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209화 (209/468)

209화. 낚시의 시간 (1)

근손실.

근육에 집착하는 이들에게 충분하고도 짜릿한 경기를 한 다스씩 안겨줄 수 있는, 마법의 단어.

근손실은 무섭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단번에 다 허물어뜨리는 느낌이 난다. 지금껏 수없이 흘려온 땀과 쏟아부은 노력이 헛된 것으로 전락하는 박탈감을 안겨준다.

그래서 식단의 단백질 비율에 집착하게 된다. 운동할 때면 점진적 과부하가 제대로 수행되는지가 신경 쓰인다. 애인과 만나서 산책을 할 때도 유산소가 과한 건 아닌지 걱정부터 앞선다. 처참하게 차였을 때조차도 근손실이 올까 봐 함부로 눈물조차 흘리지 않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근손실이 주는 심리적 압박감이자, 두려움이다.

그리고 지금.

라키엘의 우렁찬 외침이 그러한 근손실에 대한 오크 전사들의 마음속 뇌관을 제대로 건드렸다.

“……도망치면 안 된다, 꾸익!”

“도망치려면 뛰어야 한다, 꾸익!”

“뛰면 유산소다, 꾸익!”

“유산소 많이 하면 근손실 온다아, 꾸이익!”

눈앞에 나타난 조상님, 가족, 친구의 망령을 보며 투지를 잃어가던 오크 전사들이었다. 개중에 누군가는 무기를 떨어뜨리고, 도망을 치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뒤늦은 깨달음이 모두를 일깨웠다.

“무기를 들어라, 꾸익!”

“전완근 펌핑, 꾸익!”

“돌진하며 대퇴사두와 후면사슬에 집중해라, 꾸이익!”

“힙힌지! 협응, 꾸이이익!”

모두가 투지를 되찾았다.

다시금 무기를 들었다.

힘차게 전진했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도 조상님, 가족, 친구의 망령이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주위에서 날뛰고, 눈과 귀를 어지럽히며 영혼에 타격을 입힐 만큼 지독한 정신공격을 퍼부었다.

‘아들아……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꾸익!’

‘형……! 혀엉, 꾸익!’

‘내 친구여, 꾸익!’

그러나 모두가 눈 질끈 감으며 무시했다. 지금 발걸음을 멈춘다고 해서 저들이 봉 무게를 들어주지도 않는 법!

‘차라리 흑마법사를 때려잡아야지, 꾸익!’

침착함을 되찾고서 생각해보니 그랬다. 감히 소중한 조상님, 가족, 친우의 영혼을 망령으로 붙잡아둔 게 저 흑마법사였다. 저놈이 때려죽일 놈이다. 저놈만 쓰러뜨리면 소중한 이들의 영혼이 풀려나 하늘로 올라갈 수 있으리라!

“돌겨어어억, 꾸익-!”

투지를 되찾은 브라쉬가 포효했다. 오크 전사들이 대흉근이 웅장해지는 돌격을 재개했다. 덕분에 흑마법사 카르투는…….

‘뭐 이런 미친놈들이!’

어이가 없었다.

수백 수천의 망령을 풀어서 저들의 정신을 오염시키려 했다. 사실 그건 금지된 끔찍한 흑마술이었다. 그만큼 위력적이었다. 정신력만으로 버티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게 보편타당한 상식이요, 흑마법사 학계의 정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낱 오크들이 그걸 해내고 있었다! 그것도 단체로! 근육에 대한 광적인 집착 하나만으로!

‘말도 안 돼!’

카르투의 어금니가 치과의사들이 임플란트 시술에 대한 탐욕을 반짝반짝 불태울 정도로 거칠게 까드득 갈렸다.

동시에 라키엘의 입에는 함박웃음이 빵긋 맺혔다.

‘……예상대로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한편으로는 소설 마검황의 내용을 떠올렸다. 소설 중후반의 에피소드에서 그야말로 악명을 떨치는 흑마법사 카르투. 놈이 주로 사용하던 광역 마법이 바로 이, ‘망령유희’라는 기술이었다.

‘놈은 언데드를 제조하는 과정에서 남는 희생자들의 영혼, 그걸 망령으로 가두어 종복처럼 부리곤 했지. 그러다가 가끔 위기에 몰리는 순간이 오면? 부리고 있던 망령을 모조리 풀었어.’

무려 수천의 망령이 사방에서 날뛰고 비명을 질러대는 상황. 그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어지간한 정예 군대도 단숨에 멘탈이 확 털리곤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보통 사람은 귀신 하나만 마주쳐도 비명을 질러대거나, 기절하거나 하는 법이다. 혹은 담력이 아주 강한 사람도 간신히 버티고는 이후에 평생 술안주거리로 삼는 게 전부다.

