 말았다.

일부 단서나 기억을 되살리는 정도가 아니라, 좀비 하나를 완전한 지성체로 탈바꿈할 수 있게 됐다. 그것 자체만 따지면 정말로 잘된 일이다. 일이 너무나 잘 풀렸다.

“…….”

수명 100일을 포기하고 흑마법사의 단서를 보따리째로 얻을 것인가.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고민 끝에 오장육부를 향해 물었다.

‘후우. 이거 진짜 모르겠어서 그러는 건데. 너희 생각은 어떠냐?’

반응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적이었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질문에 앞다투어 대답합니다.]

[심장 : 좀비를 살려? 당연히 질러야지!]

[허파 : 허? 파하학?]

[대장 : 심장 형님? 이 새ㄲ…… 아니, 허파 형님이 웃는데요?]

[간장 : 냅둬ㅋ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보지.]

[위장 : 근데 나도 허파랑 똑같이 반댄데? 우리 소중한 수명을 왜 100일이나 내주면서 맛있는 거 더 많이 먹을 기회를 날려야 함?]

[콩팥 : 나도 더 오래 살아서 오줌 많이 만들 거야!]

[오장육부의 의견이 양념 반 후라이드 반처럼 쫙 갈렸습니다.]

[오장육부가 격렬한 의견대립을 겪으며 찬성파와 반대파의 내전에 돌입합니다!]

“…….”

괜히 물어봤다.

라키엘은 가슴 깊이 후회했다. 한편으로는 깨달았다. 이미 자신이 정답을 알고 있다는 것을.

‘어휴. 내 팔자야.’

여기까지 왔는데 안 지를 수가 없다. 제국의 앞날에 분탕을 쳐댈 흑마법사의 싹을 미리 자를 기회를 잡았는데, 이걸 그냥 놓을 수는 없겠다. 게다가…….

‘흑마법사 그놈이 이곳 지방에서 계속 힘을 키우면서 기생하면…… 내 긴뿌리 감초 농장 운영에도 차질이 생길 거잖아?’

만약, 여기서 그놈을 모른 척하고 방치하면 펼쳐질 시나리오가 술술 떠올랐다.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미래였다.

‘아마도 그놈은 이곳 지방에 백일해가 다시금 좌악 퍼지길 바라겠지. 그래야 시체를 쉽게 확보하고, 좀비 군단의 숫자를 편하게 늘릴 수 있으니까. 그렇기에…… 긴뿌리 감초라는 존재 자체가 놈에게 엄청난 방해물로 여겨질 거야. 눈엣가시처럼 느껴지겠지. 없애고 싶겠지. 아마도 내가 황도로 돌아가면 놈의 첫 번째 타겟이 긴뿌리 감초 농장이 될 거고.’

긴뿌리 감초는 자신이 개발한 백일해 치료 탕약, ‘천일건강탕’의 핵심 약재였다.

그러니 백일해가 다시 퍼지길 바라는 놈에게는 긴뿌리 감초가 가장 거슬리는 걸림돌로 여겨질 것이다.

그래서였다.

이제는 놈을 놓아둘 수가 없게 됐다. 긴뿌리 감초 농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놈을 먼저 쳐야 한다.

‘내…… 보너스 수명…….’

라키엘은 눈물이 차올라서 고개를 들었다. 흐르지 못하게 또 살짝 웃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아이유 참. 좋은 날이구만. 좋은 날이야.’

끝내 결심했다.

옵션창을 켰다.

딩동!

[침술 스킬 전용 옵션 ② : <정신이 번쩍> 사용 여부를 선택합니다.]

[주의사항 : 이 옵션은 하늘의 섭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사술이므로, 시전자의 예상 기대수명 100일을 바치는 대가를 필요로 합니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 : 1,273일]

[혹시 당신은 누군가의 권유나 협박에 의하여 옵션 사용을 결정하려는 것입니까?]

[YES / NO]

“…….”

잠깐, 은행 계좌이체를 하던 한국에서의 향수병이 떠오를 뻔했다. 라키엘은 보이스피싱 주의 안내문을 상대하듯 ‘NO’를 선택했다.

[<정신이 번쩍> 옵션을 발동하시겠습니까?]

[YES / NO]

‘당연히 예스지!’

이미 내친걸음이다. 그는 눈을 딱 감고 ‘YES’를 선택했다.

딩동!

[옵션이 발동됩니다.]

