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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230화 (230/468)

230화. 귀족에게만 찾아오는 질환 (2)

중년 남성은 슬프다.

중년 여성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모든 것이 예전 같지가 않아진다. 피로가 더럽게 안 풀린다.

어릴 땐 밤샘을 하고서도 다음날 쌩쌩했다면, 마흔 줄 이후부터는 밤샘을 하려면 며칠은 빌빌거릴 각오부터 해야 한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정력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꺼낼 필요도 없다. 당장 음식 먹는 일도 젊던 때와 확 달라진다.

일단 소화가 잘 안 된다. 조금만 달고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살이 금방 찐다. 일단 찐 살은 더럽게 안 빠진다.

운동을 해보아도 근육이 좀처럼 붙지가 않는다. 아니, 근손실이 안 오면 다행이다.

그렇기에 조금만 방심하면 갖가지 성인병을 세트메뉴로 알차게 달고서 살게 된다.

남의 일이냐고? 절대로. 지금 당장 쌩쌩한 20대 청년들도 딱 살아온 날만큼의 시간만 지나면 당장 온몸으로 때려맞으며 겪게 될 현실이다.

‘그런데도 그걸 피하는 게 쉽지가 않지. 왜냐. 먹고 사는 게 바빠서. 게다가 당장 드라마틱하게 몸이 확 나빠지는 게 아니라서.

아주 서서히,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슬금슬금 뜨거워지는 솥에 갇힌 것처럼. 관리를 소홀하게 하다가 어느 날 앗 뜨거, 하면서 보면 이미 늦은 거거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테크트리(?)를 타게 된다.

한국에서 겪은 주위의 사람들이 거의 다 그랬다. 내원하는 환자분들, 심지어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곳의 귀족들은?

훨씬 더할 것이다.

‘애초부터 건강 관리의 개념이 한국에 비해서 훨씬 희박하니까. 게다가 귀족들은 워낙 부족한 것 없이 잘 먹고 지내는 사람들이라서 말할 것도 없고.’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과잉이 병마가 되는 법이다.

이곳의 귀족들이 딱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까 귀족원에 등록된 황도의 모든 귀족가에 초청장을 뿌려.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주최하는 연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면 전하? 이번 연회를 통해서 귀족 환자들을 확보하시려는 겁니까?”

“바로 그거지. 그들이 내 정치적 지지기반이 되어줄 테고.”

“하오나 전하. 그들이 과연…….”

“내 의도를 의심하지 않겠느냐고?”

“예, 전하.”

가르딘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별궁 한의원의 명망이 높아졌고, 덕분에 찾아오는 환자가 제법 늘었지만…… 여전히 중앙 귀족들의 반응은 미지근하다는 걸 말입니다.”

“물론.”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가르딘 경의 지적대로였다.

그동안의 노력 덕분에 별궁 한의원은 이제 완전히 본궤도에 오른 상태였다. 매일 환자들로 북적였다.

그만큼 고용된 의사들의 다크써클도 짙어졌다. 강철 체력의 웨어울프 간호사들마저 가끔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내원하는 환자들 중에 굵직한 귀족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귀족이라고 해 보았자 황도 인근 지방의 소귀족 정도가 다였다.

“중앙 정계에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얽히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귀족원의 귀족들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지. 당연해. 그들은 죄다 가문에서 직접 고용한 주치의가 있을 테니까. 의료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인재들, 혹은 명망 높은 의사가 직접 키운 제자들을 비싸게 고용해서 말이야.”

“정확한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별궁 한의원을 찾지 않는 이유가 또 있다고 봅니다.”

“아마도 정치적 줄타기 때문이겠지?”

“예, 전하.”

“맞아. 그것 때문이겠지.”

그 또한 사실이었다. 아무리 병원이라곤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황태자가 기거하는 별궁이다.

한데 이곳을 중앙 귀족이 들락거린다면? 그 귀족을 보는 주위의 시선엔 색안경이 씌워질 것이다.

‘아, 저 귀족이 황태자에게 줄을 대고 있나 보군.’이라고.

“저 중앙 귀족들만큼 줄타기에 민감한 이들이 없지. 자신의 의도와 달리 그런 시선을 받는 게 당연히 꺼려질 테고. 하지만 상관없어. 이번 연회가 끝난 뒤부터는 다들 앞다투어서 내 환자가 되려고 애를 쓸 테니까.”

“염두에 두신 계략이 있으신 겁니까?”

“……계략?”

“예, 전하.”

“…….”

라키엘은 뚱한 눈길로 가르딘 경을 쳐다보았다. 가르딘 경이 어깨를 움츠렸다.

