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큰 그림 속에서 (2)
“……뎃?”
흑마법사 카르투의 눈이 카드명세서를 본 사람처럼 확 벌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멸망의 탭댄스를 추기 시작한 것도 삽시간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언데드 군단과의 마력 연결이…… 모조리 끊어졌어?’
그는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사방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살벌하게 둘러싸고 있는 미노타우로스와 오크 전사들. 그들 너머의 광경이 보였다.
언데드 군단이 그곳에 있었다.
모조리 박살 나거나 하진 않았다. 제법 다치거나 망가진 놈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훨씬 많은 수가 무사했다. 하지만 멀쩡한 놈들도 행동이 엉망진창이었다.
마치 통제를 벗어난 개미떼처럼.
혹은 고춧가루를 덮어쓴 사람처럼.
제자리에서 발광을 하거나, 무의미하게 굴러다니며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혹은 같은 자리만 빙글빙글 돌며 배회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빌어먹을!’
단박에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언데드 군단이 전멸당한 건 아니다. 다만, 언데드 군단을 조종하기 위해 유지하던 마력의 연결이 모조리 끊어져 버렸다. 그래서 통제를 벗어난 언데드 군단이 제멋대로 폭주(?)하고 있었다.
‘황태자.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거였나!’
카르투는 분노에 찬 눈길로 라키엘을 노려보았다. 살기 가득한 눈빛을 받은 라키엘이 상큼한 미소로 화답했다.
‘당연하지!’
정말로 당연하다.
처음부터 노린 게 아니었다면, 자신 혼자 적진 한가운데에 들어오는 이런 무모한 행위를 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투명화 마법이 있다곤 해도 말이지.’
사실은 좀 무서웠다. 온갖 언데드 좀비와 구울 등등이 득시글대는 군단의 중심지였다. 게다가 놈들을 조종하는 흑마법사와 잠시나마 1대 1로 대치해야 하는 상황에 스스로 뛰어든 상황이었다.
당연히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스스로의 판단을 믿고 있었다.
‘검정색 K맛 가시는 정말로 눈물 나게 아프니까.’
그걸 맞으면 정신을 못 차린다. 그 어떤 극강의 멘탈을 지닌 사람이라도 그렇다. 아니, 전신의 감각이 모조리 죽은 좀비마저도 아파서 비보이로 변신할 정도다.
카르투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고 보았다. 그 예상이 맞았다. 덕분에 놈이 한참을 허우적거렸다. 언데드 군단에 대한 통제력이 흐트러졌다.
그 틈에 데미안을 불러왔다. 데미안으로 하여금 놈을 몰아치게 하였다. 더욱 정신을 못 차리도록. 정신적인 여유가 완전히 사라지도록.
놈이 숨을 돌리고자 반격을 시도할 때면? 그걸 사전에 간파해서 데미안에게 고자질(?)까지 했다.
‘덕분에 놈의 멀티태스킹이 완전히 박살 났지.’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멀티태스킹이라는 것은 대체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와이프에게 들킨 비상금에 대한 날카로운 추궁을 받으면서 초행길 시내 운전을 하는 것만큼 힘겨운 일이 있을까. 팔뚝을 째고 뼈를 긁어내는 수술을 받으며 바둑을 두었던 관우? 실제로는 바둑이 아니라 오목, 아니, 알까기마저도 울면서 겨우 했을 것이다.
방금 카르투가 처했던 상황도 비슷했다.
‘K맛 가시 덕분에 영혼이 바스러지는 지옥의 고통을 받았겠지. 거기에 데미안이 숨 쉴 틈도 없이 공격을 퍼부어댔고. 게다가 내 고자질 때문에 나름의 반격마저도 모두 실패했어. 말 그대로 멘탈을 수습할 틈도 없이 폭풍처럼 내몰린 셈이야.’
그 과정에서 수천 구에 달하는 좀비와 구울을 원활하게 조종할 수 있을까. 사람이라면 불가능하다. 그게 당연한 일이다.
그 예측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누우우우-!”
“꾸이익!”
우루스가 포효했다. 브라쉬와 오크 전사들이 근육을 불끈거리며 카르투의 주위를 고밀도 뚝배기처럼 든든하게 포위했다. 보고 있자니 국밥 한 그릇을 원샷한 것처럼 속이 든든해지는 광경이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빠지자고.”
