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202화 (202/468)

202화. 함정 속의 함정 (1)

‘경혈 스캐닝!’

키이이이잉-!

눈이 뻐근해졌다. 시야가 바뀌었다. 시선이 닿는 10미터 이내의 범위. 그 안쪽의 모든 움직이는 대상에 외곽선이 잡혔다. 예외란 없었다. 모두가 마나를 지니고 있으니까. 그것이 자연의 섭리니까.

‘인간, 오크, 흑마술이 심어진 좀비까지도.’

라키엘은 시선을 휙휙 움직이며 오늘의 경혈 스캐닝 발동 상태를 점검했다. 이쯤이면 만족스럽다. 자신감이 들었다. 충분히 찾아낼 수 있겠다. 모습을 숨기고서 도망치는 흑마법사 하나쯤은 말이다.

‘그놈, 분명히 투명화 마법을 사용할 거야.’

문득 소설 마검황의 내용이 떠올랐다. 책 속 스토리에서 훗날 죽음의 군단을 몰고 오는 흑마법사 카르투. 이놈은 미친 사상이나 성격만큼이나, 제압하기가 더럽게 어려운 놈이었다.

잔머리와 계략이 장난이 아니었다.

심지어 도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특히나 투명화 마법이 그러했다.

‘투명화 마법에 그냥 능숙한 정도가 아니었지. 아예 마스터급 경지에 올랐다는 언급이 있었어. 실제로 데미안도 놈의 투명화 마법 때문에 엄청나게 애를 먹었고.’

놈의 투명화 마법을 잡아내려면?

최소 비슷한 경지의 마법사가 필요하다. 그것이 보편타당한 상식 내에서의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외엔 투명화를 쓴 놈이 있을 일대를 무식하게 터뜨리고 날려서 광역 피해를 준다거나.’

실제로 데미안이 그런 방법으로 놈을 제압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단이 없다. 흑마법사 카르투를 제압하던 데미안은 각성을 한 상태였으니까. 세계를 멸망시킬 기세로 모든 걸 부수고 다니던 시절이었으니까.

즉, 세상을 죽음의 물결로 지배하려던 소설 속 흑마법사 카르투는, 세계 자체를 파괴하려던 데미안에게 걸려서 박살이 난 셈이었다.

그럼 지금은 어떠할까.

흑마법사 놈이 곤경에 처했다는 점은 비슷했다.

‘믿고 있던 이중 함정이 깨졌지. 매복시킨 언데드 군단은 난데없이 등장한 기간토피스에게 죄다 갈려 나가고 있고. 사방에서는 오크 군단이 몰려오고. 이번 싸움이 틀렸다고 판단하고 있을 테지.’

바로 그래서였다.

확신이 빡 하고 들었다.

놈은 반드시, 무조건, 투명화를 쓰고 빤쓰런, 아니, 도주를 감행할 것이라고.

‘그리고 놈이 도주할 방향은…… 남쪽.’

북쪽과 서쪽, 동쪽에선 오크 전사들이 달려오는 중이다. 그나마 헐렁한 경로는 남쪽이 유일하다. 사실은 당연한 일이었다. 만만하게 느끼라고 일부러 남쪽만 비워뒀으니까.

“그러니까 꼬슴아? 저어기, 남쪽 둔덕으로!”

“꼬슴!”

전장의 중심에서부터 남쪽 둔덕으로 향하는 경로를 가리켰다. 꼬슴이가 통실한 궁디를 씰룩거리며 웅장한 급가속을 선보였다.

포파파파팟-!

내달렸다. 흙먼지 서린 전장의 바람이 머리칼을 휘날리게 하였다. 그 와중에도 경혈 스캐닝 발동을 유지한 채 예상되는 놈의 도주 경로를 꼼꼼히 살폈다.

‘보여라, 딱 걸려라.’

