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큰 그림 속에서 (1)
나는 어쩌다가 이런 곳에서,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 걸까.
뭉게뭉게 걷혀가는 흙먼지 속에서 라키엘은 멸망의 육수가락 같은 자괴감을 느꼈다. 농담이 아니었다.
자신의 손에 들린 채 서슬 퍼런 냉기를 뿜어내고 있는 방패, 만년설. 폭발력을 막아내느라 밀려나며 생긴 지면의 기다란 발자국. 가슴 속에서 용솟음치듯 존재감을 드러내는 두 갈래의 마나써클까지.
‘난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그냥 한국에서 평범한 동네 한의원을 운영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뉴스에 나오는 흉흉한 사건에 분개하고, 물가와 집값 오른다는 소식에 가슴 철렁 내려앉고, 건물주와 마주칠 때마다 살짤 긴장하는, 그런 사람일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달라져 버렸다.
사방에서 울부짖듯 포효하는 언데드 군단. 황야의 흙먼지 너머에서 이쪽을 노려보는 사악한 흑마법사까지.
그런 놈들과 지금 내가 대적하고 있는 거다.
어쩌다 보니까!
“…….”
만약에 하늘에 계신 엄마나 아버지가 이 모습을 본다면 기겁을 하시겠지. 엄마표 등짝 스매싱 10대쯤은 이미 예약해놓은 당상일 터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정말로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와 버렸다. 불과 1년 조금 넘은 시간밖에 안 됐는데, 이한으로 살았던 인생이 아주 머나먼 과거처럼 낯설게 느껴질 지경이니까.
그러니까, 이젠 이게 내 현실이다.
꽈드득!
라키엘은 만년설 손잡이를 더욱 거세게 움켜쥐었다. 마력의 방패가 이쪽의 의지에 호응하듯 더욱 맹렬한 냉기를 발산했다. 한편으로는 묘한 자신감이 생겨났다.
할 수 있다.
해낼 수 있겠다.
‘검을 막는 것보다는 마법 쪽이 쉬운데?’
방금이 그랬다.
K맛 가시에 시달리던 카르투가 더는 견디기 어려웠는지, 발작적인 반응을 보였다. 자기 발아래의 지면을 향해 강력한 공격 마법을 발사해 버렸다.
아마도 자신은 방어 마법 덕분에 무사할 거라고 판단한 것이었으리라. 투명화에만 의지하던 이쪽이 광역 피해를 입으리라 봤겠지.
물론 이쪽도 놀라긴 했다.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했지.’
솔직히 좀 위험했다. 경혈 스캐닝을 켜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스라한 심법으로 주위 마나 흐름을 실시간으로 경계하지 않았더라면, 놈의 돌발적인 행동을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건 막아냈다.
거의 간발의 차이로 만년설을 품에서 꺼냈다. 냉기 실드를 전개했다. 그 직후에 폭발의 물결이 몰려왔다. 막아냈다. 거대한 벽이 달려와서 꽝, 부딪히는 기분이었다. 온몸이 뒤로 확 밀려났다.
그러나 버텨냈다.
눈앞에 별이 보였지만, 잠깐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지만, 아주 살짝 속이 뒤집힐 뻔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 정도는 버틸 만했다. 더한 것도 버텨본 경험 덕분이었다.
‘쟈빌론. 그놈이 몰아치던 공격은 이것보다 훨씬 지독했거든.’
덕분에 기절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해볼 만하다. 저놈의 공격 마법, 생각보다 부담스럽지 않다.
게다가 이쪽은, 혼자가 아니다.
“전하. 저들의 대열이 흐트러질 거라던 거, 이런 뜻이셨습니까?”
황태자는 어쩌다가 이런 곳에서,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 걸까.
뭉게뭉게 걷혀가는 흙먼지 속에서 데미안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농담이 아니었다.
갑자기 온몸이 투명해지더니 혼자 적진으로 뛰어든 황태자. 흑마법사를 괴롭힌 황태자. 덕분에 언데드 군단의 대열에 틈새가 생겨났다. 자신이 이렇게 적진의 중앙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실이 소소한 자괴감을 불러왔다.
‘난 원래 황태자의 곁을 지켜야 하는 사람인데.’
그게 호위이며, 자신의 역할이다. 어떤 위험이 생겨나도 황태자보다 자신이 먼저 그걸 맞이하고, 막아내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거꾸로 된 것 같다.
적진 한가운데로 먼저 뛰어들어 틈을 만들어준 황태자. 뒤이어 들어온 자신. 이건 뭔가 잘못됐다. 한참이나!
꽈드득!