“어, 어째서 그렇게 바라보십니까?”

“어쩐지 말이야. 가르딘 경도 그렇고. 데미안 녀석도 그렇고. 다들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의문이 들어서.”

“물론 어질고 훌륭하신 황태자 전하이십니다.”

“음흉한 계략도 막 꾸미고 말이지?”

“예, 전하.”

“…….”

“하……하하……. 그런데 혹시 피로하진 않으십니까? 제법 긴 여정을 치르고 돌아오신 뒤에도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않고 계신데.”

“화제 전환을 시도하시겠다?”

“…….”

“됐고. 초청장 준비부터 서둘러 줘.”

“알겠습니다, 전하.”

가르딘 경이 황급히(?) 물러났다. 계획이 착착 진행되었다. 연회도 착착 준비되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그 사이, 반가운 얼굴들이 별궁을 찾아왔다.

“……테오도르, 네가 찾아온 건 반갑긴 한데.”

“예, 형님. 크라노스에서 날아온 소식을 듣자마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어 그래. 말이라도 고맙다. 그런데-”

라키엘은 온몸으로 반가움을 반짝반짝 드러내는 2황자 녀석을 향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조금은 난처해진 시선을 2황자의 옆쪽으로 던졌다.

그곳에 엘프족의 집행자, 실비아가 있었다.

“집행자님? 어째서 여기 있는 겁니까?”

“……나?”

“예.”

“그대가 무사히 돌아왔다고 하여 반가운 마음에 찾아왔건만.”

“아니, 그건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어째서 당신이 아직 ‘이곳 황도에’ 있느냐는 말이죠.”

“……그게 어째서? 뭔가 문제가 되나?”

“예.”

“어떤 문제?”

실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키엘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혹시, 제가 크라노스에서 보냈던 서신, 못 받았습니까?”

“아, 그거. 받았는데.”

“그렇죠? 받았죠? 크라노스로 와 주면 좋겠다고 제가 썼던 내용도 봤겠지요?”

“물론이지.”

“그런데 왜 크라노스에는 오지도 않고, 아니, 아직 출발할 생각도 없이 여기에 있던 겁니까?”

“그대가 너무 일찍 돌아와 버려서.”

“…….”

너무나 명쾌한 대답에 어이가 없어져서 할 말을 잃었다. 당연하다는 듯한 실비아의 대꾸가 이어졌다.

“나는 그대의 서신을 받자마자 서둘러서 크라노스로 갈 준비를 시작했지.”

“그런데요?”

“준비를 끝마치기도 전에 그대가 돌아와 버렸고.”

“…….”

어오, 이 나무늘보 같은 종족 진짜.

대답을 들어보니까 새삼 알겠다. 저 엘프는 실제로 나름 ‘빠르게 출발하려고’ 준비를 했던 거다.

그런데 그 빠른 준비라는 개념이 인간과는 아득한 시간차가 있는 거다.

“후우. 알겠습니다. 한데 설마, 그동안 계속 2황자궁에 머물러 있었던 겁니까?”

“어. 그랬지.”

“어째서요?”

“장로들께 연락을 보냈고, 돌아올 답을 기다리는 중이거든.”

“무슨 답을요?”

“그대가 앙부아즈에서 태웠던 숲에 대한 보상 방식 말이야. 직접 하는 봉사 대신, 돈과 인력을 파견해서 보상하겠다는 그대의 중재안을 장로들께 문의했거든.”

“……그거, 집행자인 당신이 결정할 수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내게 결정권이 있는 건 맞아. 하지만 예의와 절차상 장로들께도 의사가 전달되어야 하거든. 물론 그분들도 집행자인 내 권한을 최대한 존중해서 동의를 표하실 거고. 말 그대로 형식적인 절차랄까.”

“그럼 그 형식적인 대답은 언제쯤 돌아오는 겁니까?”

“아마도 금방 돌아올 거야.”

“금방…….”

……최소 반년은 더 걸리겠구만.

라키엘은 혀를 찼다. 이제는 이 엘프라는 종족에 대해서 완전히 감이 왔다.

세상 이보다 느려터진 종족이 또 있을까. 아마 한국에서 운전대를 잡으면 경부고속도로에서 시속 10km/h로 무사태평하게 빌빌거릴 것 같다.

어쨌건 그렇게 2황자와 실비아의 반가운 인사를 받았다. 다시 연회 준비에 힘을 썼다. 닷새가 더 지났다.

예정된 연회가 개최되었다. 초청장을 받은 대부분의 귀족이 연회에 참여했다.

화려한 샹들리에.

우아한 음악.

향긋한 술잔과 음식.

