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223화 (223/468)

223화. 아름다운 보상 (1)

“좋아. 우선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네 안에 도사리고 있는 신화적 존재의 자세한 정체와 목적부터 말하지.”

“부탁드립니다.”

꿀꺽, 출렁이는 데미안의 목젖. 앉아는 있되 살짝 이쪽으로 내밀듯 기울이고 있는 상체. 녀석의 좀처럼 볼 수 없는 초조해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라키엘은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한의원에서 많이 보던 모습인데.’

한국에서의 나날이 떠올랐다. 뭐, 딱히 스페셜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을 평범한 일상이었다. 한데 그 일상 속에서 제일 자주 접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저것이었다. 이쪽을 마주 보고 앉아서 상체를 살짝 내민 모습. 긴장한 눈빛과 자세.

바로 한의원에 내원한 환자들의 모습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쪽의 진단을 듣는 환자와 가족들이 제일 많이 보이는 모습이기도 했다.

덕분에 저런 자세를 보이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렇기에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도 잘 안다.

예를 들자면…….

“그 존재의 이름은 아케로스. 마계왕.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 차원의 여러 세상 중에서 가장 아래층에 있는 마계의 주인이지.”

“마계…… 말입니까?”

“음. 들어본 적이 있나?”

“아뇨. 딱히 자세히는.”

“그렇겠지. 사람들이 흔히 아는 지옥과는 전혀 다른 곳이니까.”

사실이었다.

소설 마검황에 나왔던 설정이 떠올랐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여러 계층의 세계가 어울리며 겹쳐 있어. 아니, 층층이 쌓여 있다는 표현이 가장 알맞겠지. 여러 겹으로 쌓은 파전…… 아니, 팬케이크처럼 말이야.”

“그런 겁니까?”

“어. 그중에서 우리의 세계는 물질계. 팬케이크의 중간쯤에 끼어 있지. 햄버거 패티처럼.”

라키엘은 자신의 두 손을 포개어 겹쳐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여기. 제일 위쪽은 밝혀진 것이 없어. 혹자는 절대자만의 공간이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그곳이 비어 있다고도 하지. 아직은 아무도 몰라. 그곳 바로 아래층은 그나마 제법 밝혀져 있지만.”

“혹시…… 천계입니까?”

“정답. 천사들이 살아가는 곳.”

성스러운 워커홀릭 공무원들의 공간. 그곳이 천계라고 했던가.

“그 아래에 정령계가 있고. 그 밑층이 우리 물질계. 더 아래는 정령계와 물질계의 여러 관념과 꿈의 조각이 흘러들어 모여 있다는 유계. 더 아래가 지옥이지. 그리고 마계는 지옥보다도 더 밑에 있어.”

“제일 밑바닥이라는 거군요.”

“그래. 네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아케로스는 그곳 세계의 주인이고. 너도 느꼈겠지만, 놈은 네 육신을 통해서 지옥과 유계를 건너뛰어 물질계에 강림하려 들고 있지.”

“저는, 대체 뭡니까?”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데미안.

녀석의 불안해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 모습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어찌 말해줘야 할까. 진실을 그대로 말하면 순순히 받아들일 순 있을까. 아니. 충격을 받겠지.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이것이 최선이다. 내가 아는 데미안은 그렇게 나약한 놈이 아니니까.

‘그리고…… 사람은 현재 자신이 처한 엿 같은 상황의 원인을 제대로 모를 때가 제일 불안하고 괴로운 법이니까.’

경험상 정말로 그랬다.

환자들이 특히 그러했다.

본인, 혹은 가족이 많이 아파본 사람은 안다. 제일 괴로운 것은 아픈 게 아니라, 아픈 원인이 좀처럼 밝혀지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환자도, 가족도 당황하고 만다. 아니, 그건 거의 공포다. 밑바닥이 없어 막막한, 그런 종류의 공포.

차라리 아픈 원인이라도 속 시원히 밝혀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아픈 원인에 맞춰서 치료 방향이라도 잡아볼 텐데. 앞으로 어떻게 해나갈지 예상을 하든 마음의 준비를 하든, 뭐라도 해볼 수 있을 텐데.

“…….”

갑자기 부모님 얼굴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서둘러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냈다. 대신 데미안 녀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심 다짐하였다. 이제부터는 환자를 대하듯이 하자고. 환자에게 병명, 원인, 증상, 진행, 앞으로의 치료 방향을 설명하듯이 해보자고. 그것이 내가 보여줄 수 있을 최선이겠노라고.

“데미안. 너는 형상은 인간이되, 마계왕의 권좌에서 만들어진 존재다.”

“저는…….”

“그래. 알아. 충격이 크겠지. 그럼에도 계속 말해도 될까?”