데미안은 검 손잡이를 더욱 힘껏 움켜쥐었다. 롱소드가 이쪽의 의지에 호응하듯 더욱 맹렬한 검기를 머금었다. 한편으로는 초조함이 생겨났다.
그때였다.
“뭐해?”
황태자가 고개를 갸웃.
이쪽을 향해 뚱한 시선을 보내어 왔다. 그러고는 매우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왔으면 싸워야지, 뭘 그렇게 고뇌하는 척 멀뚱거리고 있어?”
“예?”
“얼른 싸우라고.”
“…….”
황태자가 날 지나치게 아끼는 것 같다던 생각은 아무래도 오해였던 듯.
데미안은 서둘러 검을 고쳐잡았다. 뜻밖의 황태자의 재촉(?)에 떠밀려서 땅을 박찼다. 마침 흑마법사는 뭔가 엄청난 고통에 휩싸여 있는 듯했다. 공세를 퍼붓기에 딱 좋았다.
쐐애액!
흑발 호위의 검격이 공기를 찢어발겼다.
터컹-!
“……!”
사방으로 터지는 맹렬한 충격파!
데미안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역시. 방어 마법인가.’
방어 마법치고도 두껍다. 마치 철벽을 내리친 기분이었다. 덕분에 일순간 의문이 들었다.
먼저 진입해 들어온 황태자는 대체 무슨 수로 이 철벽같은 방어막을 깨고서 흑마법사에게 타격을 가한 걸까. 그 타격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흑마법사가 괴로워하고 있는 걸까.
“……흐그윽! 그윽극!”
흑마법사, 카르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등이 너무나 아팠다. 팔뚝이 죽도록 아팠다. 허리는 조각조각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게 다 조금 전 황태자에게 당한 공격 때문이었다. 방어 마법의 구석진 자리에 존재하는, 호흡을 위한 바늘 크기의 숨구멍으로 뭔가를 찌른 비겁한 수법 때문이었다!
‘……이런 비열한! 황태자 주제에…… 독을 쓰다니!’
고작 바늘 따위로 찔러넣은 공격. 그게 아직까지도 이토록 아픈 거라면, 그건 독밖에 없다. 아주아주 지독하고 악랄한 맹독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사람을 이토록 정신 놓도록 아프게 만들 수는 없을 거니까.
하지만 그에겐 고통에만 정신을 팔고 있을 틈이 없었다.
터컹! 터엉! 콰작-!
데미안의 검격이 연달아 카르투의 방어 마법을 후려쳤다. 그때마다 간접적으로 충격을 받은 카르투의 전신이 들썩이고, 비틀거렸다.
마치, 커다란 뽁뽁이로 포장된 사람을 3미터짜리 야구 배트로 후려치는 듯한 모양새. 무시하기엔 너무 큰 타격이었다.
‘……그읏! 그그그!’
카르투는 흐트러지려는 정신력을 겨우겨우 끌어모았다. 영혼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간신히 두 손을 움직여 수인을 맺었다. 익숙한 공식에 따라 주위에 흐르는 마나의 배열을 조작했다.
지이잉-!
추가로 시전한 방어 마법이 한 겹 더 그를 감쌌다. 철벽이 두 겹이 되었다. 물론 데미안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흡!”
상대가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있으니, 오히려 더욱 힘껏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더욱 선명해진 검기가 그의 장검을 물들였다.
그때부터였다.
데미안의 검격이 성난 맹수처럼 카르투의 방어 마법 곳곳을 찢어발기고, 저며내고, 물어뜯었다.
터컹! 터커컹! 터컥!
“……그으엇!”
카르투의 이마에 퍼런 핏줄이 섰다. 방어 마법을 두 겹이나 전개하고 있음에도 은은하게 전해져 오는 충격이 몸을 흔들었다.
그때마다 아팠다. 평소라면 코웃음만 쳤을 자극이었지만, 황태자의 독가시(?)에 당한 지금은 달랐다. 깃털만 스쳐도 전신이 아파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 아팠다. 만약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었다면, 체면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그렇기에, 그는 더더욱 분노했다.
‘……네놈들, 절대로! 가만 안 둔다!’
눈이 뒤집힐 정도로 증오심이 들어찼다. 지금 이 통증만 가라앉으면, 마음껏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상황만 되면, 황태자와 흑발 호위를 갈가리 찢어서 황야에 뿌려 주리라 다짐을 하였다.
마침 지옥 같은 기이한 통증도 서서히 가라앉을 기미가 보였다. 아주 느린 속도였지만, 확실했다. 카르투는 이를 갈며 정신력을 가다듬었다.
‘그그급!’