“알겠습니다, 전하.”
위험을 직접 감수하는 건 여기까지다. 이제 뒤는 토벌군에게 맡기면 된다. 언데드 군단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고, 흑마법사 카르투는 혼자 남겨졌으니까.
그때부터였다.
토벌군의 파상공세가 시작되었다.
“돌격, 꾸이익!”
“누우우우!”
브라쉬가 선두에서 포효하며 내달렸다. 반대편의 우루스가 호응하며 돌진했다. 사방에서 근육 덩어리 오크 전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그 모든 투지와 포효가 모이는 일점. 그 중심에 흑마법사 카르투가 있었다.
“……크읏!”
카르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상황을 재빠르게 인정했다. 언데드 군단과의 마법 연결을 당장 복구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건 시간이 제법 걸리는 일이니까.
그러니 이제는?
‘이렇게 된 이상 내 손으로 직접, 다 죽여 주마!’
크샤아아아……!
마침 황태자의 이상한 독침(?)이 선사하던 고통도 가라앉았다. 마법을 시전하는 일이 다시금 수월해졌다. 그는 정신을 극도로 집중했다. 음험한 의지에 응답한 마나가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질주했다. 소리쳤다.
끼아아아아악-!
그의 발아래를 중심으로 지면에 거대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흑암의 공간이 열렸다. 끝없는 허무의 물결처럼,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윽고 수많은 망자의 망령들이 쏟아져 나왔다!
“……꾸익?”
선두에서 돌진하던 오크 전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혼자인 채로 고립된 줄 알았던 흑마법사에게, 수많은 원군이 갑작스럽게 생겨났다.
“저게 뭐냐, 꾸이익!”
오크 전사들이 동요했다.
카르투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스몄다.
‘그래, 당황해라. 한없는 공포에 젖어라. 내가 그동안 거둔 망자의 물결에 휩쓸려라!’
수백, 수천의 망령들이 그의 주위를 춤추기 시작했다. 그 모두가 한때는 살아서 미소 짓고, 사랑을 나누던 이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사악한 흑마법사에게 육신을 빼앗기고, 좀비가 되어 농락당하며 구천을 떠도는 망령이 되어 버렸다.
카르투가 망령들에게 명령했다.
‘쓸어 버려!’
꺄아아아악-!
수백, 수천의 망령이 사방으로 질주했다. 물론 그들은 물리적인 공격을 선사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공격 효과는 확실했다. 기세등등하게 돌진하던 오크 전사들의 발길이 묶여 버린 것이었다.
“……꾸이이익! 이상하다, 꾸이익!”
“헛것이 보인다, 꾸익!”
“헛것 아니다, 이건……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 꾸익?”
공포와 경악의 물결이 오크 전사들의 정신을 헤집었다. 처음에는 그저 섬뜩한 망령의 날뛰는 모습에 어깨를 움츠리던 오크 전사들이, 망령들의 정체를 깨닫고는 더욱 큰 혼란에 빠졌다.
“아버지, 꾸익!”
“여, 여보…… 꾸익?”
“아들, 아들아! 네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 꾸익!”
카르투는 지난 몇 년간, 이곳 크라노스크 지방에서 시체를 수집했다. 그 시체로 좀비와 구울을 만들고, 남은 영혼은 붙잡아서 망령으로 거두었다.
당연히 지금 날뛰는 망령들도 원래는 이곳 지방의 주민이었다. 개중에는 오크 전사들의 조상, 부모, 형제나 사촌, 배우자, 친구, 이웃, 심지어는 일찍 떠나보낸 자식도 있었다.
“으아아, 끔찍하다, 꾸익!”
“내 용맹함을…… 조상에게 휘두를 수는 없다, 꾸익!”
“죄송합니다, 아버지, 꾸익!”
“여보, 꾸이익!”
오크 전사들 사이에 난리가 났다. 돌격은 중단된 지 이미 오래. 돌격은 고사하고 아예 무기를 떨어뜨리며 전의를 상실하는 오크 전사들이 속출했다.
그 와중에 우루스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누, 누우?”