그런데 수천의 귀신들이 아예 대놓고 날뛰면? 그것만으로도 평범한 사람은 그냥 넋이 나간다. 대부분이 평생 시달릴 트라우마를 얻게 된다.

덕분에 이 ‘망령유희’는 카르투의 악명을 가장 빛나게 하던, 대표적인 시그니처 마법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그러니 당연히 그것부터 쓰리라고 예상했지. 조금만 궁지에 몰리는 순간이 오면 말이야.’

그 예상이 맞았다.

이후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오크 전사들이 위기에 처하리라 보았다. 그냥 망령도 아닌, 가족과 친구의 망령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돌격이 중단되고, 최악의 경우에는 토벌군 전체가 와해될 수도 있다고 여겼다.

하여 준비했다.

‘오크 특제 맞춤형 공포 극복법!’

공포는 더 큰 공포로 극복할 수 있다. 출근이 무섭다면? 다음 달에 나갈 카드값과 대출 이자를 생각하면 된다. 퇴사가 두렵다면? 이대로 버티다간 멘탈이 나가서 김 부장 얼굴에 니킥을 꽂고 경찰서에 출두할 거 같다는 공포를 느끼면 퇴사 결심도 살짝 수월해진다.

귀신에 대한 공포심을 극복하는 방법 또한 마찬가지다. 오크들이 귀신보다 훨씬 무서워하는 것. 그것만 대뇌피질에 알차도록 쏙쏙 꽂아주면 된다.

그것이 바로 근손실에 대한 공포였다.

“우리 부모님은 우리를 나약하게 낳지 않으셨다, 꾸익!”

“근육을 잃는 것이! 바로 불효다, 꾸익!”

브라쉬의 포효!

오크 전사들의 돌격!

녹색 근육 덩어리들이 해일처럼 몰아닥쳤다. 그 앞을 막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흑마법사 카르투는 폭풍이 몰아치는 성난 바다에 띄워진 작은 돛단배처럼 홀로 돌격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는 쉽사리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강력한 흑마법사였다. 단순히 비장의 공격 하나가 무위로 돌아갔다고 해서 쉽사리 낙담하지도 않았다.

더욱 악랄한 마법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 네놈들이 그렇게 나오겠다?’

그의 입가에 소리 없는 웃음이 맺혔다. 두 손이 불길한 흑색으로 물들었다.

츠스스!

그 순간, 가장 선두에서 달려온 오크 전사가 도끼를 내리찍었다.

“죽어라, 꾸익!”

콰작!

도끼가 방어 마법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마법진이 흔들리며 거친 파장에 휩싸였다. 하지만 뚫리거나 쪼개지진 않았다. 대신 카르투가 손을 뻗었다.

‘우선 한 놈!’

덥석!

그가 도끼질을 한 오크 전사의 팔뚝을 움켜잡았다. 그러나 붙잡힌 오크 전사는 오히려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뭐냐, 꾸익?”

전사는 가소로움을 느꼈다. 맨손인 흑마법사 주제에 먼저 손을 뻗어서 자신을 붙잡다니. 미미한 악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어린 오크들의 손아귀 힘이 더 세다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비리비리한 놈! 혹시 이대로 패대기쳐지고 싶은 건가, 꾸익?’

그럼 소원대로 해주지.

오크 전사가 붙잡힌 팔뚝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츠즈즈즛!

돌연, 기이하고도 불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디에서? 흑마법사에게 붙잡힌 팔뚝에서. 그리고 동시에…… 온몸에서 힘이 쭈욱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 어어억, 꾸이익?”

오크 전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로만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삽시간에 힘이 풀리고, 다리가 풀리고, 눈이 풀렸다. 어째서? 왜?

‘흑마법사 이놈…… 내 힘을…… 꾸익.’

빨아들이고 있다!

확실하다!

“으, 으어윽, 꾸이익!”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오크 전사가 황급히 팔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어느새 팔을 휘두를 힘도 없었다. 아니, 팔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심지어 흑마법사의 손아귀가 강력한 흡인력마저 발휘했다!

“꾸, 꾸익! 워어억! 꾸이이익!”

점점 더 많은 힘이 빠져나갔다.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털썩,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흑마법사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고서야 절망감이 찾아왔다.

‘내 생명력을…… 꾸익…….’

단순히 힘만 앗아가는 것이 아니다. 생명력을 탐욕스럽게 빨아먹고 있는 거다. 깨달음과 함께 소름이 돋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다른 오크 전사들이 달려들었다. 카르투의 방어 마법을 수없이 후려쳤다. 그러나 데미안의 폭풍처럼 쏟아졌던 검기도 그럭저럭 막아낸 방어 마법이었다. 전사들의 맹공이 거셌지만, 단시간 내에 쉽게 부술 수가 없었다.

덕분에 오크 전사들이 난리가 났다.

“저 흑마법사 놈이 이상한 짓거리 한다, 꾸익!”