방어 마법이 무너지지 않도록 마력을 끌어모았다. 한편으로는 반격을 준비했다. 대놓고 마음껏 자신을 몰아치고 있는 흑발의 호위. 저놈에게 의외의 일격을 먹이며 틈을 만들고, 태세를 정비하기 위함이었다.
‘이것만 성공하면!’
한숨 돌릴 수 있으리라.
확신하며 두 손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지옥의 불길을 이룰 열기가 씨앗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야야! 저놈 저거! 반격한다!”
황태자가 빼액 외쳤다. 덕분에 카르투는 움찔했다. 어떻게 알았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이쪽을 향해 달려들고 있는 데미안과 눈이 마주쳤다. 데미안이 살풋,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명백한 조롱의 눈웃음이었다.
“……!”
순간 혈압이 콱.
덕분에 가까스로 씨앗처럼 모으던 지옥 불길의 열기가 흔들려 버렸다. 그리고 어김없이…….
터컹-!
흑발 호위의 일격이 방어 마법을 후려쳤다. 카르투의 입이 고통으로 떡 벌어졌다. 반격을 위해 준비하던 마법이 완전히 흩어졌다.
‘제, 젠장!’
카르투의 눈빛에 원망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키엘은 계속해서 잘도 외쳐댔다.
“이번에도 저놈 반격 준비! 아이고 저놈 독하다, 독해!”
“……!”
또?
콰텅-!
“항복하자, 항복하자아! 아프지 말고!”
“……!”
미친?
콰드컥!
“……큿!”
카르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태자가 어떻게, 자신의 반격 마법을 준비하는 타이밍을 정확하게 맞추는 걸까. 매번 더없이 절묘한 시점에 입을 놀려대며 이쪽의 주의를 흐트러뜨리는 걸까.
마치 이쪽의 마나 흐름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계속 실현되고 있었다!
‘빌어먹을!’
마치 빠져나갈 수 없는 개미지옥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카르투의 눈동자에서 독기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래 봤자 시간은 내 편이니까!’
지금도 서서히 독침에 당한 고통이 가라앉고 있다. 아까는 진짜 죽을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그냥 인두로 지지는 정도로 내려왔다. 조금만 더 지나면 한결 버틸 만해지겠지. 그때가 되면…….
‘네놈들은 다 죽는 거다!’
마력을 모으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정신적인 여유를 찾을 것이다. 언데드 군단을 다시 지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된다. 자신이 이긴다. 반드시!
카르투는 확신했다.
버티고, 또 버텼다.
끝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마침내 고통이 어느 정도 무뎌졌을 때. 카르투는 사악한 미소를 한껏 머금었다.
‘……됐다!’
마력이 원활하게 모이기 시작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부터가 대반격의 시간이다. 먼저 자신을 몰아치던 흑발의 호위를 날려 버리고, 언데드 군단을 본격적으로 지휘하여…….
그때였다.
쿠우웅-!
돌연 뭔가, 거대한 덩어리가 바로 옆에 떨어졌다. 육중한 땅울림이 온몸을 흔들었다. 카르투는 무의식중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눈이 마주치고야 말았다.
“누우우?”
새카맣고 커다란 눈망울.
엄청난 덩치의 미노타우로스가, 코앞에서 이쪽을 마주 보며 벌쭉 웃었다. 우루스였다. 덕분에 카르투는 기겁했다.
한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우리는! 언데드 방어선 뚫었다, 꾸익!”
“우리는! 오늘도 잘 싸운다, 꾸익!”
“우리는! 저놈만 팬다, 꾸이익!”
“그런데 저놈 은근 잘생겼다! 훈남이다, 꾸익!”
“흑마법사 주제에! 기분 나쁘다, 꾸이익!”
“훈남 척살, 꾸이이이익!”
미노타우로스의 뒤편으로 몰려오는 수많은 정예 오크 전사들의 물결. 압도적인 근육빵빵 덩어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걸 본 카르투는 일순간 멍해졌다.
‘잠깐. 내 친위대는?’
심혈을 기울여 키운 거대 강화 구울 친위대였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친위대가 미노타우로스와 오크 전사들의 돌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일사불란한 방어와 저지를 선보이고도 있었다.
그런데…….
그토록 강력한 친위대는 어딜 가고, 오크 전사들 따위가 날 포위하고 있는 걸까.
카르투는 다급히 언데드 군단을 지휘하기 위한 마력을 집중했다. 자신에게 영적으로 종속된 좀비와 강화 구울들과의 연결을 시도했다. 덕분에 곧, 그는 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뎃?”
언데드 군단이, 한 마리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