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228화 (228/468)

228화. 아버지의 노심초사 (3)

황궁 복도.

황제의 알현실과 제법 떨어진 장소. 데미안은 그곳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의 임무는 황태자의 최근접 호위였지만, 지금은 이곳에서 홀로 대기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호위 대상인 황태자가 안쪽에서 황제와 담소를 나누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하.’

데미안은 쓴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성가심을 느꼈다. 이제 더는 안 되겠다. 매번 이러는 건 못 보겠다. 언제부터 이랬던 걸까. 한번 의식하고 나니까, 그 뒤부턴 계속 신경이 쓰인다.

그래서였다.

데미안은 복도 허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말없이, 한참, 그 눈빛과 분위기만으로 주위의 공기가 싸하게 가라앉았을 무렵, 툭 내던지듯 말했다.

“요즘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첩보 활동인지 뭔지 하는 그 소꿉장난 같은 관찰은 그만두고, 이제 슬슬 모습을 보이는 게 어떨지.”

이제 더는 모르는 체 두지 않겠다는 결단을 머금은, 데미안의 혼잣말이 떨어졌다. 물론 이번에도 처음엔 반응이 없었다. 그저 처음엔, 잠깐은 그랬다.

그러나 몇 초가 더 흐른 뒤.

“……정말 이러깁니까.”

데미안에게서 일곱 걸음 떨어진 복도 창가, 장식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내 그곳 벽면과 장식이 일렁였다. 아니, 미세하게 펄럭거렸다. 색상이 바뀌었다. 장식과 똑같은 패턴에서 아무 무늬도 없는 회색 망토로.

망토 뒤에서 쓴웃음을 머금은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우리 피차 이러지 말지요, 데미안 카이엔 경.”

“…….”

데미안은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남자, 마젠타노 황실 특수정보부 소속 3호 요원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스쳤다. 이내 그의 입에서 엄살 섞인 소리가 나왔다.

“저도 그저 제가 맡은 일을 하는 중입니다. 그냥 모른 척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혹시 신경에 거슬려서 그러는 겁니까.”

끄덕.

데미안의 고개가 희미하게 끄덕여졌다. 사실이었다. 황태자를 미행하며 관찰하는 저 요원의 존재를 깨달은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크라노스의 협곡에서 각성을 겪은 뒤부터였다.

그때부터 감각이 비약적으로 밝아졌다. 원래도 소드마스터 증후군을 앓으며 감각이 예민한 상태이긴 했지만, 이제는…… 수준 자체가 달라졌다.

원한다면 상대방의 혈액이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황태자의 내면에서 떠들어 대는 수호천사의 목소리도 들렸다. 하물며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첩보 요원은 말할 것도 없었다.

거슬렸다.

단지 황태자의 주위에서 얼쩡거리고 있어서? 아니. 보호가 목적이 아닌 듯해서 거슬렸다.

“어째서 그날, 협곡에선 나서지 않았지.”

“……저는 나설 수 없는 몸입니다.”

“예전부터?”

“네. 크레모에서도. 앙부아즈에서도 그랬지요.”

“전하께서 매번 위기에 처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구경만 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말씀드렸다시피 나설 수가 없는 몸이니까 말입니다.”

“관찰만 하는 신세다?”

“대략 그렇지요.”

“하면 지난 며칠 동안엔 왜 전하를 떠나 있었지?”

데미안의 눈길이 날카로워졌다.

3호 요원의 얼굴 가득 쓴웃음이 떠올랐다.

“당신 때문입니다, 카이엔 경.”

요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최근에 섬뜩함을 느꼈던 날을 떠올렸다. 협곡에서의 대폭발로 황태자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시기의 일이었다.

처음 황태자가 의식을 잃고 3일 동안은 임무에 지장이 없었다. 한데, 저 흑발의 호위가 깨어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예전엔 자신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했던 흑발의 호위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당시의 자신은 평소처럼 황태자를 관찰하며 은신 상태를 유지했다. 그걸 위해 황실의 첩보요원에게만 교육되는 특수한 호흡법을 사용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였다.

흑발의 호위가, 자신의 호흡을 똑같이 따라 하기 시작했다. 들숨과 날숨을 똑같이 맞추어서. 너무나 정확하게. 발을 맞추어 함께 걷듯이!

“…….”

그날의 충격을 잊지 못하겠다. 황급히 호흡 리듬을 바꾸었는데도 그걸 고스란히 따라오던 데미안의 모습은 더욱 못 잊겠다.

“그날, 일부러 그랬던 거겠지요?”

“물론.”

“공격할 생각이었습니까?”

“그쪽이 꽁지를 빼지 않았다면.”

“그래서 최근에 제가 전하를 관찰하지 못한 겁니다.”

“그럼 지금은 왜 돌아온 거지?”

“어쨌든 제 임무를 이어 가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내게 부탁을 하러 대놓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겠군.”