함께 움직이던 오크 전사들이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고서 우왕좌왕하고 있으니, 길이 막혔다. 게다가 우루스는 덩치가 컸다. 앞을 가로막는 오크 전사들을 들이받거나 걷어차지 않고서는 돌진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초조해진 우루스가 거친 콧김을 뿜으며 뒷발굽으로 땅을 긁어댔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떤 오크도 우루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돌격 진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자중지란이 일어났다.
카르투는 그 틈에 포위망의 중심지에서 유유히 벗어났다. 그의 입가에 광기 어린 웃음이 터졌다.
“크핫!”
역시 어리석고 나약한 것들이다. 아무리 혈육, 친우라 한들 이제는 그저 한낱 망령에 불과한 존재일진데. 본인이 살아가는 데에 아무런 가치가 없어진 존재일 뿐인데.
‘역시 우매한 것들이란!’
쓸데없는 가치에 목을 매달고. 집착하고. 여리게 굴어대고. 그러니 너희가 버러지 같은 삶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것이겠지. 이 몸이 내세우는 이상적인 사회와 미래를 차마 받아들일 생각조차 못 하고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다!’
오늘, 이 자리에서 승리를 거두리라. 저들을 모조리 학살하여 언데드 군단으로 삼으리라. 그리고 황태자 좀비를 교묘하게 조종하여 황궁으로 들여보내고, 황제의 목을 따고 말리라.
그러면?
‘제국 전체가 흔들리겠지.’
갑작스러운 황제의 죽음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권력의 공백. 비어 버린 황좌를 차지하기 위한 암투가 시작될 것이다. 그게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자신을 토벌하는 데에 황가의 역량을 제대로 집중하지도 못할 테지.
그러면 된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 사이에 자신의 언데드 군단을 더욱 폭발적으로 늘릴 수 있다. 지방의 영지들을 차례대로 잡아먹으며 신속하게 세를 불리면 되니까!
‘그러니…… 다들 죽어라!’
끼야아아아악!
카르투가 지면을 향해 더욱 집중된 마력을 쏟아부었다. 마법진이 한층 확장되었다. 더더욱 많은 망령이 풀려나며 사방으로 날뛰었다. 오크 전사들의 전의가 완벽하게 꺾여갔다. 개중에는 투지를 완전히 잃고서 자리에 주저앉는 자들도 생겨날 정도였다.
더불어 카르투의 자신감 서린 확신도 한층 짙어져 갔다. 적어도, 돌발적인 라키엘의 외침이 전장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지기 직전까지는, 확실히 그랬다.
“다들! 주모오오옥!”
라키엘이 아기 코끼리 환상종, 코몽이를 마이크처럼 잡고 외쳤다. 라키엘의 외침을 받은 코몽이가 콧김을 뿜어내며 목소리를 수십 배로 증폭시켰다.
증폭된 외침이 전장을 온통 뒤흔들었다.
“여기서 조상님, 가족, 친구 영혼 알아보고 반응해봤자! 너희가 운동할 때 그들이 봉 무게라도 들어주냐아아아-!”
“……!”
뜻밖의 외침.
뜻밖의 내용.
‘봉 무게’라는 단어가 혼란에 잠겨가던 오크 전사들의 귓구멍을 콕 찔렀다.
모두가 움찔했다.
그러는 사이, 라키엘의 외침이 이어졌다.
“무기 떨어뜨리지 마라! 손 가벼워지면 전완근에 자극 풀린다아! 주저앉았으면 당장 자세 잡고 일어나라! 스쿼트 한 번으로 쳐준다! 물러나지 마라! 도망치지 마라! 도망치려면 뛰어야 한다! 그런데 뛰는 건 뭐다? 유산소! 유산소를 과하게 하면 어떻게 될까!”
“……!”
그 순간.
오크 전사들의 뇌리에 깨달음의 종소리가 땅, 하고 울렸다. 모두는 동시에 답을 떠올렸다.
도망치려면 뛰어야 함.
뛰는 것은 유산소 운동.
유산소를 많이 하면 찾아오는 건?
‘……근손실!’
번쩍!
절박한 깨달음(?)과 함께, 오크 전사들의 두 눈에 활활 타오르는 투지가 되살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