놈이 아무리 투명화 마법을 쓴다 한들, 체내에 자연적으로 흐르는 마나의 움직임까지는 감추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투명화 마법으로 가려지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경혈 스캐닝을 쓰면 오히려 포착하기가 편해질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사람 모양으로 흐르는 경혈의 움직임이 보인다면, 그게 바로 투명화를 쓴 흑마법사라는 뜻이 될 테니까.

‘……라지만, 생각보다 쉽진 않네?’

예상보다 탐색 범위가 넓어서?

아니었다.

멀미가 나서였다!

‘어욱, 죽겠다.’

거칠게 내달리는 꼬슴이의 등에 탄 채로, 시선을 정면이 아닌 전후좌우로 바쁘게 보내고 있자니 자연히 멀미가 빡쎄게 올라왔다. 하지만 라키엘은 굴하지 않았다.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 주름 아래 5~6센티미터 지점을 꽉꽉 눌러댔다.

멀미 제어에 약간이나마 효과가 있는, 수궐음심포경(手厥陰心包經)의 내관혈(內關穴)이었다.

‘으으, 이젠 좀 보여라. 응? 일찍 잡히면 안 아프게 때려 줄게!’

염원을 담고서 더욱 열심히 눈길을 던지던 어느 순간이었다.

‘으음?’

꿈틀?

뭔가가 포착됐다.

전장에서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의 평범한 바위 뒤편이었다. 그냥 보기에는 아무도 없는 곳이었다. 한데 그곳에 경혈의 움직임을 뜻하는 외곽선이 표시되었다.

살금살금 걷는 사람 모양의 외곽선이었다.

‘딱 걸렸네?’

라키엘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하지만 그는 섣불리 흑마법사를 자극하거나 추격하지 않았다. 괜히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놈이 튀면 골치가 아파진다. 이쪽이 놈을 포착했다는 사실을 놈이 모르는 상태에서, 튈 생각도 못 하게 단숨에 확 붙잡아야 한다.

그래서였다.

라키엘은 아무것도 못 본 척을 하며 흑마법사를 휙 지나쳐 달려갔다. 그리고 안장 뒤편으로 슬며시 손을 뻗었다. 꼬슴이의 통통한 등줄기. 빽빽한 가시 사이. 그곳에 숨기듯 눕혀 놓은 기다란 깃대가 있었다.

깃대를 잡았다. 당겨서 세웠다. 2.5미터 길이의 깃대가 우뚝 서며, 꼭대기의 붉은 깃발이 힘차게 펄럭였다.

그것이 미리 약속된 신호였다.

……스으윽.

전장의 남쪽 일대에 매복해 있던 데미안과 특근대, 프란델 경과 근위대가 은밀하고도 신속하게 움직였다. 바위틈과 덤불을 이용해서 라키엘 근처로 모여들었다.

그들이 위치를 잡은 순간.

“꼬슴아! 돌아가자!”

라키엘이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외쳤다. 꼬슴이의 돌진 방향을 되돌렸다. 전장을 향해 돌아가듯, 맹렬히 내달리는 척을 하면서…… 투명화 상태인 흑마법사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갔다. 당장 들이받을 기세로!

덕분에 흑마법사 카르투는 기겁했다.

‘……헉?’

설마 들킨 걸까.

그렇잖아도 조금 전부터 거대 고슴도치를 탄 황태자가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통에 더욱 살금살금 움직이고 있던 카르투였다. 잠깐은 황태자를 기습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괜히 그랬다가 자신의 위치만 노출될 것 같아서 자제하던 중이기도 했다.

그런데 전장으로 돌아가는 황태자의 고슴도치가 갑자기 정면으로 돌진해 오다니.

‘날 노리는 건가?’

……혹은, 아닌가?‘

헷갈렸다.

일부러 노리고 달려오는 건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달려가는 경로에 하필이면 자신이 있는 건지. 일순간 상황 파악을 위한 맹렬한 고민을 불태웠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우연일 거다. 황태자 저놈은 마법사가 아니니까, 내 투명화를 파악하진 못했겠지.’