“황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라키엘은 모두의 이목을 모으며 입장했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길.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그 시선들이 예전과 달라졌음이 실감이 났다.

‘다들 고민하고 있구만.’

이쪽으로 줄을 댈까 말까. 나름 고민에 잠긴 기색들이 느껴졌다. 무리도 아니었다.

지금 대세는 이쪽이 됐으니까. 그럼에도 여전히 이쪽의 건강에 대해 20년 넘게 쌓인 우려가 다 지워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저 아파트를 사면 값이 오를까. 이 주식을 사면 짭짤하지 않을까. 이번 주 로또는 자동을 돌릴까 말까. 딱 그러한 고민을 품은 것과 똑같은 느낌의 시선들이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조만간 저 고민을 확신으로 바꾸어줄 자신이 있었다. 계획이 있었다. 그 계획에 따라 일단 안구에 힘을 빡 주었다.

‘경혈 스캐닝.’

스캐닝을 발동했다.

키이이잉-!

옵션이 발동되며 시야가 바뀌었다. 그때부터였다. 인사를 하러 다가와 예를 표하는 귀족들. 그들 하나하나를 차례대로 스캔했다.

특히 그들의 발에 주목했다. 그들의 엄지발가락 관절, 그곳에 얽힌 난잡한 경혈의 흐름이 똑똑히 보였다.

‘빙고.’

역시나 예상대로다.

라키엘은 흐뭇한 웃음을 삼켰다. 그 사이, 통통빵빵 찐빵 같은 인상에 화려한 차림의 아저씨가 다가왔다.

“귀족원장, 에스토크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언젠가 스치듯 본 적이 있는 귀족원장이 정중한 예법을 건네어 왔다.

물론 예의상 꺼낸 인사겠지. 이쪽이 기다렸던 순간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제부터 오늘의 연회를 주최한 목표를 향해 혓바닥 시동, on.

……츄릅!

입술 근육을 풀었다. 혀를 촉촉하게 적셨다. 준비한 멘트를 만면에 짓는 웃음과 함께 팡팡 쏘았다.

“오, 이런.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보니 신수가 더욱 훤해지셨군요.”

“감사합니다, 전하. 이게 다 폐하와 전하의 어진 정치 덕분입니다.”

“그렇습니까?”

“예, 전하. 하면 저는 이만…….”

예의상 인사를 마친 귀족원장이 물러나려 하였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에게 물러날 틈(?)을 주지 않았다.

길 잃은 상대 서폿을 보자마자 페x커가 킬각을 잡고 이니시를 거는 것처럼. 혹은, 교통카드를 제대로 안 찍고 은근슬쩍 무임승차하려는 승객을 버스 기사님이 매의 눈으로 포착하는 것처럼.

대놓고 붙잡았다.

“그런데 공작님? 신수는 훤해지셨는데, 어쩐지 어딘가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예?”

귀족원장이 멈칫했다. 원래는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물러날 타이밍인데, 황태자가 대놓고 계속 물음을 던지니 예의상 물러날 수가 없게 됐다.

황족이 물었으니까. 대답을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제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인다는 게 어떠한 말씀이신지……?”

“혹시 말입니다. 가끔 밤에 자다가 발가락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지 않습니까?”

“예?”

“보이지 않는 악마가 엄지발가락을 잔혹하게 물어뜯는 것처럼, 열이 나며 벌겋게 붓고,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듯이 욱신거리고, 그래서 차라리 발가락을, 혹은 발목까지 통째로 잘라 버리면 후련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픈 통증 말입니다.”

“그건…….”

“아주 가끔, 잊을 만하면 그런 통증이 올라오겠지요. 한번 통증이 시작되면 심할 때는 사나흘 이상씩 시달리곤 하고. 그때마다 주치의를 불러서 닦달을 해보지만 딱히 뾰족한 처방을 받지도 못하고. 그저 고통을 달래주는 약만 먹으며 간신히 버티고. 맞습니까?”

“…….”

귀족원장, 에스토크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황태자의 말 그대로였다. 소름이 돋았다.

딱히 자신의 아픈 곳을 소문낸 적은 없었는데. 그걸 황태자가 어찌 이토록 소상히 알고 있는 걸까. 설마 자신의 주치의를 매수한 건 아닐까.

한데 그렇듯 돋아나는 소름을 느끼는 건 비단 귀족원장뿐만이 아니었다. 주위의 다른 귀족들 상당수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라키엘의 안부 인사(?)를 가장한 증상 설명을 들으며 저도 모르게 팔뚝에 돋아난 닭살을 쓸어 만졌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하였다. 저거, 딱 내 이야기인데?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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