“당연하죠. 하…… 좀 봐주면 안 되겠습니까? 이거, 서로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3호 요원은 진심이었다.

계속 이래서는 곤란했다.

황태자의 호위가 자신을 대놓고 적대시하면, 앞으로 황태자 관찰 임무에 심각한 차질이 생길 것이 뻔했다. 최악의 경우엔 능력에 물음표가 달려 좌천당할 수도 있다. 해고. 모가지. 고용난의 시대에 이보다 끔찍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게다가 저, 애가 둘입니다.”

“그런 거 물은 적 없는데.”

“다섯 살과 세 살배기 딸과 아들이지요.”

“안 궁금한데.”

“그렇듯 행복한 가정을 이끄는 가장의 미래를 짓밟을 생각입니까?”

“그쪽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기꺼이.”

“……협조라니요?”

3호 요원은 멈칫했다.

데미안이 당연하다는 듯이 툭, 내뱉었다.

“다음부터는 지켜보고만 있지 말라고.”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전하가 위기에 처하면…… 좀 도와달라고.”

“…….”

“불가능한가?”

“……최대한 노력은 해보지요. 제 임무가 어그러지지 않는 선에서 말입니다.”

데미안은 3호 요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기를 잠시.

“그 대답이 솔직한 것이길 바라지.”

“그럼, 제 임무를 방해하지 않을 겁니까?”

“그쪽이 하는 걸 봐서.”

“알겠습니다. 후우. 그럼, 이만.”

인사를 나눈 직후였다. 3호 요원이 망토로 전신을 가렸다. 망토가 주위의 색과 똑같이 변하며 그의 모습을 감쪽같이 가렸다.

다시 은신 상태에 들어가며 3호 요원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단 까다로운 흑발 호위를 달래는 데에는 성공했다. 당분간은 임무 수행에 차질이 없을 듯하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집에 가서 와이프느님을 달래야겠구나.’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에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졸지에 크라노스까지 다녀오는 바람에 결혼기념일을 챙기지 못했다. 그 뒷수습을 어찌하여야 할까. 마젠타노 황실 특수정보부 소속 3호 요원의 진정한 고난은 이제부터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한편, 복도에서 한참 안쪽. 황제의 알현실에선 라키엘에게도 때아닌 고난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별궁 한의원인지 뭔지 하는, 그 소꿉장난 같은 병원 놀이는 그만두고, 이제부터는 후계자 수업에 집중해 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예?”

라키엘은 순간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마터면 면봉 좀 달라고 외칠 뻔했다. 당연했다. 황제의 발언이 너무나 뜬금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양반 왜 이래?’

끔벅끔벅 눈초리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가 뜻 모를 미소를 수염 사이로 머금는 게 보였다.

“무얼 그리 쳐다보느냐. 이제 슬슬 후계자 수업에 집중하는 것이 당연한 시기가 되었거늘. 아니, 따지고 보면 제법 늦었지. 그렇지 않느냐?”

“…….”

사실은 맞는 말이다.

어쨌거나 황태자니까. 나이도 벌써 스물을 한참 넘었으니까. 원래대로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열 살도 되기 전에 후계자 집중 수업을 받아야 했을 테니까.

하지만 병약한 황태자 라키엘은 그러지 못했다. 말 그대로 너무나 병약해서, 온종일 병상에서 골골대느라, 수업 같은 걸 받을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하니 이제는 별궁 한의원인지 뭔지 하는 그 짓은 그만두거라.”

“그건 아니 되옵니다.”

대답이 반사적으로 나왔다.

황제의 눈썹이 꿈틀.

그러나 라키엘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제가 지금껏 힘들여 꾸려온 한의원이옵니다. 또한, 제게 가장 큰 자산이 될 시설이기도 하옵니다.”

솔직한 사실이었다. 한의원이 있어야 자신이 산다. 내원하는 환자를 치료해 주고, 보너스 수명을 챙길 수 있다.

그런데…….

‘그걸 그만두라고? 나 죽으라고? 이제 겨우 한의원 기틀 좀 잡아 놨는데?’

억울함의 물결이 심연에서부터 쑴펑쑴펑 솟구쳤다. 이건 말 그래도 날벼락이었다. 절대로 안 된다. 황제의 명령이라 해도 이건 따를 수가 없다.

하지만 황제의 생각은 달랐다.

“…….”

황제 아스테리온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아들. 언제나 병약하고 나약하여 미덥지 못했던 후계자.

그러나 이제는 달리 보였다.

언젠가부터 달라진 아들. 병약하고 나약했던 태도를 벗어던진 후계자.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너무 과하여 매번 위험을 감수하는 황태자.

‘안 되지. 아니 돼. 이제는 이 아비가 너를 그렇게 둘 수는 없음이야.’

그는 크라노스에서 아들이 겪은 일을 떠올렸다. 거의 죽을 뻔했다. 생각만 해도 섬뜩했다. 그래서 후회가 되었다.