“……예.”

“고맙군. 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네 몸은 마계왕이 인간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었지. 수많은 마계의 마법과 술법, 의식을 거쳐서. 그 어떤 마족보다도 더욱 인간과 흡사하도록 말이야.”

데미안 녀석의 기색을 슬쩍 살폈다.

녀석은 생각보다는 크게 충격을 받은 모습이 아니었다. 자신이 들은 내용을 어떻게든 있는 그대로 들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어쩌면 각성이 진행되던 순간에 어느 정도는 스스로에 대해 단서를 얻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좋다.

나쁘지 않다.

용기를 얻고서 계속 말해주었다.

“그것이 10년 전의 일이야. 너를 완성한 마계왕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세계의 틈새를 찢었지. 지옥과 유계를 한 번에 건너뛰어, 마계에서 이곳으로 통하는 통로를 만들었고, 그곳을 통해 너를 이곳으로 보냈어. 이유는 간단해. 본인이 직접 넘어오기엔 틈새가 작았거든.”

“그럼 제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래. 안타깝지만.”

“…….”

“이런 말을 해주게 되어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데미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전혀 괜찮지 않음을 안다. 그러나 어설픈 위로가 필요하지 않음 또한 안다. 그렇기에 있는 사실만 그대로.

“그렇게 너는 마계왕의 손에 의해 이 세계로 던져졌고, 흘러흘러 지하 검투장의 챔피언이 되었지. 아마 그대로 두었다면 검투장에 화재가 일어나는 날, 너는 그곳을 탈출하여 갖가지 고난과 역경을 겪게 되었을 테고. 마지막에는…….”

“마계왕이 제 몸을 빼앗는 운명을 맞이하는 거였습니까?”

“그래. 정확해.”

소설 속 내용이 그러했으니까.

“그 모든 고난과 역경, 그에 따른 극복이 계속해서 너를 키우지. 역혈의 마공, 리베르사 심법으로 너를 이끌게 돼. 아마 충분히 느꼈을 거야. 다른 사람이었으면 수십 번을 죽었을 마나 역행을 감행해도 정작 너는 멀쩡하고 편안하다는 걸.”

“예.”

“그게 바로 마족의 특성이다.”

“…….”

“리베르사. 즉, 역혈의 심법은 마족의 특기지. 그 정점에 있는 마계왕은 말할 것도 없고. 너는 그렇게 만들어진 거야. 끝내 리베르사 심법을 완성하고, 마계왕의 완벽한 그릇이 되어, 그의 물질계 강림의 수단이 되는.”

“전하.”

“혹시 듣기 괴롭나? 그럼 쉬었다가 나중에…….”

“아닙니다. 그저, 마계왕 그자의 목적이 궁금해서 말입니다.”

“물질계 강림을 추진하는 이유?”

“예.”

어느새 데미안의 눈빛이 단단해져 있다. 역시. 예상대로 녀석의 멘탈은 튼튼하다.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됐다고 해서 값싼 비애감에 젖어들지도, 그걸 티를 내지도 않는다. 내 믿음 그대로였다.

“놈이 물질계로 오려는 이유는 간단해.”

“혹시 물질계를 정복, 혹은 정벌하기 위함입니까?”

“아니. 설마하니 그런 단순하고 고전적인 이유일 리가. 놈은 창조를 원하고 있어.”

“창조라시면…….”

“차원 창조.”

“…….”

데미안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겠지. 그럼 이걸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까.

고민하며 입을 열었다.

“아까 말했지? 우리가 사는 차원은 겹쳐서 쌓은 팬케이크처럼 여러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최상층에는 아직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층이 있다고.”

“예. 아마도 절대자의 공간일 수도 있다는…….”

“그래. 놈은 그곳으로 가려는 거야.”

“차원의 최상층 말입니까? 한데 어째서 물질계로…….”

데미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계왕이 차원의 최상층으로 가려는 거라면, 그냥 그곳으로 가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한데 왜 굳이 자신을 이용해서 물질계에 강림하려는 걸까.

라키엘이 답을 알려주었다.

“여기를 징검다리로 삼으려는 거야.”

“징검다리…….”

“그래. 가장 밑바닥의 마계에서 지옥과 유계를 건너뛸 수는 있었지만, 물질계까지 넘을 수는 없었거든. 그렇기에 물질계를 마계의 식민지로 삼고, 이곳에서 다시 더욱 위로 올라갈 힘을 축적하겠지.”

“설마.”

“짐작이 됐어?”

“예.”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추측한 바를 말했다.

“더 위로 올라갈 힘을 모은 뒤엔…… 더 위쪽 세계를 침략할 새로운 그릇을 만들겠군요. 저를 만들었던 것처럼. 맞습니까?”