사실은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제국의 궁정 마법사가 와도 간신히 파악할까 말까 한 자신의 투명화 마법이었다. 그러니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밟듯이, 우연히 자신이 있는 쪽으로 달려오는 것일 게다.

‘그럼,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냥 지나가시지?’

상황을 파악하니 여유가 돌아왔다.

카르투는 빙긋 웃으며 옆으로 대여섯 걸음 물러났다. 자신이 이곳에 있을 거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를 황태자. 놈이 그저 지나가는 미련한 모습을 한껏 비웃어 줄 생각이었다.

‘기습하지 않는 걸 은혜로 여겨라.’

사실은 이가 갈렸다.

기껏 숨기며 키워둔 언데드 군단이 박살 났다. 생각만 해도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황태자를 기습했다간, 결국엔 자신의 안전도 장담하지 못하게 될 것이 확실했다.

‘하니 언젠가는, 반드시, 네놈을 죽이고 좀비로 만들어 내 발을 닦는 하인으로 삼아 주마.’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다짐했다.

그 사이, 거대 고슴도치가 맹렬한 기세로 달려왔다. 한데 어쩐지, 이쪽이 몇 걸음 옆으로 비켜났음에도 여전히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우연인가.

기분 탓이겠지.

카르투는 내심 혀를 찼다. 하필이면 자신이 황태자가 방향을 트는 지점으로 물러났던 것인가 보다. 그는 다시 몇 걸음 더 옆으로 비켜섰다.

‘어서 지나가라고. 빨리 꺼져.’

그는 욕설을 참으며 황태자와 거대 고슴도치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꼬슴아! 저기!”

거대 고슴도치와의 거리가 불과 5미터도 안 남은 순간, 황태자가 돌연 외쳤다. 이쪽을 딱 가리켰다.

‘어?’

나?

카르투가 움찔했다.

그 순간, 고슴도치가 야물딱지게 대답했다.

“꼬슴!”

그래, 너!

……라는 듯한 외침.

동시에 이쪽을 향해 너무나 자연스럽게 드리프트를 시전하는 거대 고슴도치의 뚠뚠한 옆구리!

투콰콰콰콰-!

“……!”

그냥 지나칠 듯하다가 기습적으로 감행한 급 방향 전환! 덕분에 꼬슴이의 통통한 온몸이 옆으로 확 쏠렸다. 앞발을 축으로 뒷발과 궁디가 180도 회전을 감행했다. 전격적인 드리프트였다.

덕분에 가시 숑숑 돋아난 옆구리가 그대로 카르투를 덮쳤다.

어떻게 대응할 틈도 없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더없이 야비하게.

“거허억?”

뿌칵!

맹렬한 충격이 카르투의 전신을 때렸다. 죽창 같은 가시가 팔다리와 아랫배를 서슴없이 찔렀다.

양쪽 다리에 셋.

오른팔에 둘.

아랫배에 하나.

총 여섯 줄기의 거대 가시가 카르투의 몸에 박혀 들었다. 다행히 생명에 당장 지장이 있는 부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제압의 효과는 충분했다. 가시는 둘째 치고, 꼬슴이의 뚠뚠한 궁디와 옆구리 자체가 막강한 질량병기(?)가 되어준 덕분이었다.

“……컥!”

이것은 가시 숑숑 돋친 25톤 트럭 드리프트에 교통사고를 당한 꼴! 카르투는 그대로 훨훨 날아갔다. 저 하늘의 아련한 별이 되어 반짝이……지는 못하고, 1,260도 장엄한 트리플 악셀을 선보이며 바닥을 굴렀다.

“컥, 극, 켁, 거헉!”

그걸로 끝이었다.

충돌 직전, 가까스로 급조하듯 시전한 방어마법 덕분에 죽지만 않았을 뿐. 팔다리가 모조리 부러졌다. 일어나지도 못하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혼절하지 않고 버티는 게 오히려 용할 정도였다.