‘내가 너를…… 사지로 몰 뻔하였구나.’

아들이 크라노스로 떠나기 전의 일도 떠올랐다. 당시 황도에 감초 수급난이 생겨났다. 하여 아들이 자신을 찾아왔던가. 사태 해결을 도와달라고.

하지만 자신은 그 요청을 거부하였다. 다가온 곤경을 아들이 스스로 이겨내길 바랐다. 그런 마음으로 크라노스로 떠나는 것을 방치하였다.

그 결과가…… 이번의 사태였다.

‘나의 불찰이다. 변명할 여지가 없구나.’

아들이 겪었을 위험과 고난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이제 더는 그렇게 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새삼 새겼다.

“이제는 충분하다. 그만큼이면 되었다. 너도 세상이 얼마나 험난한지 겪을 만큼 겪은 듯하니, 이제부터는 밖으로 나돌 생각을 하지 말거라. 그러자면 우선, 네가 자꾸만 밖으로 나도는 원인이 되는 한의원부터 정리를 하여야겠지.”

“하오나 폐하.”

“반론은 듣지 않겠다.”

황제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더는 아들을 위험에 내던지기 싫었다. 잃을 뻔하고서야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깨달았다.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아들의 반발이 생각보다 격렬했다.

“들어 주셔야 하옵니다.”

“입 다물거라.”

“싫사옵니다.”

“감히?”

“아무리 그렇게 하명하신다 하여도, 제게는 훗날 커다란 정치적 자산이 될 시설이자 수단이옵니다.”

“……무어라?”

황제는 멈칫했다.

커다란 정치적 자산?

고작 병원에 불과한 한의원이?

“혹여, 그곳에서 치료를 받은 백성들이 너를 우러를 것이라 기대하는 순진한 생각을 품는 것이더냐?”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사람은 단순히 그런 것으로 누군가를 칭송하고 우러르진 않는다. 개중에 성정이 착실한 몇몇 이들은 그럴지 모르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속성이지. 처음엔 무상으로 치료해 주니 고마워하겠지만…… 그게 얼마나 갈까.’

오래 가진 않을 것이다. 나중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것이 무작정 퍼주는 호의에 반응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씁쓸하고도 적나라한 일면이니까.

그렇기에 황제는 아들의 대답을 신뢰하지 않았다. 너무나 단순하고 순진한 발상이라 여겼다. 라키엘의 이어지는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분명 그러하였다.

“단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옵니다.”

“그런 이유가 아니야?”

“예, 폐하.”

라키엘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호의가 계속되면 그걸 권리로 아는 것이 사람이라 들었습니다. 저 또한 당연히, 한의원에서의 진료가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지지와 우러름을 얻어내진 못할 것이라 보고 있사옵니다.”

“……하면, 네가 말한 정치적 자산이 무엇이더냐.”

아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한의원으로 무얼 이룩하려는 것이기에 자신의 결정에 반발하는 것일까. 솔직히 후계자 수업에 집중하라는 말을 들으면 기뻐할 줄 알았는데. 드디어 후계자로 인정을 받았노라 자랑스러워할 줄 알았는데.

‘한데 너는 어찌하여?’

황제는 의문을 느끼며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라키엘은 숨을 골랐다. 졸지에 떨어진 한의원 폐쇄 명령이라는 날벼락. 그 앞에서 ‘제 보너스 수명 때문인데요’ 따위의 신뢰성 떨어지는 대답을 꺼낼 수는 없었다.

덕분에 그는 고속으로 머리를 굴려야 했다. 고민은 빠르고 치열하게. 해답은 적절하게. 황제가 혹하며 낚일 수밖에 없을 방식과 목적을 제시할 수 있도록. 인생 최대치의 순발력을 발휘하며.

“이 나라의 정계에 실질적으로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귀족들에 대한 정치적 자산이옵니다.”

“귀족?”

“예, 폐하.”

“나는 네 대답이 미덥지가 않구나.”

“어떤 의미에서 하시는 말씀이시온지.”

“고작 한의원으로 어떻게 귀족들에 대한 정치적 자산을 확보할 수 있다는 말이더냐.”

“혹여 증명을 바라시는 것이시옵니까?”

“증명이라. 좋지. 방도가 있느냐?”

“물론이옵니다.”

“어떻게?”

황제의 눈길이 가늘어졌다.

라키엘은 내심 주먹을 꽉 쥐었다. 됐다. 생각대로 저 물음을 이끌어 냈다. 그러니까 이제는…….

“만약 폐하께서 기회를 주신다면, 제가, 별궁 한의원을 활용하여 3개월 내로, 황도 귀족원 귀족 과반수의 정치적 지지 선언을 받아내어 보이겠사옵니다.”

즉석으로 계산하고 준비한, 황제를 혹하게 만들어 한의원 폐쇄를 막아낼, 위기 극복 멘트가 라키엘의 혓바닥에서 촵촵 발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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