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귀족에게만 찾아오는 질환 (1)
“만약 폐하께서 기회를 주신다면, 제가, 별궁 한의원을 활용하여 3개월 이내로, 황도 귀족원 귀족 과반수의 정치적 지지 선언을 받아내어 보이겠사옵니다.”
질렀다.
즉석에서 계산하고 준비한 대답이었다. 황제를 혹하게 만들어 한의원 폐쇄를 막아낼 위기 극복 멘트이기도 하였다.
‘제발 통해라. 제발.’
라키엘은 입술 안쪽을 잘근잘근 씹었다. 겉으로는 자신 있게 내질렀지만, 실제로 황제가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서 조마조마했다.
‘별궁 한의원을 때려치우라니. 미치겠네, 진짜.’
그건 안 된다.
저 말을 들으면?
보너스 수명 수입이 끊긴다.
‘기껏 의사들 고용하고 체계 정비하면서 종합병원처럼 키우는 중인데…… 여기서 그만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두통도 없는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솔직히 최근 이럴 기미가 살짝 보이긴 했다. 크라노스까지 직접 달려온 황제와 함께 돌아오는 내내 그러했다. 황제는 시시때때로 얼굴만 마주치면 잔소리를 날려왔다. 항상 그러했듯이 불친절하고, 까칠한 태도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느낄 수 있었다. 황제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행여나 이쪽이 잘못될까 봐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하여 황도에 돌아오면 어떤 형태로든 태클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했다. 과잉보호의 기미가 보였으니까.
그런데 설마하니, 한의원을 폐쇄하라는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후우. 이건 너무 극단적이잖아. 가만 보면 황제 이 양반도 중간이 없다니깐, 중간이.’
라키엘은 한숨을 푹푹 삼켰다.
정말이다.
황제 이 양반, 은근 극단적이다.
전에는 거의 방목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더니, 알아서 잘 살아남으라고 야생에 내던져놓듯이 하더니, 이제는 아예 극성 부모의 전형적인 과잉보호를 시전하려 들고 있다.
‘딱 그거지. 아들 공부나 장래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안 될 듯한 것들은 죄다 없애거나 치우기.’
컴퓨터 없애 버리고.
휴대폰 압수하고.
티브이 금지하고.
그렇게 자식을 과잉보호의 울타리에 가두어두고 공부 머신으로 승화(?)시키려는 거다. 아마 별궁 한의원 폐쇄와 후계자 수업 명령도 그런 취지겠지.
그래서였다.
방금, 저 폭탄선언을 처음 들었을 땐 맹렬한 충동 한 가지를 느꼈더랬다. 바로 거짓말 이용권을 확 사용해 버릴까, 하는 충동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그건 진짜로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 치트키로 써먹도록 아껴둬야지.’
앙부아즈 때처럼 섣부르게 낭비할 수는 없다. 당시에 거짓말 이용권을 한 장만 남겨뒀어도 쟈빌론에게 붙잡혀 개고생을 하진 않았을 터다.
이번에도 그런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지금 딱 한 장 있는 이용권은 비상용으로 킵 해두고. 우선은 내 역량으로 뚫어 보는 거야.’
라키엘은 다짐하며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동안 황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무표정의 화신 같았다. 하지만 그 모습도 잠시.
“……허.”
황제의 조각상처럼 무미건조하던 얼굴에 실금처럼 작은 미소가 새겨졌다. 그것은 명백한 코웃음이었다.
‘뭐? 3개월 이내로 황도 귀족원 귀족 과반수의 정치적 지지 선언을 받아내겠노라고?’
황제는 어처구니가 없어짐을 느꼈다.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한데 아니었다.
하여 더욱 어이가 없었다.
저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니, 엄밀하게 따지자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귀족원 귀족들이 그렇게 생각이 없는 자들일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물며 여전히 2황자 녀석과 끈을 대고 있는 인사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판국인데.’
사실이었다.
안타깝게도 라키엘은 아직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상태였다. 병약한 모습으로 오늘내일했던 기간이 너무나 길었던 까닭이었다.