“정확해.”

아마도 다음은 정령계, 혹은 어쩌면 천계가 될 것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의 아바타를 먼저 보내고 그곳에서 성장시켜, 강림의 그릇으로 사용할 것이다. 실제로 소설 마검황에서 마계왕이 계획했던 일이 바로 그런 방식이었다.

“그렇게 위로. 또 위로. 천계까지 도달하면 마침내 놈은 최상층으로 가는 문 앞에 서겠지.”

“절대자의 세계 말이군요.”

“아마도. 그곳으로 들어가면 놈은 절대자와 동등한 위치가 되어 새로운 차원을 창조할 자격을 얻겠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마계왕은 그렇게 기대하고 있어.”

“그럼…… 마계왕이 창조하려는 새로운 차원은 대체 어떤 것입니까.”

“글쎄. 그건 본인만 알겠지?”

나도 거기까지는 모른다. 소설에서도 자세하게는 언급된 적이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이 딱 하나는 있다.

“우리가 그걸 막을 수 있어.”

소설에서 데미안이 해냈으니까. 수많은 실패와 역경이 있었지만, 끝끝내 성공했으니까. 그러니 우리도 할 수 있다. 내가 그렇게 만들 수 있다.

“아마 너도 느끼고 있겠지만, 이제 마계왕의 각성은 기정사실이 됐지. 각성의 단계가 임계점을 넘었어. 역혈의 심법을 중단할 수가 없지? 오히려 그게 숨을 쉬듯이 자연스러워졌을 거야. 그러니 이제 각성 자체는 중단이 안 돼.”

“늦출 수도 없는 겁니까?”

“아주 조금만? 이제는 그냥 숨만 쉬고 있어도 각성이 아주 느리게, 그러나 절대로 멈추지 않고 진행이 될 거야. 마치 휴화산 아래에 마그마가 모이다가 어느 날 펑, 하고 터지는 것처럼 말이지.”

“그럼…….”

“맞아. 이제는 예방이 아니라 저지의 단계로 접어든 거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해낼 수 있어.”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주 조금, 자신은 있었다.

내가 방법을 아니까. 소설 속의 데미안이 어떤 시도를 하였고, 어떻게 실패했으며, 끝내 어찌 그 실패를 극복했는지까지, 모두 알고 있으니까.

“내가 개인적으로 예측해보자면 저지하는 데에 성공할 확률은 반반? 그래도 그게 어디겠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 한 세계의 신화적 지배자를 저지할 확률이 절반인 거면, 그것만으로도 넙죽 엎드리고 감사할 지경인 거지, 뭐.”

사실이다.

로또 1등 당첨 확률이 50%인 것과 똑같은 상황이다. 충분히 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일단은 여기까지. 자세한 방법은 차차 이야기를 해주도록 하지. 나도 생각과 계획을 한 번쯤 정리해봐야 하니까. 어차피 여기서 당장 그걸 할 수도 없을 거고.”

사실이었다.

일단은 황도로 돌아가야 뭐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이제는 이곳에서의 일을 슬슬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을 이들부터 보도록 할까. 다들 목이 빠지도록 내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을 테니.”

특근대와 근위대.

우루스, 수간호사 아니스.

거기에 환상종들과 오크 족장 브라쉬까지.

모두 이쪽을 위해 희생을 무릅쓴 이들이었다. 기꺼이 어깨를 나란히 하여 싸우고, 사심 없이 몸을 던져 이쪽을 지키려 애를 썼다.

그들을 보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데미안이 순순히 일어났다. 침실 문을 열었다. 덕분에 바깥의 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전하?”

열린 이쪽의 침실 문으로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다가 시선이 딱 마주친 사람. 거친 인상의 중년인. 한때 고참 검투사였던 특근대원. 언데드 군단의 첫 시체폭발이 일어나던 순간, 나를 대신해서 온몸으로 폭발을 막아주었던 사내.

특근대의 최연장자인 세르지오였다. 그가 놀란 눈으로 벌떡 일어났다. 다른 이들도 함께 일어났다.

“전하아아-!”

세르지오가 우렁차게 외치며 달려왔다. 어쩐지 그 걸걸한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있는 듯이 들림은 그저 착각일까. 아니. 그와 함께 달려오는 근위대와 특근대원들, 수간호사 아니스, 꼬슴이와 환상종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격한 포옹을 받는 얼떨떨한 와중에도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직도 시야 한쪽에서 ‘확인’을 원하며 반짝이는 보상 팝업창. 저것보다 더욱 값진 보상이 이미 나와 함께하고 있음을.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 희생을 감수하며, 내가 무사함에 기꺼이 눈물을 내보이는 이 모든 사람들. 이들이 나의 가장 귀한 보상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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