“쿠마쉬가 붙잡혔더니 날씬해지고 있다, 꾸익!”

“아니다! 저거 날씬해지는 게 아니라…… 근손실이다, 꾸익!”

“뭐, 꾸이익?”

상황을 깨달은 오크 전사들의 눈동자가 더욱 활활 불타올랐다. 붙잡히면 근손실이 생기는 악랄한 마법이라니. 살면서 이렇게 지독하고 악독한 놈은 처음 봤다.

“저런 미친, 꾸익!”

“저저! 대흉근 줄어드는 거 봐라, 꾸익!”

“삼각근 뽕도 다 빠진다, 아이고오, 꾸이익!”

다들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르며 카르투를 몰아쳤다. 그러나 첫 번째 희생양을 완전히 말라깽이 꼴로 만든 카르투는 다음 먹잇감을 고르듯, 유유히 또 다른 희생양을 붙잡았다.

‘다시 한 놈!’

츠즈즈즛!

“꾸, 꾸이익!”

또 하나의 오크 전사가 근손실의 파탄지경에 빠졌다. 보다 못한 우루스가 돌진했다.

“누우우!”

콰앙-!

대놓고 카르투를 뿔로 받아 버렸다. 그러나 방어 마법을 완전히 깰 수가 없었다. 오히려 카르투는 우루스가 가한 충격을 역이용했다. 충격력에 몸을 싣고 날았다. 멀찍이 떨어진 곳의 오크 전사에게 달라붙었다.

‘또 하나!’

츠즈즈즈즈!

“으, 으아악, 꾸익!”

오크 전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기껏 근손실의 공포를 극복하고 용기를 얻어 돌격을 감행했는데, 그 끝에는 더한 근손실의 악몽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저런 놈이…… 꾸익!’

이제 오크 전사들의 눈에 카르투는 근손실을 불러오는 악마로 보이기 시작했다. 때려도, 베고 찍어도 죽일 수 없는 악마. 붙잡히면 근육을 앗아가는 희대의 강탈자.

“그래도 쳐라! 싸워라, 전사들아, 꾸익!”

족장 브라쉬가 전사들을 독려했다. 그의 독려에 힘을 받은 전사들이 더욱 분노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카르투는 더욱 여유를 되찾았다.

‘된다. 통하는구나!’

그는 확신했다.

오늘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겠다. 지금이야 오크 전사들이 악을 쓰며 분노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저 분노도 불안감과 무력감으로 뒤바뀔 것이다.

‘네놈들이 아무리 후려쳐도 내 방어 마법을 쉽사리 부술 수가 없을 테니까. 그런데 나는? 붙잡는 족족 네놈들을 폐인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이렇게 조금만 더 흔들면 된다. 게다가 그에게는 생명력 흡수 마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츠파앗!

오크 전사를 붙잡지 않은 그의 나머지 한 손에 회색 마법진이 떠올랐다. 마법진 속에서 불길한 빛깔로 일렁이는 서른 개의 구체가 튀어나왔다. 작은 구슬 크기의 구체였다.

쐐애액! 퍼퍽- 퍽!

그의 손짓을 따라 날아간 구체가 오크 전사들의 몸에 박혔다. 구체가 작으니 상처도 작았다. 하지만 진짜 피해는 그때부터였다.

“그, 으윽? 그워억? 꾸익?”

구체에 맞은 오크 전사들이 온몸을 떨었다. 침을 흘리고, 눈이 시뻘겋게 변하며 초점이 사라졌다. 마치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옆을 홱 돌아보았다. 옆쪽의 동료를 다짜고짜 공격하기 시작했다!

“구워억! 구웍! 꾸익!”

“으어엇? 너 왜 이러냐, 꾸익!”

구체에 맞은 서른 명의 오크 전사들이 일제히 광분 상태로 접어들었다. 전사들의 진형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카르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황태자!’

멀찍이 물러나 있는 황태자가 시야에 포착되었다. 저놈이다. 저놈만 잡으면 된다. 인질로 삼든, 죽여서 종복으로 부리든, 저 황태자를 끝장내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다. 이길 수 있어!’

카르투는 확신하며 두 눈을 빛냈다.

라키엘도 그 눈빛을 느꼈다.

그래서였다.

“데미안. 물러나라.”

“……예?”

데미안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한창 흑마법사가 날뛰는 판국이었다. 심지어 놈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노골적으로 황태자를 노리고 있다.

한데 물러나라니.

어째서?

이해할 수 없는 황태자의 명령이 이어졌다.

“네가 물러나고, 내가 저놈한테 붙잡혀야, 우리가 오늘 이겨.”

“…….”

미치신 겁니까?

라고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데미안은 황태자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음흉하게 머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 흑마법사 저놈, 오늘 많이 불쌍해지겠구나,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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