물론 최근에는 조금 달라지긴 했다.
2황자와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했다. 자신의 입지를 증명하였다. 앙부아즈 등에서의 활약을 통해 주위의 시선과 인식을 바꾸어 나가고는 있다.
하지만 그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였다.
‘귀족들 다수는 여전히 계산을 끝내지 않았지. 누구보다도 이해타산에 철저한 자들이니까. 오직 그것만이 그들이 대대로 누려온 권력과 생존의 비결이었으니까.’
교묘한 정치적 처세술.
줄타기의 장인들.
귀족들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특히, 지방도 아닌 이곳 황도에서 권세를 누리며 살아남아 있는 가문은 더더욱 그러했다. 황도의 귀족 세계는 칼날 없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한데 공개적인 정치적 지지 선언?
그들이 그런 걸 할 리가 없다.
“어리석구나. 너는 그것이 가능하리라 보는가?”
불가능하다.
사실상 아직도 라키엘과 테오도르, 황태자와 2황자의 계승권 경쟁은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한 사람이 황좌에 앉기 전에는 끝이 아니다. 어느 한 쪽이 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고, 어떤 일을 겪을지 모른다. 이건 원래 그런 종류의 경쟁이니까.
한데, 그 결론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누구보다도 줄타기에 민감한 귀족들이 섣불리 도박을 걸듯이 한쪽에 일방적인 지지 선언을 할까?
아니.
절대로.
행여나 라키엘을 지지하겠노라 성급하게 선언을 하였다가, 훗날 미지수의 격변 끝에 2황자가 덜컥 황제가 되어 버리면?
그 귀족 가문은 끝장이 나는 거다. 최소한 한직으로 물러나거나, 과거의 권세를 잃고는 구석에서 눈치만 보며 지내게 될 것이다.
한데 자신의 큰아들은, 그런 것조차 내다보지 못하고서 섣부른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는 말인가. 황제는 내심 혀를 차는 심정으로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라키엘의 태도는 여전히 의연하였다.
“저는 가능하리라 보옵니다, 폐하.”
“감히 확언을 하기까지.”
“개인적으로 엿보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가능성이라. 어떤?”
“영업 비밀이옵니다.”
“……뭐?”
“그 패를 일찍 내보여 제게 좋을 것이 없지 않겠사옵니까.”
“끝내 증명을 해 보이고 싶다는 뜻이더냐.”
“예, 폐하. 폐하께서 폐쇄하라 명하시는 별궁 한의원이 어떻게 저의 정치적 자산이 될 수 있는지를, 명명백백히 증명해 보이겠사옵니다.”
한마디도 지지 않고 또박또박 꺼내는 대답. 결국,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좋다. 네가 그토록 원한다면, 기회를 주도록 하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망극은 무슨.”
다시금 흘러나오는 코웃음.
슬며시 내걸리는 비웃음.
“어디 열심히 하여 보거라.”
“예, 폐하.”
그 대답을 끝으로 라키엘이 물러났다. 이내 혼자가 된 황제는 여전히 비웃음을 지우지 못하고서 라키엘이 앉았던 자리만 지그시 바라보았다.
‘대체 저 아이는 누굴 닮아서 말도 아니 되는 소리를 저토록 자신 있게 꺼내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본인이 질 수밖에 없는 내용의 내기를 내미는 어리석은 황태자도. 성공하지 못하리라 여기면서도 끝끝내 묘한 기대감을 품고야 마는 자신마저도. 전부.
‘대체 어찌하여. 나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품는 것이란 말이더냐.’
다시금 나오는 코웃음.
짙게 내걸리는 비웃음.
사실 황제의 그 모든 웃음은 본인 스스로를 향한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매번 묘한 기대감을 주는 아들. 그런 아들을 여전히 타박만 하려고 드는 자신. 말로는 아들에게 어리석다 일침하지만 정작 진짜로 어리석은 건 어느 쪽인지.
“허허. 허허허.”
그래.
아들이 아비보다 빼어나야지.
그래야 세상이 발전하지 않겠는가.