그 사이, 웅장한 드리프트를 마친 라키엘이 꼬슴이의 등에서 내려왔다.

“후우.”

잡았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성공했다. 이쪽으로 달려오며 환호하는 특근대원들의 모습을 보자니, 오늘의 성공이 더욱 실감이 났다.

“우와아아악!”

“정말입니다! 전하의 말씀이 맞았지 말입니다!”

“아니, 진짜 두 눈 부릅뜨고 봐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전하께선 어떻게 저걸 간파하신 겁니까?”

특근대원들이 다들 흥분해서 떠들며 달려왔다. 나란히 다가오는 근위대원들도 호들갑만 떨지 않을 뿐이지, 상기된 얼굴은 똑같았다. 모두가 오늘의 성공적인 승리를 확신한 듯했다.

하지만 그중에서 유일하게 흥분하지 않은 이가 있었다.

라키엘이었다.

‘이거, 좀 이상한데.’

바닥에 행주처럼 널브러진 흑마법사 카르투. 놈을 보는 라키엘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잡혔어.’

물론 이쪽이 연기를 잘하긴 했다. 계획도 꼼꼼하게 짰고, 그걸 완벽하게 실행했다. 그런데 자꾸만 이상하게…… 쌔한 느낌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마치, 이번 달 용돈 잘 아껴서 쓰고 있느냐는 물음에 ‘그렇다’라고 거짓말을 했을 때, 전화기 너머의 엄마가 3초간 침묵을 선보이실 때와 비슷한 느낌의 쌔함이었다.

‘소설 마검황의 흑마법사 카르투가, 겨우 이 정도로 당할 만큼 허섭했나?’

그건 아니었다.

놈은 악랄했다. 그만큼 교묘했다. 방금처럼 손쉽게 당할 놈이 절대로 아니었다. 비록 이쪽이 절묘한 속임수를 썼다지만, 마지막 드리프트의 순간에 방어만 하다가 당할 놈은 더더욱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꼬슴이의 기습 드리프트 이후에도 이어질 여러 공격과 상황들을 준비했던 건데.’

사실은 드리프트도 그저 인사 비슷한 거였다. 그 정도에 당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드리프트를 시작으로 해서 매복시킨 데미안과 특근대, 근위대, 우루스까지 총동원하여 놈을 때려잡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쉽게 잡혔다.

괜히 찜찜해졌다.

‘그럼 일단 확인부터.’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야 한다. 신용카드 청구 금액은 반드시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 저렴한 금액으로 최대 얼마까지 보상금을 보장해준다는 암보험 소개도 쉽게 믿으면 안 된다. 보험사 직원이 지나가듯 언급한 ‘최대’라는 말에 함정이 있다.

그렇듯 매사에 방심하면 안 된다. 일이 너무 쉽게 풀릴 때면 더더욱 그렇다.

라키엘은 널브러진 카르투에게 다가갔다. 놈과의 거리가 10미터 이내로 다시 좁혀지자마자 경혈 스캐닝을 발동했다. 놈을 스캔 대상으로 지정했다. 혹시나 놈이 쓰러진 척을 하며 딴짓을 꾸미는 게 아닌지, 확인부터 할 심산이었다.

딩동!

[진맥 스킬 전용 옵션 ① : 경혈 스캐닝이 활성화됩니다.]

키이이이잉-!

시야가 변했다.

쓰러진 카르투. 놈의 몸속에 흐르는 경혈의 마나 흐름이 낱낱이 보였다. 그런데 그 실체가…….

‘뭐야, 저거. 사람이…… 아닌데?’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흑마술로 움직이는 좀비였다.

그런데 소설 속 카르투가 좀비였나? 아니. 절대로 그런 언급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쓰러져 있는 ‘저것’은…….

……오싹.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과 함께, 소름이 돋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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