[옵션을 적용할 대상을 선택하여 주십시오.]

안내문에 따라 눈길을 돌렸다. 특근대원들에게 붙잡혀 버둥거리고 있는 상단장 좀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당신의 선택과 결단에 따라, 현재 보유 중인 예상 기대수명 100일을 차감합니다.]

……화아악!

‘거억?’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가슴 한쪽이 콱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위장과 십이지장, 대장이 다 함께 손을 잡고서 파멸의 강강수월래 비트박스를 불어댔다. 그런가 하면 간과 콩팥이 서로 멱살을 잡고서 번지점프를 감행했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엄청난 피로감!

그 순간, 라키엘은 볼 수 있었다.

움찔!

“……거억?”

짐승의 신음일까.

인간의 놀람일까.

상단장 좀비의 온몸이 크게 들썩였다. 동시에 고통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한데 그 표정의 느낌이 이전과 조금 달랐다. 예전에는 그저 짐승이나 야수가 아파하거나 포효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월요일 아침에 출근 생각하면서 일어나는 사람 같은 표정인데?’

딱 그거다.

그걸 보니 어쩐지, 느낌이 왔다.

“다들, 이 사람 놔줘.”

라키엘이 말했다. 그의 말에 모두가 흠칫했다.

“어서.”

“…….”

황태자의 명이니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동안 상단장 좀비를 꼼짝 못 하게 꽉 붙잡고 있던 특근대원들이 물러났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상단장 좀비를 놓지 못하는 이가 하나 있었다.

“데미안. 너도.”

“하지만 전하.”

“괜찮다.”

“…….”

“날 믿어라.”

“……알겠습니다.”

데미안마저 한 발짝 물러남으로써 비로소 상단장 좀비가 약간의 자유를 되찾았다. 라키엘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밧줄도 풀어주고.”

“포박을…… 풀라는 말씀이십니까?”

특근대의 최연장자 세르지오가 기겁했다. 라키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전부 다.”

“…….”

미쳤다.

황태자는 미쳤다.

세르지오는 잠깐이나마 황태자의 정신 건강(?)을 진심으로 염려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까부터 보인 황태자의 기행도 마찬가지였다.

‘좀비에게 침술을 펼치시다니, 그런데 그걸 맞으면서 아파하는 좀비라니……. 대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거지? 전하는…… 무얼 위해 이런 짓을 벌이시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되는 바가 없었다.

원래 황태자가 평소부터 갖가지 기행을 즐겨(?) 저지르는 편이라지만, 이번만큼은 그 행동이 선사해 주는 아리송함이 평소와 차원이 달랐다.

‘설마 좀비를 치료하시겠다는 건 아닐 거고.’

그건 불가능하다.

하늘의 섭리라는 것이 있는 거니까.

설령 가장 지독한 흑마법사라도 좀비를 그저 걸어 다니는 흉포한 시체로 만드는 것이 다인데, 아무리 황태자의 의술이 뛰어나다 한들 좀비를 사람으로 바꿀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럼 무엇을 위해서?’

상단장 좀비의 포박을 풀어주는 내내, 세르지오는 온통 의문에 휩싸였다. 그 사이, 마침내 포박에서 풀려난 상단장 좀비가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그윽!”

운신이 자유로워지자마자 털썩 무릎을 꿇는 상단장 좀비. 짐승처럼 온몸을 떨었다.

헉헉 거칠고도 불규칙한 숨을 내뱉었다. 덕분에 데미안과 세르지오를 포함한 특근대원, 근위대원 전체가 검자루에 손을 얹고서 긴장해야 했다.

한데 그때였다.

“어떤가. 좀 괜찮은가?”

황태자가 난데없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말릴 겨를조차 없이, 상단장 좀비에게 불쑥 다가갔다. 심지어 손을 내밀어 좀비의 어깨를 짚어주기까지 했다!

“……!”

가장 먼저 반응한 이는 데미안과 세르지오였다. 두 사람이 상상조차 못 했던 황태자의 돌발행동에 기겁하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손을 뻗었다. 황태자를 잡아끌어 좀비에게서 떼어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상단장 좀비가 고개를 들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인간의 말을 꺼냈다.

“……제 아이…… 네일라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 아이, 무사합니까?”

어느새 황태자를 바라보고 있는 상단장 좀비, 툴룬의 떨리는 눈동자. 그것은 좀비가 아닌 사람의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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