아무도 없는 알현실이 황제의 나직하고도 흡족한 웃음으로 채워졌다.
♣
“즈어어어어언하아-!”
이런 외침이 들려올 줄 알았다. 별궁 문턱을 밟기도 전에 이 소리를 듣지 못하면 섭하지.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머금으며 웅장한(?) 외침이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별궁 한의원 정문. 그곳을 박차고서 야생마처럼 달려오는 한 사내가 있었다.
중년의 미남자, 가르딘 경이었다.
“전하! 전하아아…… 아억!”
콰당탕!
얼마나 반갑고 급했던 걸까. 냅다 달려오던 가르딘 경의 스텝이 꼬였다. 넘어졌다. 극적인 낙법을 선보이……지는 못하고 떼굴떼굴 굴렀다. 황급히 일어나며 흙먼지를 털고는 다시 달려왔다.
“전하, 전하아! 무사하셨습니까?”
“……어, 대강은?”
“혼수상태에 빠지셨다면서요!”
“그, 그랬지?”
“한데 어째서 절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전하의 주치의인데 말입니다!”
“어, 그게, 혼수상태였으니까?”
“…….”
“가르딘 경, 잘 지냈어?”
“아뇨. 못 지냈습니다!”
“…….”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어?”
“아뇨. 전혀요!”
하지만 말과는 달리 가르딘 경의 눈시울은 이미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의 눈가에 가득한 다크써클이 보였다. 전에 없던 눈꼬리 주름도 조금은 생겨나 있는 것 같았다.
“그래. 고맙군.”
내가 없는 동안 한의원을 지켜주느라 고생이 참 많았다. 만약 이런 충실한 이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처럼 마음 놓고 한의원을 맡겨둘 수 있을까. 홀가분히 어딘가에 다녀올 수 있을까. 아니. 거의 불가능하겠지.
“어쨌건. 그동안 별일은 없었고?”
“예, 전하. 전하께서 겪으신 일에 비해서는 이곳의 어떤 일도 별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쯧. 내가 그렇게 걱정을 시켰나.”
“예. 매우 확실하게요.”
“미안해.”
“아닙니다.”
가르딘 경은 활짝 웃었다. 한 달 전의 일이 떠올랐다. 크라노스에서 일어난 사건의 소식이 황도에 전해졌던 날이었다. 그날 후로 거의 닷새 정도는 식사도 못 했다. 음식이 넘어가질 않았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내가 그날, 전하께 억지를 부려야 했노라고. 날 두고 크라노스로 가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되는 거였다고. 지금 내가 전하 곁에 있었다면, 어떤 시도든 해볼 수 있었을 거라고. 그런데 자신은 여기 황도에만 편하게 머물러 있다고.
그게 너무 죄송해서.
죄인이 된 것 같아서.
온 세상이 회색으로 보였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한데 그랬던 걱정이 무색하게 전하께서 무사히 돌아오셨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하면 안 되는 법이라며 스스로를 단속했다.
“그럼 전하? 먼 길을 돌아오셨으니 피로하실 텐데, 쉴 곳을 준비시킬까요?”
지금은 주군인 황태자의 건강과 피로 관리가 우선이다. 가르딘 경은 행여나 황태자가 몸살이라도 앓을까 걱정하며 물었다.
한데 황태자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아니. 일단 환자들부터.”
“……예?”
“나 없는 동안에 입원한 환자들 있을 거 아냐. 그들부터 살펴봐야지. 그리고 내일부터는 긴히 추진할 일도 있고.”
“긴히 추진할 일이라시면……?”
“별궁에서 내 이름으로 주최할 대연회. 황도 귀족원 귀족 전원에게 보낼 초청장부터 준비해.”
라키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했다.
황도의 귀족이라면. 풍족한 사치를 영위하는 중년 남성들이라면. 그들 중의 반수 이상이 똑같은 종류의, 그러나 이곳의 의학 수준으로는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공통적인 질환에 고통받고 있을 것이라고.
그 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한, 자신의 마수(?)를 벗어날 수 없으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